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화. 이런 보답이라면 받아 볼 만도 하구나. (4)
철푸덕.
당패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엎어졌다.
“끄으…….”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 만큼 지쳤다. 코를 통해 흙먼지가 마구 밀려 들어왔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릴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쯧.”
이내 청명이 한껏 못마땅하게 혀 차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허약해 빠져서는…….”
그 목소리가 귀와 몸을 찔러 대는 것만 같다.
“뭐? 독과 암기는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고?”
“…….”
“말 같잖은 소리 지껄이고 자빠졌네. 독은 지가 알아서 날아다니고, 암기는 가만있으면 혼자서 춤이라도 춘대? 결국 독이고 암기고 사람이 쓰는 거지. 체력이 없어서 손도 덜덜 떠는 놈들이 무슨 수로 암기를 쓸 건데?”
“끄으…….”
“섬세한 무학이기 때문에 체력을 단련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라, 섬세한 무학일수록 체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완전히 망가질 수 있는 게 당가의 무학이다. 밖에서 보는 나도 그걸 아는데, 그 무학을 쓰는 니들이 왜 그걸 몰라.”
청명이 엎어진 이들을 쭉 둘러보고는 몸을 획 돌렸다.
“내일 해 뜨면 다시 시작한다. 늦게 나오는 놈은 다 뒈질 줄 알아.”
드디어 휘적휘적 걸어 멀어지는 청명의 등을 힐끔 본 당패는 다시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옆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냐?”
“…….”
“어으…….”
당패가 힘겹게 다리를 옮기며 숙소로 돌아왔다.
생각 같아서는 세안이고 자시고, 그냥 흙투성이인 채로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 충동을 간신히 막아 낸 것은 당가의 소가주라는 책임감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사천당가의 소가주쯤 되는 인간이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워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죽는다, 죽어.”
“저두요.”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란 당패가 소리쳤다. 이내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당잔의 모습이 보였다. 당패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쥐고 역정을 냈다.
“뭐 하는 거냐? 남의 처소에 말도 없이!”
“끄응.”
당잔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침상을 짚은 팔이 달달 떨리는 게, 그 역시 어지간히도 힘든 모양이었다.
“다름이 아니옵고.”
서두를 뗀 당잔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동생들과 숙부님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소가주인 형님 앞에선 다들 직접적으로 말을 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만, 요즘 뒤에선 시간만 나면 성토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별…….”
당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성토가?”
“그…… 저희도 이 수련이 필요하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잖습니까?”
당잔의 말에, 당패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 역시 당잔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이해한다. 본디 필요한 수련이라도 갖춰야 할 형식이 있는 법이다. 사천당문의 식솔인 그들이 화산파의 삼대제자의 지시에 따라 바닥을 구르는 건 확실히 모양새가 좋지 않다.
“지나가는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많이 상하시는 모양입니다. 특히나 숙부님들이 말이죠.”
“흠.”
“그래서 말입니다만…….”
당잔이 슬쩍 당패의 눈치를 살핀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꼴이, 당잔 역시 제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숙부들에게 등을 떠밀렸겠지.
“가주님께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가주님께?”
“예.”
당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청명 도장이 시행하는 수련의 대부분은 가주님 역시 하실 수 있는 것이잖습니까. 물론 가주님께서 공무에 바쁘시다는 것은 저희도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불가하다.”
당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패가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 꺼내지 말거라.”
“형님.”
“말하지 말래도.”
“하지만…….”
당패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특정한 사항에 대해 언급을 금하는 건 소가주로서 할 일은 아니다. 지엄한 가주께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대신 듣고, 그 사항을 가주께 전달하는 것 역시 소가주의 일 중 하나니까.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네가 지금 아버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더냐?”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하면, 아버님께서 지금 식솔들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여 지켜보고만 계신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당패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모든 일에는 걸맞은 이가 있다. 아버님께서 이 일에 화산검협이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다면, 식솔들은 그 말에 그저 따르면 될 일이다.”
당잔은 일단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에 반박하면 가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천당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산검협 청명 도장을 만난 이후로는 많이 유해지셨지만, 애초에 독왕 당군악은 당가 내에서 절대적인 위엄의 상징이다. 특히 원로원을 해체하고 당가를 완전히 장악한 뒤로는 누구도 감히 그 권위를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잔의 표정에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게 여실히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당패가 슬쩍 입매를 굳혔다.
“잔아. 이해를 못 하는구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형님.”
“그 같잖은 자존심이 정말 그리도 중요하더냐?”
“……형님?”
당패가 서늘한 눈으로 당잔을 바라본다.
“사람들 앞에서 지적당하고, 흙바닥을 구르는 일이 가문의 체면에 손상을 주더냐? 화산 삼대제자의 지시를 받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낯이 뜨거워지기라도 하더냐?”
“……저는…….”
“배때기에 기름이 꼈구나.”
