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화. 나 잘할 수 있을까? (1)
대부분 간과하기 쉬운 일이지만, 애초에 ‘정상’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칭할 때는, 상대가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적인 인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인즉, 어떤 곳에서는 정상인이라 지칭되는 이라 해도, 전혀 다른 이들이 사는 곳에 홀로 떨어진다면 괴이한 이로 불릴 수 있단 소리다.
그리고 지금 남궁도위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된 걸까?’
옛날에야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스스로 생각이 굳은 이는 아니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런 남궁도위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아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화산의 제자가 당가주의 아들내미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돌려 대고, 화산의 여검수가 당가 소가주의 팔을 무자비하게 꺾고 있는데.
아니, 뭐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럴 수도 있지.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은 이라면 이런 일도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무던하게 이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인을 찍은 스님이 당가 사람의 얼굴에 발 도장을 찍어 대고, 당가 출신의 여검수가 제 형제들을 칼로 쑤셔 대는 꼴까지 봐 버리면 그런 이들도 말이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 한 명이 없는 것 같은…….
“밟아! 밟아!”
“죽여 버려!”
“아아아아아아악!”
아이고, 윤종 도장. 왜 거기서 밟히고 계십니까. 아이고, 세상에. 신나게도 밟히시네…….
불신 가득한 눈으로 황망하게 눈앞의 광경을 보던 남궁도위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화산의 검은 무복을 입은 새하얀 족제비가 폴짝 뛰어올라 당가 사람의 뺨을 야무지게 후려치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이제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섬서의 패자와 사천의 패자가 이 장강에서 맞붙고 있었다.
말만 들으면 정말 거창하고 대단한 일인데, 막상 그 실상은 저잣거리 흑도……. 아니 흑도도 많이 쳐줬고, 뒷골목 왈패들이 서로 드잡이질하고 개싸움 하는 꼴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싸움을 피해 연무장 구석까지 밀려난 남궁세가 사람들은 진귀한 것을 구경하듯 그 패싸움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화산이 체력이 좋네.”
“당가가 난전에는 약하다는 인식이 있던데, 꼭 그런 건 아니었군. 애초에 이런 난전이 되어 버리면 독분을 피하기가 쉽지 않단 말이지.”
“그런 것치고는 화산 분들이 잘 싸우시는데?”
“당가 독보다 더 독한 인간한테 단련이 되셨잖아.”
“아, 그렇네. 이해했다.”
이해하지 마! 그걸 왜 이해해!
근묵자흑이라고 가면 갈수록 남궁세가도 이상해져 가는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저 모습을 보며 꼴불견이라 눈살 찌푸렸을 이들이 지금은 되레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까지 치고 있다.
하지만 남궁도위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애초에 이들을 천우맹으로 끌고 와 이 꼴로(?) 만들어 버린 이가 다름 아닌 남궁도위인 것을.
“아, 아니. 진짜 저래도 되는 건가?”
그로서는 쓰디쓴 평가지만, 지금의 남궁세가는 저 두 문파에 비견되기가 어렵다. 천우맹을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저 두 문파를 천우맹의 핵심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 두 핵심 문파가 지금 쌍욕을 퍼부어 가며 싸우고 있다.
‘이렇게 하면 악감정만 쌓이지 않나?’
도무지 이 수련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저 청명이나 당군악을 말릴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저, 저기…….”
“예?”
“그…….”
남궁도위가 마른침을 삼키며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남궁도위와는 달리 ‘이놈의 집구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울 게 없다.’라는 자세로 여유롭게 사태를 관전하던 임소병이 턱을 살짝 치켜들더니 시선을 맞춰 왔다.
“왜 그러십니까?”
남궁도위의 표정이 극도로 어색해졌다.
그도 이해는 한다. 천우맹에는 문파의 경계도 정과 사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한뜻으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천우맹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녹림은 스스로 천우맹의 당당한 일원이 될 자격을 증명했다. 애초에 녹림의 수장인 임소병이 목숨을 걸고 마교를 상대하는 데 합류해 버린 순간, 그 누구도 그의 진의를 의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는데……. 분명 그건 알고 있는데.’
