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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07화 (1,108/1,567)

1107화. 한 번씩은 소름 돋는다니까. (2)

당패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빈 숟가락이 허공에서 초당 열두 번씩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허…….’

그의 눈은 빛이 꺼져 반쯤 죽어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손으로 무언가를 집어 먹기를 애초에 포기해 버린 형제들이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고, 손으로 밥을 떠먹는 건 불가능하니 그냥 명문의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어떻게든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있는 것이다.

‘체력…….’

어째서 청명이 당가의 무학에 체력이 필수적이라고 했는지, 당패는 이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당장 밥도 떠먹지 못하는 손으로 무슨 놈의 암기를 던지겠는가?

당가의 무학에 정교함이 필요하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정교함이란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체력 위에서나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제 손도 못 가누는 놈이 정교해 봐야 얼마나 정교하겠냐 이 말이다.

‘알긴 아는데…….’

예전에 백천이 그에게 한 말이 기억난다.

청명이 입만 열었다 하면 욕해 대는 백천을 보며 당패가 의아해 물은 적이 있었다. 청명 도장이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시냐고. 그때 백천은 분명히 이렇게 답했었다.

- ……나중에 겪어 보면 아실 겁니다.

그래. 이제 알겠다. 뼈저리게 알겠다.

옳은 소리를 해 대니까 반항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닥치고 시키는 대로 따르자니 당장 내가 죽을 판이다.

문제는 여기서 반발을 하면 당패만 근성 없고, 노력하지 않는 머저리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명분을 가지고 몰아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끄으으…….”

“제, 제길…….”

당가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화산이 왜 그렇게 강해졌나 했더니. 이런 수련을 시키면 토끼도 범 때려잡는 데 몇 년 안 걸리겠다.’

“혀, 형님. 진짜 이러다 죽는 것 아닙니까?”

“걱정 마라. 안 죽는다.”

“아니, 어떻게 아십니까?”

“저기 봐라.”

“예?”

“안 죽었잖느냐?”

당잔이 고개를 들어 당패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화산 사람들이 의자에 반쯤 늘어져서 앞에 놓은 음식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안 드신답니까?”

“아침 먹은 걸 다 토하셨다는구나.”

“…….”

“나도 몰랐지. 가주께서 그렇게 신나서 날뛰실 줄이야.”

“살다 살다 그런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참 다행이지.”

“예? 뭐가요?”

“우리가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게 말이다……. 그건 안 보는 게 나은 거지.”

당군악은 물을 만났다.

비도를 못 던져 한이 맺혀 죽은 원귀라도 씐 모양인지, 화산 사람들만 보면 인사 삼아 비도를 던져 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인사 삼아 던진 비도라 해서 그 비도를 받는 사람들이 인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화산의 제자들은 눈으로 봐도 확연히 티가 날 만큼 메말라 가고 있었다.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간다는 게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로군.’

당패가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가 입장이 좀 나은 편 아니더냐? 그러니 우는소리 하지 말자꾸나.”

“……못 들으셨습니까?”

“뭘?”

“……아까 오전 수련 끝나고 청명 도장이 ‘이제 슬슬 기초는 잡혔군. 그럼 이제 강도를 좀 올려서 제대로 해 봐야지.’라고 하시던데요?”

“그 미친 새……. 크흐흐흐흠!”

당패가 재빨리 헛기침해 입에서 튀어나오던 말을 잘라 버렸다.

‘아니. 뭔…….’

이쯤 되면 이제 청명과 당군악이 누가 더 상대편 제자들을 잘 괴롭히는지 경쟁하는 수준이 아닌가? 두 고래의 싸움에 애먼 새우들의 등만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는 걸 행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더니.”

한숨을 푸욱 내쉰 당패가 문득 온기 어린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분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예?”

“……만약 당가만 이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거라. 지금쯤 불만이 열 배는 더 튀어나오지 않았겠느냐?”

“그…건 그렇죠?”

당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해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당장 며칠 전까지는 화산과 청명에 대해 성토하는 목소리가 쉬지도 않고 흘러나왔었지만, 당군악이 직접 화산 제자들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말들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미묘한 적대감 대신 동지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저들도 같은 고통을 받는 동료이고, 지금 그들이 받는 수련을 이제껏 받아 오던 사람들 아닌가?

“짐도 함께 들면 조금은 가벼워지는 법이지.”

“……그냥 짐이 늘어난 것 아닙니까?”

“그냥 그렇다고 치자꾸나.”

당패가 묘한 눈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가주님이나 청명 도장은 이런 것마저 염두에 둔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당가와 화산의 관계가 서로 가깝다는 건 조금 허상에 가까운 말이었다.

실제로 사이가 가까운 것은 현종과 당군악, 그리고 청명과 당군악이다.

그들이 화산과 당가를 대표하니 문파 간의 사이가 가깝다는 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사실 각 문파의 구성원들끼리는 딱히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서로 꺼리는 관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았단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수뇌부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화산과 당가의 관계도 지금 같지는 않을 거란 의미지.’

당패는 나름 화산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패는 당군악처럼 제왕적인 가주가 되기는 어렵다. 그럼 결국에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화산과 당가 사이에도 동지 의식이 생겨날 것이고, 수뇌부뿐만이 아닌, 구성원들끼리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이 악역을 자청하는 것인가?’

