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화. 이런 보답이라면 받아 볼 만도 하구나. (5)
청명이 당군악을 향해 물었다.
“뭐가요?”
“글쎄.”
당군악은 바로 답해 주는 대신 의뭉스럽게 웃었다.
청명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저 얼굴에서 자신을 보며 히죽 웃어 대던 어떤 인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핏줄은 핏줄이라는 건가?’
가문이란 이래서 무섭다.
서로 다른 이들이 같은 의지를 이어 나가는 문파와는 달리, 가문은 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때때로 이들에게서 과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곤 하는 것이다.
“딱히 힘들 게 없는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당군악이 말끝을 흐리며 제 손에 들린 술병을 슬쩍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는군.”
“…….”
“사실 이제 자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 아들놈은 굳이 신경을 써 줄 필요도 없는 피라미에 불과하지.”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퉁명스러워 보이는 청명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온종일 사람들을 다그치고 가르치느라 힘이란 힘은 다 빼고서도 굳이 상태를 살피러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그냥 술 먹기 좋은 자리를 찾은 거거든요.”
“여기가 말인가?”
당군악이 휑한 처마 위를 둘러보았다.
“……취향이 독특하군.”
“그런 말 좀 듣죠.”
적당히 넘기며 청명은 쓰게 웃었다. 이래서 당가 사람들은 쉽게 보면 안 된다. 무심하게 툭툭 핵심을 찔러 오니까.
물론 그 인간은 그런 당가에서도 별종 같은 인간이었지만.
“자네는 충분히 잘해 왔네.”
뜬금없이 나온 그 말에 청명이 당군악을 흘끗 보았다.
“화산을 이만큼이나 키우고, 천우맹을 만들어 내고, 결국에는 사패련을 저지했으며, 마교의 발호마저 막아 냈지. 지금까지 자네가 이룬 업적만으로도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네. 구파의 머저리들이 자네를 경원시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천하에 자네의 명성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겠지.”
“…….”
“때로 자네를 보고 있자면,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라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잔하세나.”
“네.”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의 술병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동시에 술을 쭉 들이켰다.
“크으.”
술병을 떼어 내고 입을 훔친 청명이 히죽 웃었다.
“그러고 보면 대 사천당가의 가주님께서 술병째로 술을 먹는 건 흔치 않은 일 아닌가요?”
“……자네와 마시는 일이 아니면 그럴 일이 없긴 하지.”
당군악이 묘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군.”
“그럼 된 거죠, 뭐.”
“그렇지.”
당군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술병을 매만지던 그는 잠시 후 다시 입을 뗐다.
“그래, 대단하지. 지금까지 한 것으로도 말이야. 그런데…….”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그 이상을 하려 하는군.”
“…….”
“때로는 자네가 한 가지를 잊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네.”
“……뭘요?”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네.”
“아니, 제가 뭔 바보도 아니고.”
“그렇지. 바보가 아니지.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겠지.”
고요한 밤중이라 술병에 든 술이 찰랑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일세. 그 사실을 주로 잊어버리는 이는 바보가 아닐세. 오히려 과하게 똑똑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곤 하더군.”
청명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자신은 괜찮다고 믿거나, 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거나…….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유야 있을 거야.”
“음…….”
“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다고 해도, 무리하고 있단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청명의 표정이 묘해지자 당군악이 가볍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뭐…… 비슷한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참 다르다는 그런 생각이요.”
“응?”
청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 젠장, 댁이 안 달려가면 그 새끼들 다 뒈지기라도 한대? 아니, 그게 아니지! 그 새끼들이 다 뒈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평소에 뒈지라고 욕하던 놈들이 뒈질 판이면 좋다고 박수를 쳐도 모자라지! 그런데 그걸 형님이 왜 구하러 가냐고! 다친 팔모가지가 몸뚱이에서 이제 그만 이탈하겠다고 덜렁대는 상태인……. 저? 저, 저! 야! 인마! 거기 안 서? 야!