머리로 이해한다 한들, 임소병에게 말을 거는 게 쉬워진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남궁세가의 소가주. 사파의 수장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날이 올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이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있어 녹림왕이란, 언젠가 목을 베어 협명을 날려야 할 희생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애초에 녹림이 어떤 놈들인가? 멀쩡한 산을 점거해 오가는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새끼…….
“소가주.”
“예?”
“지금…… 사람 불러 놓고 눈으로 욕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남궁도위는 명문의 자제다. 천우맹에서는 드물게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하고 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조금 진정을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하러 말입니까.”
“예?”
임소병이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청명 도장이 알아서 하시겠지. 당가주님도 계시고.”
“아, 아니. 그건 아는데…… 저러면 괜히 악감정만 쌓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럽니다.”
“호오?”
그 순간 임소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남궁도위를 응시했다.
“아, 그러니까 본인께서 저 화산검협과 독왕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셨다?”
“예?”
“그래서 저들은 모르는 걸 본인만 알아채고 지금 대책을 말해 주는 중이시다? 그것도 저쪽에서는 불편하지 않도록, 그래도 지위가 좀 있는 저를 전령으로 써먹으시겠다?”
“자, 잠시…….”
남궁도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해석이 될 일인가?
“다시 말해 저 둘은 굉장히 불편하지만, 산적 두목 새끼는 더럽게 만만하시다?”
“……저, 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눈앞에 있는 산적 두목 새끼는 직접 말을 하지 않으면 눈치도 못 챌 만큼 멍청한 인간이다?”
“…….”
사람이 이렇게까지 배배 꼬여도 되는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분명 강남으로 함께 갈 때만 해도 투덜거림이 잦아서 그렇지, 굉장히 영민하고 배포가 큰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반응은 확실히 녹림도들이 보기에도 이상한지, 한 산적 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슬그머니 임소병에게 물었다.
“두목. 왜 그렇게 빡치셨습니까? 딱히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은 못 할 게 없지.”
“예?”
“말을 한 사람이 문제지?”
임소병에게 말을 건 산적이 힐끔 남궁도위를 보았다.
“……뭔 문제라도 있소?”
“문제? 저쪽은 문제가 없지. 문제는 나한테 있지!”
“……아니. 그게 뭔 소리십니까? 자꾸…….”
“왜?”
그 순간 임소병이 눈을 희번덕대며 산적을 노려본다.
“왜? 산적 놈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든 입신양명해 보겠다고 과거까지 쳤는데, 낙방해서 결국 산적질이나 하고 사는 내가 명문가에 태어나 호의호식하는 도련님을 보고 배알이 뒤틀려서 이러는 것 같으냐?”
“…….”
“하핫!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물론 나는 아무리 공맹의 도리를 읊어 봐야 산적 새끼에 불과하고, 저놈은 길 가다가 멀쩡한 놈을 때려죽여도 대충 신분이랑 얼굴 보고 나면 ‘아, 죽은 놈이 죽을 짓을 했겠지.’ 하고 넘어가 주는 편안한 인생을 사는 놈이지만,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이 말이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놈을 부러워하느냐.”
“……숨 좀 쉬고 말씀하십쇼.”
녹림도들은 물론이고 남궁세가마저 어쩐지 숙연해졌다.
한번 터진 임소병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 내가 잘못했어. 귀하신 분이 일을 맡겨 주시는데, 미천한 사파 놈이 어떻게든 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지금 가서 전하면 될깝쇼?”
어쩌면 그렇게 조금 어색해지고 끝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남궁도위가 생각이 짧았다고 짧게 사과만 했어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남궁도위는 그럴 의향이 있었고, 실제로도 바로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뜻대로만 되는 때가 별로 없고, 항상 작은 불에서 큰불로 삽시간에 번지는 법 아니던가?
“거, 너무 삐딱하게 받으시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남궁도위가 기겁하여 돌아보았다.