어쩌면 수뇌부는 그가 미처 볼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당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당패의 생각을 모르는 당잔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오후 수련은 또 어떻게 합니까?”

“우는소리 하지 말거라. 자는 시간은 주지 않느냐?”

“잔다고 피로가 다 회복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요즘은 운기를 해도 도무지 몸이 가벼워지질 않습니다. 어깨에 쇳덩어리를 지고 다니는 것 같다니까요?”

그 말을 들은 당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잔을 보았다.

“그게 핵심이지.”

“……예?”

“앞으로 우리는 짧은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겪어야 한다. 그건 이해하고 있겠지?”

“예.”

당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건 이번 매화도 사태 때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까지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하고 싸우는 일상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

“봐라.”

당패의 말에 당잔이 고개를 돌렸다. 당가 사람들이 여전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다.

“저기도.”

당패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린 당잔의 눈이 살짝 휘둥그레졌다. 분명 조금 전에는 똑같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화산 사람들이 어느새 기운을 차리고는 음식을 입 안으로 퍼넣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이 상태로 전쟁에 투입된다면 어떤 꼴이 날지 이해가 가느냐?”

“……예, 형님. 아마 제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도 틀린 말이다.”

“예?”

“발휘하지 못하는 실력 같은 건, 애초에 실력이 아닌 것이다. 그건 변명에 불과하지. 실전에서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힘만이 실력이라 불릴 수 있다.”

“…….”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상 모든 것이 뒤바뀌는 거지. 당가가 전력상으로는 화산보다 앞서 있다는 세간의 평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저들만 못해.”

“혀, 형님. 그건…….”

당패가 서늘한 눈으로 당잔을 돌아보았다.

“왜? 너도 겉모습만 보는 세인들의 평가에 편승해 자신을 올려 치고 싶은 것이더냐?”

“…….”

“우리보다 강하다고 평가되었던 남궁세가가 그리 처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서도?”

“그런 건 아닙니다, 형님.”

당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청명 도장과 가주님은 단순히 하나만 보고 일을 하는 분들이 아니시다. 최소한 서너 가지는 보고 계시겠지.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믿고 따르면 반드시 빛을 볼 순간이 올 것이다. 설마 그분들이 우리를 괴롭히겠다고 저러시겠느냐?”

“……그 말도 맞습니다.”

“그래. 그러니 먹자. 버티려면 먹어야지.”

당패가 음식 그릇을 어찌어찌 붙잡고 입 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당패는 몰랐다.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해도, 한없이 좋은 뜻으로 행하는 일이라 해도, 그 방법에 따라서는 악의를 가지고 행하는 일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게 이해가 안 돼?”

청명이 더없이 해맑게 웃었다.

누가 봐도 산뜻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당패의 눈에는 저 미소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의 웃음 같아 보였다.

“너희도 지쳤잖아.”

“……그렇죠.”

“쉬고 싶잖아. 그렇지?”

“그야…….”

“그러니까 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당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도장님?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거야 당연히 이해했죠.

“그런데 그 방법이…….”

“크으. 그래. 그게 핵심이라는 거지.”

청명이 따악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튀겼다.

“휴식이라는 거 좋지. 참 좋아. 그런데 사람이란 게 그렇다? 그냥 툭 하니 던져 주는 것에는 가치를 못 느끼는 법이야.”

“그건 또 무슨 개……. 아니, 그건 무슨 소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가치를 느끼게 해 주겠다는 거지.”

청명이 히죽 웃었다.

“너희도 당가인으로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잖아? 누구와 맞서도 이길 수 있다는.”

“……그렇습니다만.”

청명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그건 저놈들도 마찬가지일 거거든?”

청명이 턱짓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가리켰다. 두 눈에 독기밖에 남지 않은 그들이 굶주린 살인마 같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림의 법도는 간단하지. 강한 자가 가지고, 증명한 자가 얻는다. 그러니까…….”

청명이 다시 한번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튀겼다.

“이긴 놈들은 내일 오전 훈련 빼 준다 이거야. 간단하지?”

“자, 잠시만요. 그게 무슨?”

아무리 그래도 같이 수련하던 동료끼리 편을 갈라 싸우라니! 이런 행위가 용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지금 당가와 화산이 편을 갈라 싸우면 기껏 싹트던 동지 의식이 뽑혀 나가지 않는가.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아, 거 독쟁이 새끼 말 참 많네. 하긴, 그래. 뭐 아직은 익숙하지 않겠지. 이해해. 그거 해결하는 법도 엄청 간단한데.”

청명이 해맑게 웃었다.

“한번 처맞아 보면 정신이 번쩍 들 거야.”

“예?”

“마지막에 서 있는 쪽이 이긴다. 준비하시고.”

“예?”

“시작.”

청명이 손뼉을 짝 쳤다.

당패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억지를 부려 대는데 누가 따르겠…….

“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당패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획 돌렸다.

피를 나눈 전우처럼 느껴지던 화산의 제자……. 아니, 화산의 개종자 놈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죽여어어어어어어!”

화산과 당가의 동맹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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