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화. 한 번씩은 소름 돋는다니까. (3)
털썩.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무릎이 끝내 꺾이며 땅에 닿았다.
입가에 흐르는 피, 부들부들 떨리는 손. 원독으로 가득 찬 눈.
증오와 원한을 모두 담은 입이 서서히 열렸다.
“어째…서…….”
“후후후.”
오연히 선 백의의 미남이 제 앞에 무릎 꿇은 사내를 서늘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너무 원망 마십시오.”
“…….”
“강호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 당신…….”
울분에 찬 목소리가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미남자의 곁에 서 있던 간사한 인상의 곱슬머리 사내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의 눈에서 경멸과 비웃음이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이거……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믿었던 이.
동향 출신이기에 더욱 믿었던 이의 비열한 낯을 보고 있자니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난자당하는 것만 같다.
“세상에 믿음만큼 부질없는 말이 또 있나. 큭큭큭. 멍청함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시오.”
“개…….”
사내가 앞으로 서서히 고꾸라졌다.
“개새끼…들…….”
털썩.
마지막까지 버티던 당패가 쓰러진 순간, 화산의 제자들이 우레와 같이 만세를 불렀다.
“이겼다!”
“내일 반나절은 쉰다!”
“엄마! 나 당가 이겼어!”
반나절 휴식을 보장받은 화산 제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환호했다.
“반나절이다! 반나절! 세상에!”
“나 청명이 새끼 오고 나서 반나절 쉬어 보는 거 처음이야!”
“내일은 늦잠 자야지! 진짜 절대로 안 일어나고 잘 거야!”
“술이다! 오늘 밤은 술이다!”
거의 미쳐 날뛰는 수준이었다.
당패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공중제비라도 돌 것처럼 굴어 대는 화산 제자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민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저거도 중이라고.’
물론 다른 도사 놈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스님이라는 인간이 사람을 때려눕히고 술 퍼먹겠다고 기뻐하고 있다니. 대체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단 말…….
응? ……소소야?
너는 그렇게 좋아하면 안 되지. 내가 네 오라빈데…….
네가 제일 기뻐 보인다? 응? 소소야?
“꺄하하하핫! 휴식이다! 휴식! 사고, 내일 시전에 놀러 나가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휴식. 재충전. 휴식. 좋은 것.”
기뻐 날뛰는 화산 제자들을 바라보는 당가인들의 눈에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믿었는데, 개새끼들.’
뭐? 동료? 동지 의식? 저런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에게 그런 걸 바라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불공평하다. 이건 불합리해.’
애초부터 잘못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아니, 막말로 검을 쓰는 이와 암기를 던지는 이들이 바로 옆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더구나 당가는 도열하느라 따닥따닥 붙어 있었단 말이다!
기본적으로 암기란 발출하는 데 거리가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공간을 확보해야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게 섬세한 무기란 말이다!
그런데 거리도 안 주고, 마음의 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동료라고 믿었던 놈들이 습격을 해 댄다면?
‘이렇게 되는 거지.’
완전히 박살이 나 뒹굴던 당가인들은 모멸감과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런 비겁한…….”
“응? 사숙? 저기서 뭐라고 하는데요?”
“응? 무슨 말을?”
“비겁하다는데요?”
“이놈!”
백천이 엄숙한 얼굴로 조걸을 크게 나무랐다.
“저분들은 당가 분들이시다. 당가 분들이 패하고도 변명을 늘어놓는 그런 치졸한 소인배로 보인단 말이냐! 어디서 그런 망발을 늘어놓느냐!”
“크으. 사숙.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패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그는 조금 전에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어떤 건지.
하지만 당잔은 그보다는 화가 덜 난 모양인지 벌떡 고개를 들고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쳐 댔다!
“아니! 그건……!”
“사숙, 분명히 들리는데요?”
“그럴 리가 없다잖으냐!”
“그럼 이건 무슨 소립니까?”
“강바람 부는 소리겠지.”
“아.”
“…….”
저 개새끼들이 진짜…….
당잔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소리쳤다.
“장난은 그 정도면 됐습니다, 백천 도장! 아무리 실전 같은 대련이라지만, 적어도 기습은 아니잖습니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주셨어야지요!”
“아…….”
순간 당잔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빛이 심드렁해졌다.
당잔이 분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바닥을 쿵 내리치며 외쳤다.
“바로 옆에서 습격하는 게, 진정 당당한 정파인으로서 할 행위입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백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당잔은 백천이 가져올 모든 논리에 대응할 준비를 마쳤다. 이미 승부는 난 것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저들의 마음을 찝찝하게라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백천의 말은 그런 그의 의욕을 모조리 시궁창에 처박아 버렸다.
백천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정파의 법도가 아니시라면 뭐, 저희가 정파 아닌 걸로 하죠.”
“…….”
“사파인 걸로 합시다.”
입을 쩍 벌린 당잔을 향해 백천이 대놓고 어깨를 으쓱했다.
“비무도 아닌데 준비할 거 다 준비하고 예의 차려 가면서 싸울 거면 그냥 사파 하면 되겠네.”
“크으. 우리 사숙 오늘따라 혓바닥이 매끄러우시네.”
“청명신공이 극성에 달하셨어.”
“사숙, 그럼 이제 사패련에 가입하러 가야 하…….”
“선 넘지 마!”