뒤쪽에 서 있던 남궁세가 검수 하나가 영 아니꼬운 얼굴로 임소병을 보며 툭 말을 내던졌다.
“그렇게 배배 꼬여서야.”
“이, 입 다물…….”
남궁도위가 황급히 검수의 입을 막으려 했다. 겉보기와 달리 임소병은 녹림왕이다. 아무리 그래도 남궁세가의 일개 무인이 그리 쉽게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 말을 받았다.
“배배 꼬여?”
“……!”
남궁도위의 고개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획 돌아갔다. 임소병의 뒤쪽에 서 있던 험악한 인상의 녹림도 하나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이고. 인생에 힘든 게 없어서 위아래도 없으신 모양이네. 어디 잡부 새끼가 녹림왕께 아가리를 놀리지?”
“뭐야? 이 산적 놈들이 말이면 단 줄 아나?”
“산적? 오냐, 나는 산적이지. 그래서 니들은? 너희가 아직 옛날 남궁세가인 줄 아는 모양이지? 화산만 아니었으면 너희 같은 놈들은 옛날 옛적에 칼 맞고 뒈졌어.”
“아, 그래? 누가? 너희가? 설마 너희 따위가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주제를 알아야지, 산적 놈들이.”
“주제를 모르는 게 누구려나?”
남궁세가 검수들이 검 손잡이를 움켜잡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러자 녹림도들도 허리춤에 찬 칼을 꼬나쥐고 위협적으로 나섰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여기가 천우맹이 아니었으면 너희는 다 죽었어.”
“누가 할 소리를! 청명 도장이 너희를 종으로 부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직접 너희를 토벌했을 거다.”
“뭐야? 종? 제 가문도 버리고 여기까지 도망 나온 것들이!”
“뭐? 도망? 산적 놈이 저것도 터진 입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네?”
분위기가 극도로 흉흉해졌다.
당황한 남궁도위가 황급히 모두를 말리려 할 때였다.
“오, 좋네. 분위기.”
“처, 청명 도장!”
어느새 나타난 청명이 휘적휘적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칼을 꼬나쥔 녹림와 검을 잡은 남궁세가를 쭉 훑어보더니 눈살을 확 찌푸렸다. 남궁도위는 일단 폭풍을 막아 보고자 한 발짝 나섰다.
“여긴 제가 수습…….”
“마침 잘됐네.”
“예?”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명할 것도 없이 분위기 미리 만들어 놨으면 잘한 거지. 어차피 너희도 저거 보고 구경만 하기 심심했지?”
“…….”
“그런데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건 있단 말이야.”
“어, 어떤…….”
“그래도 명색이 남궁세가고, 명색이 녹채인데, 불만이 있으면 칼질을 하든, 주먹질을 하든 해야지. 좋은 칼 놔두고 왜 그걸 말로 하고 있어?”
“예?”
청명이 뒷짐을 진 채 턱짓했다.
“저기 보이지? 저기 싸우는 거.”
“……예.”
“어, 다를 것 없어. 오늘 마지막에 서 있는 쪽이 내일 쉰다. 진 쪽은 새벽까지 굴릴 거야.”
“…….”
“알아서 시작하고. 이긴 놈은 보고하러 와.”
“자, 잠시만. 청명 도장? 청명 도장!”
할 말을 마친 청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멍하니 그런 그 뒷모습을 보던 남궁도위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삐걱삐걱 뒤를 돌아보았다.
칼을 꼬나쥔 녹림도가 실실 웃으며 남궁세가를 향해 다가가고, 그런 남궁세가 검수들이 그런 그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이거 이러기 싫었는데. 참.”
“본의 아니게 거참.”
“어쩔 수가 없네. 악감정은 저언혀 없는데 말이지.”
차라리 욕을 해라, 차라리.
“다 들었지? 오늘 저 샌님들한테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주자!”
“산적 새끼들이 산에서 내려오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알려 줘라!”
그렇잖아도 평소 서로를 영 달갑지 않게 여겼던 남궁과 녹림이 가진 바 불만을 모조리 터뜨리며 서로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