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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03화 (1,104/1,567)

1103화. 이런 보답이라면 받아 볼 만도 하구나. (3)

지평선에 눈부시도록 새하얀 해가 반쯤 걸려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따뜻한 느낌이 드는 새하얀 해가 부들부들 떨…….

“똑바로 안 박아?”

키이이…….

아니, 해가 아니다. 허리를 둥글게 말고 있던 새하얀 족제비가 청명의 목소리에 살짝 내렸던 허리를 재빨리 번쩍 들었다.

물론 족제비가 허리를 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위협을 느꼈을 때나, 기지개를 켤 때, 동물들은 자연스레 상체를 낮추고 허리를 있는 힘껏 위로 들어 올리는 법이니까.

하지만 바닥을 짚은 것이 앙증맞은 앞발이 아니라 작고 귀여운 대가리……. 아니, 머리라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 팔뚝만 한 몸뚱이 위로 제 몸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포대 자루가 턱턱 올려져 있는 것은 이상함을 넘어 기괴한 일이었다.

끼이……이…….

등에 올려진, 주먹만 한 돌이 꽉꽉 들어차 있는 자루의 무게에 바들바들 떨던 백아가 낑낑 소리와 함께 슬쩍 허리를 다시 낮출 때였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귀신같이 들려온 목소리에 백아가 기겁하며 등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순식간에 달려온 청명이 백아를 뻥 걷어찼다.

키이이이이이이!

하늘 높이 날아갔던 백아가 양쪽 앞다리를 휘저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허공에서 팽그르르 몸을 돌려 비장하게 착지한 백아는 이내 섬전 같은 속도로 달려 널브러진 자루를 다급하게 끌어모아 등에 짊어졌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시 머리를 박았다.

“짐승도 먹여 주고 키워 준 은혜는 안다고 어떤 놈이 그랬냐! 어떤 놈이!”

“…….”

“아니!”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래, 은혜는 몰라도 되지. 그런데 밥을 처먹었으면 밥값은 해야지! 먹여 주고 길러 준 값으로 심부름 하나 시켰더니 그새를 못 참고 농땡이를 치고 있어?”

키……!

말대꾸하기 무섭게 청명이 다시 백아를 날려 버렸다.

뻐어어어엉!

팽그르르 하늘로 날아 올라갔던 백아가 재빠르게 조금 전 했던 행동을 반복했다.

타악!

섬전처럼 머리를 박은 백아가 짧은 앞발을 허리 뒤에서 맞잡아 보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괜히 심기 잘못 건드렸다간 중원에서 단 하나뿐인 진귀한 목도리가 되는 게 확정이라는 듯이 말이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백아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백아의 두 눈엔 투명한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물론 고통이나 슬픔에서 나오는 눈물은 아니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순전히 억울함이었다.

백아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양심적으로 네가 언제 내 밥을 챙겨 줬냐?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실 청명이 한 것이라고는 대충 백아를 휘감고 다닌 것밖에 없다. 밥은 백아가 알아서 사냥해 먹고, 부엌에 가서 찾아 먹고, 훔쳐 먹고……. 아니, 이건 빼고. 여하튼.

그런데 먹여 주고 길러 줬다고 저렇게나 생색을 내고 있으니, 백아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말로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설사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저놈에게 말이란 게 통하겠는가?

이럴 때는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너도 화산에 적을 뒀으면! 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사형제들이 훈련받느라 구르고 있는데 혼자 농땡이를 쳐? 허리 똑바로 안 들어?”

키이이…….

백아가 재빠르게 허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윤종과 조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언제 저희가 족제비랑 사형제가 된 겁니까?”

“……나도 금시초문이긴 하다만.”

“그건 그렇고…… 저쯤 되면 동물 학대 아닙니까?”

백천이 그 말이 틀렸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영물 학대지.”

“어쨌든 학대는 학대 아닙니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청명이는 이 세상 누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

조걸이 ‘이건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라는 눈으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백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물이니까 저 정도로 끝났지. 우리가 그랬으면 지금 장강에 처박혀서 물고기와 안부를 묻고 있었을 거다.”

“아, 그러네.”

조걸은 순식간에 납득했다. 백아가 굉장히 특별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훈련 중에 농땡이를 쳤는데 겨우 머리 박고 걷어차이는 수준이라니, 그들이었으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사흘은 물도 밥도 없이 거꾸로 매달렸을 텐데,

“……청명이가 의외로 다정한 면이 있네요.”