……돌이켜보면 그놈은 확실히 미친놈이었다.
다행이지. 그 핏줄이 이어지지 않아서. 당가의 입장에서는 천운이다.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이더군.”
“네?”
“당가를 단련시키는 데 자네만 한 적임자는 없네. 그건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는 일이지.”
말을 하던 당군악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제 능력의 한계를 알고, 청명이 가진 능력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가문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좀 그러시면 직접 하실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네.”
슬쩍 눈치를 살피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새삼 이 사람도 참 많이 바뀌었구나 싶어서였다. 처음 사천에서 보았을 때는 어떻게 이리도 사람이 안하무인일 수 있는가 싶었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라 씁쓸한 거지.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 그러니 가장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문제는…… 그 효율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결국 자네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나하나 효율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자네에게 모든 일이 몰릴 수밖에 없다는 거네.”
“…….”
“그건 좋은 방향이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듣고 있던 청명이 이내 피식 웃었다. 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역시 잔소리쟁이들이란 사실은 똑같다.
“자네가 이제 와 저들을 가르치려 하는 이유는…….”
“화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천우맹 전체가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놈이 자기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지도 않고 모든 일을 혼자 떠맡으려 한다. 멍청하게.”
“…….”
“그 말 하시려는 거죠?”
당군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게는 빼도록 하지.”
“아, 성격 나쁘시기는.”
낄낄대며 웃은 청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렇게 미련하지는 않으니까. 안 그래도 깨달은 참이었거든요.”
“뭘 말인가?”
“그냥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는 친구라고 할 수 없다.”
“…….”
“뻔한 사실이죠.”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요청을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내게 말인가?”
“예.”
당군악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청명이 진 짐을 조금 나눠 지고 싶어서다. 이제껏 청명은 너무 많은 일을 도맡아 해 왔다. 심지어는 현종이나 당군악에게도 딱히 손을 벌린 적이 없다.
당군악은 이제 더는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청명이 이런 식으로 부탁할 게 있다고 냉큼 말한 것이다.
‘궁금하군.’
정말 준비한 것이 있는 건지, 그저 적당히 지어낸 말인지, 그건 청명의 말을 들어 보면 결론이 날 것이다.
“무엇인가?”
그 순간 청명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분명히 가주님이 당가를 가르치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결국엔 하던 걸 반복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가주님도 아주 쉽게 악마가 될 수 있죠.”
“으음?”
청명이 제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당군악의 입꼬리가 묘하게 당보의 것과 닮아 가기 시작했다.
* * *
방을 나선 조걸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았다.
“좋구나.”
절로 휘파람이 나온다. 기운차게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의 등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뭔 기분이 그렇게 좋으냐?”
“아, 사형!”
조걸은 반갑게 윤종을 돌아보며 낄낄 웃었다.
“요즘 몸이 너무 개운해서 말입니다.”
윤종은 뭐라 말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사실 그도 요즘 좀 편하기는 했다.
“청명이 그놈이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 우리를 못 괴롭히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이냐?”
“웃을 일은 아니죠.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걸 뭘 어쩌겠습니까?”
윤종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화산에서도 가장 청명이 놈의 괴롭힘……. 아니, 강도 높은 수련에 시달리는 건 다름 아닌 오검이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 수련할 때도, 유독 오검은 몇 배나 되는 강도로 수련해 왔다.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애정 어린(?) 특별 취급에 넌덜머리가 났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최근엔 그 청명이 놈이 녹림과 당가에 신경을 쓰느라 그들을 제대로 괴롭히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제자들만큼의 수련만 하면 되는 오검은 기운이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크으. 진작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좋은 일이 아니라니까.”
“압니다. 알아요. 열심히 수련해야 강해진다는 것. 하지만 사형. 살면서 이런 날도 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윤종도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조걸도 윤종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청명이 놈의 집요함은 상식을 초월한다. 그런 놈이 오검의 꿀 빠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리는 없다. 그럼 차라리 쉴 수 있을 때 편히 쉬어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연무장에 도착한 조걸은 먼저 나와 있는 사형제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역시나 다들 기운이 넘치네.”