윤종의 주먹에 얻어맞은 조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얻어맞아 튕겨 나가면서도 조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분에 겨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당가와는 달리 말이다.
“끄으…….”
“저, 저…….”
당가인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얻어맞은 곳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버틸 만하다. 당가 사람들을 정말 버틸 수 없게 만드는 건, 비겁하게 달려들어 승리를 쟁취해 놓고 세상에서 제일 개운하다는 얼굴로 기쁜 티를 내는 저 빌어먹을 화산 놈들이었다.
‘내가 잠깐이지만 저런 것들을 동료라고 생각했구나.’
‘이득만 되면 친지도 팔아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저 근본도 없는 놈들!’
화산을 보는 당가인들의 눈빛이 점점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눈으로 변해 갈 때였다.
“결판이 났군.”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획 돌렸다. 당군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화산은 내일 오전 수련을 쉬는 걸로 하지.”
“만세!”
“크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주님!”
화산인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가운데, 청명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쉽사리 약속을 어기게 되면 다음에 부려 먹기가 힘들어진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끄응. 좋으시겠어요? 가주님도 쉬시고.”
“나 말인가?”
“네. 수련시킬 놈들이 없어지잖습니까.”
“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수련을 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자네일세.”
“네? 저요?”
“그렇지. 자네도 화산파 아닌가? 이건 분명 이긴 쪽이 쉬는 승부였을 텐데?”
“……그렇긴 한데, 저는 예외…….”
“괜찮네. 내일 오전은 좀 쉬다 오게.”
“아니. 저는 괜찮…….”
“쉬다 오게.”
“아니…….”
“쉬라고.”
점점 굳어 가는 목소리에 청명이 입을 다물고 힐끔 당군악의 눈치를 살폈다. 항상 근엄하고 잠잠하게 굳어 있던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빡치셨네.’
저 양반이 얼굴근육을 통제 못 할 상황이라면 단순히 화가 났다는 걸로 표현될 일이 아니다. 보통 화산에서는 이런 경우를 두고 ‘눈깔이 돌아갔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하기야…….’
그래도 믿었던 가솔들이 뭘 해 보지도 못하고 박살이 나 버린 상황이다. 가주인 당군악이 열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라면 제 실력을 발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변명이 먹힐지도 모르겠지만, 어디 당군악이 그런 변명이 통할 사람이던가?
“후.”
당군악이 짧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 안일했던 것 같군.”
그 순간, 청명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아 본 게 대체 얼마 만이던가?
“승자는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지. 자네는 내일 화산과 함께 푹 쉬도록 하게. 될 수 있는 한 오래.”
“아니, 오전만…….”
“오래 쉬게. 사람이 너무 휴식 없이 달리는 것도 좋지 않네. 내가 분명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건 이미 끝난 이야…….”
“말 듣게나.”
“네.”
당군악이 개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목소리 높여 말했다.
“자, 그럼 화산파 분들은 그만 자리를 비워 주시게.”
“크으. 가주님, 저희가 이기는…….”
텁!
백천이 눈치 없이 떠드는 조걸의 입을 얼른 틀어막고, 윤종이 조걸의 아랫배에 정권을 날렸다.
“끄윽…….”
삽시간에 거품을 물고 늘어진 조걸을 둘러업은 백천이 정중하게 당군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희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푹 쉬게나.”
“가자, 빨리!”
“예!”
“다, 달려요!”
얼굴이 새파래진 당소소가 다른 이들을 재촉했다.
조걸을 제외하면 눈치가 백 단인 화산 놈들이 부리나케 달려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백아마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 제자들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흐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달아나는 화산의 제자들을 느긋하게 응시하던 당군악이 당가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 가주님…….”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패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실력이 모자라면 패할 수도 있지. 나 역시 살면서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니.”
“아…….”
“그러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중요한 건 패하지 않는 게 아니라, 패배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다.”
당장 불호령을 내릴 줄 알았던 가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오자 당가인들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울분과 억울함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가주님…….”
“소가주.”
“예!”
“무엇을 배웠느냐?”
당패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한 언제 어디서고 방심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좋군.”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짙은 검미(劍眉)가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
“다만.”
“……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돌연 당군악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 하나 사천당가의 문하라면 결코 그리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 너희의 가장 큰 문제는 한번 전열이 무너진 순간 승부를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목소리에서도 감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건 결국 독기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어째서인 줄 아느냐?”
“그, 그건…….”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패한다 해도 죽지 않기 때문에, 패한다 해도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에.”
“…….”
“오늘 너희와 화산이 맞붙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내 실수를 깨달았다.”
“무, 무슨…….”
그 순간, 소매 안에 감춰져 있던 당군악의 손이 밖으로 천천히 빠져나왔다.
“너희를 단련시키는 데 굳이 암기까지 쓸 것도 없다는 사실을 내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
“확실히 이건 내가 부족해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 나부터 먼저 반성하고…….”
우드드득.
소매 밖으로 나온 당군악의 손이 천천히 말렸다. 그러자 손등으로 우둘투둘 핏줄이 돋아났다.
“다시는…… 이런 처참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주먹을 꽉 쥔 채 다가오는 당군악을 망연히 보던 당패는 문득 저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에라……. 썩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저 화산 새끼들이랑은 시작부터 악연이었다.
동료는 개뿔이, 튀겨 죽일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