“그렇지?”

“그리고 생각해 보면 굉장히 합리적이잖습니까? 농땡이 치면 동물이라도 얄짤 없이 벌 받는다는 거니까.”

“거꾸로 생각하면 저 새끼가 보는 우리가 짐승이랑 별다를 것도 없단 이야기겠지.”

“……청명이답네요.”

그 대화를 듣던 윤종은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서 성큼 떨어졌다.

‘이 인간들도 정상이 아니야. 완전히 미쳤어.’

하지만 청명이 놈에게서 의외의 다정한 모습을 발견한 화산 사람들과 달리, 녹림도와 당가인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뭔 족제비가…….”

“그러게…….”

그들의 동공이 뒤흔들린다.

하지만 놀라면서도 지금 자신들이 무엇에 놀라고 있는 건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놀란 까닭이 족제비가 사람처럼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족제비마저도 갈구고 구박하는 사람 때문인가?

“허허허.”

“우리도 우리지만, 참…….”

“근데 저 둘 중 어느 쪽이 짐승인지부터 생각을 좀 해 봐야…….”

그때 백아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이크!’

‘눈 마주치지 마.’

‘숨 참아, 숨!’

시선이 마주친 녹림과 당가인들이 재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처박았다. 저 인간과 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고단해진다는 건 지난 며칠간 증명되지 않았던가.

“웃어?”

“…….”

“지금 웃음이 나온다 이거지?”

청명의 두 눈이 희번덕댔다.

‘와, 저 눈 봐라, 눈.’

‘차라리 사파 새끼가 사람이었지.’

‘장일소 밑이 더 편하겠다, 빌어먹을.’

화산의 맛. 섬서의 높디높은 화산 꼭대기에서나 느낄 수 있다는 화산 고유의 맛이 중원 각지의 명산과 머나먼 사천 지방에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사람 새끼고, 짐승 새끼고!”

“…….”

“짐승은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도 모르고 농땡이나 치고 있고! 사람 새끼는 칼 차고 다닌다는 놈들이 그동안 수련도 제대로 안 해서 뭐 얼마 구르지도 않았는데 헥헥거리면서 엎어져 있고.”

“…….”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아니, 그래. 죄는 지었지. 죄는 지었는데!”

윤종이 백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새끼 지금 뭐라는 겁니까?”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냥 평소처럼 개소리하는 거잖느냐.”

“아.”

“그러려니 하거라.”

“예.”

한편 청명은 한껏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여기저기 엎어진 녹림도와 당가인들을 보았다.

‘생각보다 심각해.’

이들을 몇 번 굴려 보니 과거 화산이 뭘 놓쳤는지가 확연하게 보였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무위는 결코 낮지 않다. 명문 중의 명문인 사천당가. 그리고 중원 산맥의 지배자인 녹림,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녹채의 정예들이 약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강함이라는 게 결코 하나의 요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다는 점이다.

‘무위’라는 측면에서는 좀 모자라는 수준이라 평해 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들의 체력이다.

“무인이 허약하다니……. 이게 뭔 물고기가 익사하는 소리야.”

내력과 체력은 비슷하지만 완벽한 동의어는 아니다. 아무리 내력이 넘쳐나는 이라고 해도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구르다 보면 체력이 먼저 동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체력을 잃는 순간 정신력이 깎여 나가게 된다. 그런 이들은 싸움을 시작한 순간에는 제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싸움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 결국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응? 그러면 단련이 되는 게 아니냐고?

물론 그렇지. 싸우고 또 싸우고, 제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체력이고 정신력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단련이 되기는 할 것이다.

‘살아남은 놈은 말이지.’

그 전에 태반이 죽어 나가는 게 문제다.

마교도가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광신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신도가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겪어 보지 않았는가?

마교도는 지치지 않는다. 그 육체는 지치고 힘겨워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정신은 평범한 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단단한 철갑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쟁이란 결코 단숨에 끝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 같은 상황이 칠 주야 넘도록 이어지기도 한다.

아니, 설령 전투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제 실력이 뛰어나다고 믿었던 이들도 그 전쟁의 참혹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가기 십상이었다.

“쯧.”

청명이 신경질적으로 뺨을 긁었다.

“소위 명문이라는 새끼들을 내가 그렇게 까 댔는데…… 결국 나도 명문정파 출신이었다는 거로군.”