그 대가로 희생되고 있는 녹림과 당가, 남궁세가 사람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그래도 좋은 걸 뭘 어쩌겠는가? 사람이 이럴 때도 있어야지.
조걸이 백천을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사숙, 나오셨습니까?”
“늦어!”
“……에이. 청명이 놈도 아직 안 나왔는데요, 뭐.”
너스레를 떠는 조걸을 보며,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놈은 활동량 높은 강아지 같은 놈이라, 충분한 수련을 통해 기운을 빼놓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된다.
“그러는 사숙도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크흠…….”
“반면에…….”
조걸이 슬쩍 다른 쪽에 서 있는 이들을 보았다. 녹림과 당가는 아예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그나마 남궁세가는 조금 나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일 뿐, 힘겨워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가엾게도…….”
“……작작 해라, 걸아. 그러다가 청명이 놈이 다시 우리만 조지면 어떻게 하려 그러냐?”
“뭐 그게 문제라도 됩니까? 항상 당하던 건데?”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저 자꾸 겁주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오늘만 살다 죽으렵니다. 좋은데 좋다고 말도 못 합니까? 낄낄낄.”
백천은 그냥 다 포기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말이 통할 놈이 아니다.
그때였다.
“저기, 청명이.”
유이설이 나직이 말했다. 백천이 그 방향을 돌아보니 과연 청명이 놈이 만사가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음?”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청명이 놈은 항상 저런 모습이니까. 백천이 의아해하는 이유는 저놈 옆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있어서였다.
“누구지?”
“당가주님이신 것 같은데요?”
화산의 제자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잔은 제 옆에 선 당패를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 가주께 언질을 주셨냐는 물음이 시선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패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아침이네.”
연무장에 도착한 당군악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미소 지었다.
“오늘부터는 나도 수련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가르치시는 겁니까?”
“그럼 배우시겠냐, 이 새끼야?”
윤종이 뻘소리를 해 대는 조걸에게 지체없이 욕을 박았다.
청명이 당군악을 보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맡겨 두게.”
그와 미소를 교환한 당군악이 저벅저벅 걸어 화산의 제자들 앞에 섰다.
백천은 의아한 얼굴로 당군악을 보다 차분히 말했다.
“당가주님. 당가는 저쪽…….”
“여기가 맞네.”
“……예?”
당군악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왜 내가 당가를 직접 가르치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글쎄요……. 그건…….”
“물론 여러 이유가 있지. 그리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당가의 무학이 독과 암기가 중점이라는 것일세. 독은 서로 해약을 먹어 버리면 그만이고, 암기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터져 버리지.”
“그렇겠군요.”
발출한 암기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상대의 역량을 조금만 잘못 측정해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지켜보는 쪽을 택했네. 그런데…… 화산검협이 말해 주더군.”
“……뭘 말입니까?”
“자네들, 어떻게든 적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법만 삼 년 내내 배웠다며? 그래서 이제 웬만큼 암수를 써서는 생채기 하나 안 난다던데?”
“…….”
……예? 금시초문인뎁쇼?
“좋은 일이지, 내게도 무척. 안 그래도…… 나 역시 사람을 상대로 암기를 던져 볼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거든.”
당군악이 빙그레 웃으며 소매에서 손을 꺼냈다. 손아귀에 새파랗게 빛나는 네 자루의 비도가 잡혀 나왔다.
“자네들이라면 마음 편히 던질 수 있지. 서로 퍽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자네들을 믿네.”
“믿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자, 그럼 시작하지!”
“아니, 사람 말 좀 들으세요! 가주님!”
“하하하핫! 엄살은 거기까지!”
“좀 들으라고!”
당군악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청명은 이를 두고 당보를 닮았다고 평했지만, 그 미소는 사실 청명과 닮아 있었다.
비도가 가열하게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