1112화. 나 잘할 수 있을까? (2)
“쿠, 쿨럭.”
백천이 몸을 덜덜 떨었다.
독에 절어 버린 손은 진즉부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잠식한 독 기운이 없었다고 해도 떨고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쳐 힘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쿨럭!”
밀려오는 독 기운에 몇 번이고 마른기침을 토해 낸 백천이 고개를 힘겹게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잡고 있던 검을 겨우겨우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외쳤다.
“이겼…….”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백천의 몸뚱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겼…다…….”
철푸덕.
마지막 남은 일인이 썩은 고목처럼 허물어졌다.
그건 어찌 보면 희극적이고, 어찌 보면 비극적인 광경이었다.
연무장을 무너뜨릴 듯 악다구니를 써 대며 싸우던 이들 중 서 있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화산과 당가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끙끙대거나 거품을 문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끄으응…….”
“개…자식들…….”
“죽여…….”
신음 속에서도 간간이 욕설이 섞여 나왔다. 이걸 두고 대단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한심하다 해야 할지.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끝난 것 같은데요?”
“…….”
“가주님?”
“…….”
“저기요?”
당군악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가와 입매마저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하던 당군악의 이가 절로 꽉 맞물렸다.
“……것 같군.”
담담하게 보이려 애쓰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가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심기일전해 다시 붙었는데도 결국 패배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흐음. 그 정도로는 부족했나.”
“……그러다 죽어요.”
“자네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봐도 심하면 말 다 한 거죠.”
그 말에 당군악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보아하니 청명이 말리지 않았으면 오늘도 호되게 잡도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진짜 정상이 아니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청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이들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그가 반사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진 쪽은 새벽까지 수련할 생각이었는데.”
“끄으으응…….”
“아이고……. 아이고……. 나 죽는…다…….”
승자, 패자 할 것 없이 처참하게 널브러진 이들을 보며 청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보아하니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까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고, 약속대로 당가는 내일 오전에, 화산은 내일 오후에 나오면 돼.”
“…….”
“듣고 있어?”
“…….”
“어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청명이 몸을 돌렸다.
“……저긴 또 뭔 일이 벌어졌으려나.”
한숨을 푹 내쉰 그는 녹림과 남궁이 드잡이하고 있는 곳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제가 나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아직 몸도 성하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멀쩡해요! 이리 주세요!”
추 부인이 숙수가 든 접시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아, 아니, 벌써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해도 되는데.”
“아닙니다. 공짜로 하는 일도 아니고, 삯을 받고 하는 일인데요.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그러시면…….”
추 부인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종이 다녀간 이후 그녀는 장원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 아직은 적응하느라 요리보다는 허드렛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절대 짐이 되어서는 안 돼.’
그녀 역시 지금 자신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동정에 기대어 대충 일한다는 소리만은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곳에서 거하게 해 준 것은 물론이고, 불편하지 않도록 고용마저 해 준 화산의 제자들을 먹이는 일이다. 단 한 치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었다.
자라날 아이를 위해서도 말이다.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그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이 다들 배려해 주어 불편한 것도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접시를 든 채 식당으로 들어간 추 부인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뭔가 껄끄러운 곳에 다가가는 것처럼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긴 그녀는 식탁에 조심스레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앉은 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헌앙하기 짝이 없는…… 평소라면 저자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사내.
하지만 추 부인이 그의 얼굴을 힐끔거린 이유는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 잘생긴 얼굴이 초췌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래.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다. 이 화산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평범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사람들 몰골이…….’
이 광경을 처음 봤다면 강시라도 맞닥뜨린 줄 알고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퀭한 얼굴로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시체처럼 식탁 앞에 주저앉아 있는데.
“좀…… 드셔야…….”
“예…….”
추 부인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준 백천이 힘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추 부인은 식당을 나섰다.
백천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먹자. 먹어야지, 얘들아…….”
“예……. 사숙.”
“먹…어야죠…….”
화산 제자들이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제 앞의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 동작이 팔순 노인도 혀가 찰 만큼 느려 터졌다.
솔직히 말해 밥이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음식을 넘기기 싫다고 한 끼를 거르게 되면 내일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가 아니라,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한다. 그게 화산의 암묵적 철칙이었다.
“아야야야…….”
“끙. 입 안이 다 터졌어.”
“아오. 쓰라려…….”
음식을 씹던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얻어맞아 터진 곳에 음식물이 닿으니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입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별것도 아니었다.
“우, 우욱.”
“아……. 토할 것 같아.”
“사숙. 속이 울렁거려서 못 삼키겠습니다…….”
“아오……. 뭔 독을.”
화산 제자들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독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다 보니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감이 든 것이다.
“아니. 더러운 새끼들, 그렇게 이기고 싶나. 비무에 독을…….”
바로 그때였다.
본래 장강을 오가던 상인들의 짐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창고를 개조해 만든 커다란 식당 한쪽, 음식을 먹을 엄두도 못 내고 구경만 하고 있던 당가인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화산 제자들의 대화에 반응한 것이다.
“뭐? 비겁?”
제가 무슨 말을 해 버렸는지 깨달은 백상이 뒤늦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 하하…….”
윤종이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에 나섰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흥분하여…….”