“응? 무슨 소리야?”

“아냐.”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잘못이 없는 게 아니네.’

머릿속에 과거 청문과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 청명아. 무당의 실력이 부족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 재능이 없는 거죠.

- ……그럼 종남은.

- 인간이 덜된 거죠.

- ……그럼 남궁은.

- 싸가지가 없어요.

- ……어떻게 고쳐 쓸 방법은 없고?

- 에이, 사형. 돌을 깎는다고 금이 됩니까? 깎아 봐야 예쁜 돌이지.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애들을 무슨 수로 바꿉니까. 냅두십쇼.

- …….

아……. 생각하니 진짜 답도 없었네.

청명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아니, 그땐 진짜 그렇게 보였던 걸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똑같은 무학을 배우는데 실력이 안 느는 거면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한지, 그때의 청명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애송이 새끼들을 다그치고, 걷어차고, 멱살 잡고 끌어 올려 사람 구실 하게 만들려 애를 쓰고서야 알게 되었다.

돌도 잘 깎으면 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과거의 청명, 매화검존 청명은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느라 심력을 소모하느니 그냥 직접 가서 다 패 죽여 버리는 게 더 편했으니까.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안 돼.’

청명이 고개를 들고 당가인들을 노려보았다.

“……온실 속의 화초.”

“……예?”

청명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예전에 몇 번이고, 종남이나 무당의 어린 제자들을 두고 온실 속의 화초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마교는 고사하고 살기 어린 사파 놈들만 만나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만 그럴싸한 반편이들이라고.

청명이 틀렸던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어린놈들만 문제가 아니었던 거지.’

온실 속의 화초가 잘 자라면 뭐가 되는가?

뭐가 되긴 뭐가 돼. 잘 자란 온실 속의 화초가 되는 거지. 겉으로는 화려하게 잘 컸으니 건강해 보이지만, 막상 찬 바람 두어 번만 맞으면 시들시들해진다. 결국은 따뜻한 실내가 아니면 써먹을 데 없는 장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놈들이 나이가 들고, 실력이 늘어나면 제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대책 없이 믿은 게 실수였다. 당가와 녹채마저 이 지경인데 다른 놈들은 봐서 뭐 하겠는가?

“이러니 앞에서 아무리 싸워도 후방이 무너졌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린 청명의 입에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여기서 죽어라 싸우고 있으면 저쪽이 무너지고, 저쪽에서 죽어라 싸우고 있으면 다시 앞쪽이 무너지더라니.

돌이켜보면 청문의 급한 명을 접수한 청명이 전 중원에 퍼져 있던 전장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낭비했던 시간이 진짜 싸운 시간에 버금갈 지경이다.

상대가 사파든, 마교든, 구파일방이든 마찬가지다.

그가 제대로 공격하고 싶다면 뒤쪽에 있는 이들이 최소한 버텨 주기라도 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청명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과거의 지옥이 되풀이될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뭐 방법이랄 게 따로 있나?”

청명의 두 눈이 지옥같이 불타올랐다.

“체력이야 구르면 올라오는 거고, 정신력이야 주먹으로, 말로 처맞다 보면 생기는 건데.”

그가 중얼거리자,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받은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청명이 손뼉을 쳤다.

“자, 여러분. 다시 시작합시다.”

“저, 저기, 청명 도장님.”

“네?”

당패가 어색한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벌써 해 지는데요?”

“그래서?”

“아…… 청명 도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도 각 문파의 업무라는 것이 있어서요. 밤에는 서류 정리를 비롯한 업무를 해야 문파가 돌아가는…….”

“그래서?”

“이,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

“그래서?”

말을 잃은 당패가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다른 업무를 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잖아?”

“그, 그렇죠! 이해하셨군요.”

당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청명은 이내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거참 이상한 소리네.”

“……네?”

“시간이 부족하면 잠을 안 자면 되는데.”

“…….”

“전쟁은 원래 잠도 못 자고 열흘씩 이어지고 그런 거지. 마침 잘됐네. 그럼 이번에 미리 경험해 보자고. 오늘 딱 자정까지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한 시진 추가해 보자.”

당패는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주변의 모든 녹림도와 당가인들이 그를 패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일단은 고개를 푹 숙여 그 살기 어린 시선들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 시작하자! 너희들이 세져야 내가 산다! 그러니까 이 악물어라!”

전 중원의 화산화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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