당잔이 입을 다물었다. 당패가 내보인 차가운 눈빛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존심은 좋은 옷을 입고, 거만하게 거들먹댄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옷이 더러워지고 꼴이 좀 우스워지는 걸로는 수치를 느끼면서, 왜 한때는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던 화산이 우리를 추월해 나아가는 것에는 치욕을 느끼지 않는단 말이냐?”
당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 가문은 화산의 제일 우선 가는 동맹이다.”
“예, 형님. 압니다. 그러니…….”
“하지만 이번 강남행에는 당가가 동행하지 못했다. 화산의 곁을 지킨 건 우리가 아니라 남궁이었고, 녹림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
“…….”
“물론 가주님께서 직접 나서실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가주님께서 정말 저 화산검협을 보좌해 강남으로 향하는 것이 맞았다고 보느냐? 정말로?”
“그,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그럼 내가 묻겠다. 이번 강남행, 마교를 막아 내고 중원을 수호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에 당가가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야…….”
이번에도 당잔은 대답하지 못했다. 답은 알고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당패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단호히 말했다.
“약하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
“아니냐?”
“……맞습니다.”
당잔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당가의 장로들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검협이 원하는 인재는 그저 강하기만 한 이가 아니다. 그의 수족들과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이다.
만약 당패나 당잔이 저 백천만큼 강했다면, 청명이 정말 그들을 두고 강남으로 향했을까? 아닐 것이다.
당패도, 당잔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믿음을 주지 못했기에 강남으로 함께 가지 못했단 것을.
“그 치욕을 당해 놓고…… 지금에 와서 자존심이 상한다? 그게 사천당가의 직계가 감히 주둥이에 올릴 수 있는 말이더냐?”
목소리에 노기가 등등했다. 당잔은 수그러든 고개를 들 엄두도 차마 내지 못했다. 목소리에 어린 분노도 분노지만, 당패의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의 소가주, 남궁도위는 얼마 전에 선친을 잃었음에도 남궁의 이름을 짊어지고 강남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남궁의 이름을 대표하고 있지. 그런데…….”
당패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같은 연배인 내 아우는 사람들 앞에서 흙바닥 구르는 게 창피하고 체면 상한다는 말이나 지껄이고 있구나. 이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더냐?”
“형님…….”
“오늘 남궁은 우리와 똑같은 수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수련을 마치고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너도 보았겠지?”
“……예.”
“그걸 보고도 그 말이 그 입에서 잘도 나왔구나.”
당패의 차가운 목소리는 이제 당잔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당패가 이렇게나 노기를 내비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더냐?”
“…….”
“나도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내가 자존심 상하는 이유는 그깟 체면 때문이 아니다. 천하의 사천당가가! 그리고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타문에 뒤지고 있다는 걸 내 눈으로 명백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당패가 이를 악물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약하다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더냐?”
“혀, 형님. 하지만 저희는 그들과 사용하는 무학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는…….”
“입 다물어라.”
당패의 목소리에 한기가 어렸다.
“화산검협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면피해 왔지. 실력이 부족하면 더 강한 독을 개발하고, 더 치명적인 암기를 만들어 내면 된다. 그래. 그래서 우리 당가가 단 한 번이라도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른 적이 있더냐?”
당잔은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있는 이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이미 끝났구나. 너는 내일부터 수련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 아니, 너뿐만 아니라 수련에 빠질 이들은 다 빠지라고 해라. 내가 책임지겠다.”
“혀, 형님.”
당패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수련을 마지막까지 따라갈 것이다. 바닥을 구르는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입에 진흙을 처넣어도 상관없다. 나는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언젠가 당가의 가주가 된 내가 저 남궁의 소가주나, 화산의 백천보다 나약하다는 말만은 죽는 한이 있어도 듣지 않을 것이다.”
“…….”
“그리 전해라. 다만!”
당패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당잔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당군악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여 고생을 자처한 화산검협에 대해 흉을 보는 이가 있다면, 가주님이 나서실 것도 없이 소가주인 내가 직접 벌할 것이라 전해라. 당이라는 성을 쓰는 이가 은혜도 모르는 짐승처럼 군다면 당연히 짐승처럼 대해 줄 것이다.”
“…….”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가라.”
“…….”
“가래도!”
당잔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패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과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당잔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현실을 알 때가 되었으니까.
“……쉽지 않구나.”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흐음.”
처마 위에 드러누워 있던 청명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쯧.”
그는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술병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동난 지 오래라 탈탈 털어도 술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쩝.”
쓰게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여기 있네.”
“엥?”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옆에 나타난 당군악이 술병을 내밀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뭐 이런 걸 다.”
“앉아도 되겠는가?”
“그럼요.”
당군악이 청명의 옆에 걸터앉았다.
“같이 마시세. 오늘은 나도 조금 마시고 싶으니까.”
“가주님과 같이 마시면 저야 좋죠.”
“그런가?”
당군악은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힘들겠군.”
뜬금없는 소리에 청명이 당군악을 가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