“말이면 단 줄 아나? 우리가 진짜 비겁하게 독을 썼으면 지금 화산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잔아!”
박차고 일어났던 당잔이 당패의 호통을 듣고는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형님.”
“조심하거라. 아무리 바른말이라고 해도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해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진 건 진 것이잖느냐?”
매우 정석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이 꼬여 있으면 그 바른말도 고깝게 들리는 것이다.
“……바른마아알?”
조걸이 눈을 희번덕대며 당패와 당잔을 노려보았다.
“아이고, 우리가 이걸 몰랐네. 이겼다고 좋아하고 있었더니, 알고 보니 우리가 당가가 베풀어 준 자비에 목숨을 부지한 거였구나.”
“크흠. 아니.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렇게 억울하실 거면 제대로 독 쓰고 이기시지. 왜 져 놓고 혀가 이렇게 기실까?”
“뭐?”
“걸아! 말이 심하구나.”
“아니, 사숙!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저 새끼들 말하는 족족 우리를 은근히 무시한다고요!”
“…….”
“지들이 명문이면 명문이지! 진짜 명문인 남궁세가도 안 그러는데 사천당문이 언제부터 남궁세가보다 더 명문이었다고.”
“뭐, 이 새끼야?”
그 순간 당패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천당문은 언제나 오대세가의 이인자였다. 하북팽가와 더불어 남궁세가에 미묘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직접적으로 찔러 들어오니 순간 열이 확 뻗칠 수밖에.
“아니.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안 그렇습니까? 남궁 소…….”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조걸이 순간 입을 닫았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끌어들여 우위를 점할 생각이었는데, 남궁도위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언제나 정갈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핏발 선 두 눈으로 누군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남궁소협?”
“아이고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시겠네.”
그리고 그런 남궁도위의 바로 앞에, 하필이면 바로 건너편에 앉은 임소병이 의자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그는 발을 식탁에 올린 채 부채로 얼굴을 살랑살랑 부쳐 댔다.
“그런다고 진 싸움이 이긴 걸로 바뀌나.”
“이…….”
“아, 꼬우면 이기시든가. 내가 뭘 잘못했나? 녹림이! 우리 녹림이! 하찮은 산적 새끼들이 지금 남궁세가 따위보다는 더 강한 것을. 어휴, 내가 뭐 어쩔 도리가 있어야지.”
으드드드득!
남궁도위가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온 식당에 울렸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임소병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팔랑대는 부채가 얼굴에서 멀어질 때마다 푸르게 물든 눈두덩이 보였다.
하지만 상태야 어쨌건 간에 임소병에게서는 승리자의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아아, 그렇게 억울해하실 필요 없다니까? 남궁이 약한 게 아니라 녹림이 강한 거니까. 으하하하하하하하핫!”
“으……. 으으…….”
남궁도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실력으로 붙었으면 이겼습니다!”
“뉘에. 뉘에.”
“난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그저 경험이……!”
“예이, 예이. 그러믄요. 아이고 그렇고말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남궁도위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조걸이 절로 목을 움츠렸다.
‘저러다 사람 하나 죽겠는데?’
원래 저런 사람이 눈 돌아가면 더 무서운 법인데, 녹림왕은 겁도 없나. 진짜 있는 대로 긁어 대네……. 근데 저쪽은 어쩌다가 분위기가 저렇게까지 됐지?
그때 임소병이 고개를 돌려 당가 쪽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린다.
“아이고. 대단하신 사천당가께서도 신나게 얻어맞으신 모양이네. 이거, 이거 정파 꼴이 영.”
“저 산적 놈이?”
“진짜 뒈지고 싶소?”
“뒈져?”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아. 그럴 실력은 되시고? 화산한테도 얻어맞는 것들이?”
“으……. 아악!”
당잔이 더는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치며 달려들려 하자 당패가 소리쳤다.
“진정해라!”
“하지만 형님!”
“못 들었느냐? 가주님께서, 그리고 화산검협이 사사로이 검을 뽑는 이들은 반드시 단죄하겠다고 했다! 참아라!”
“으…….”
모두가 서로에 대한 적의를 있는 대로 드러내면서도 차마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근데 그거.”
“응?”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이, 유이설에게로 돌아갔다.
“……검만 안 뽑으면 된다는 뜻.”
“…….”
“…….”
추 부인은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양손에 접시를 든 그녀는 빠르게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여기 음식이 더 왔…….”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바로 옆으로 웬 사람 하나가 날아들어 벽을 뚫고 나갔다.
“으아아아아아!”
“너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 개자식아!”
“누가 할 소리를!”
“썩을 산적 새끼가!”
“이 샌님 놈이 누구보고 산적이래! 죽어어어억!”
힘들게 만든 음식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식탁과 의자, 사람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갈겨 댔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엉망으로 뒤엉킨 이들이 서로를 때리다 못해 물어뜯고 있었다.
추 부인은 몸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맹이고 나발이고! 이 개자식들아!”
“언제부터 너희가 우리랑 맞먹었냐!”
“하다못해 산적까지 지랄이네! 다 죽여 버린다!”
“으아아아! 다 덤벼!”
눈앞의 아비규환을 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은혜를 입은 게 아니라 된통 물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는 추 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