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화. 이런 보답이라면 받아 볼 만도 하구나. (2)
“이제 괜찮을 거예요.”
시침을 마친 당소소가 빙긋 웃으며 침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니까 잘 드셔야 해요.”
“……예.”
침을 모두 정리한 당소소가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볼을 쿡 찔렀다.
“학이도 잘…….”
그 순간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본능적으로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죄, 죄송…….”
“아니에요. 제가 생각이 없었어요.”
당소소가 무안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몸은 침을 놓고 약을 쓰면 낫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리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이 여인이 겪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심스레 접근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당소소가 깊이 고개를 숙이자 여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정말 아니에요.”
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데 제가, 제가 못 배우고 겁이 많아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당소소도 어찌할 줄 모르고 쩔쩔맸다. 의술을 익혔지만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떡하지?’
그냥 물러나자니 여인이 오래 자책할 것 같고, 그렇다고 기분을 풀어 주려 애를 쓰다간 괜히 불편하게 만들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허벅지만 꼬집고 있을 그때였다.
퉁!
투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응?”
벌컥.
뒤를 돌아본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그뿐, 나타난 사람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문 너머로 펼쳐진 장원의 정경뿐이었다.
‘뭐…….’
키이!
“……아.”
당소소의 시선이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너였어?”
새하얀 족제비 한 마리가 꼬리를 휘두르며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탕! 탕!
왜 빨리 알아보질 못했냐고 꾸짖는 듯 꼬리로 바닥을 두어 번 내리친 백아가 옆에 놓인 제 몸만 한 그릇을 양 앞발로 잡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릇에 담긴 건 그녀가 청명에게 가져와 달라고 했던 탕약이었다. 당소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 인간은…….”
세상에, 그 간단한 걸 하기 귀찮아서 사람도 아닌 짐승에게 시켰단 말인가? 게다가 시킨다고 그걸 버젓이 하는 짐승은 또 뭔가?
이쯤 되면 사람이 문제인지, 짐승이 문제인지 구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터덜터덜 두 발로 걸어온 백아는 당소소의 앞에다가 탕약 그릇을 턱하고 내려놓는다. 그리고 사람처럼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았다.”
짐승에게 할 말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저 모습을 보니 이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백아는 당소소를 흘끗 보고는 순간 뒤를 획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빠르게 달려가 열린 문을 다급히 닫더니 방 한쪽 구석으로 가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백아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당소소를 빤히 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거 같이 고생하는 처지에 치사하게 꼰지르진 맙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고단하겠지.”
어쩌면 여기서 제일 고생 많고 고단할 수도 있겠지. 저 녀석은 그 청명 사형과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짐승이니까. 빨리 돌아가 봐야 괜히 시달리기만 하겠지.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
도대체 저 짐승은 왜 그렇게 청명 사형에게 붙어 다니는 걸까?
남만야수궁에서는 영물 중의 영물로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취급이 평범한 족제비만도 못하잖은가?
심심하면 걷어차이고, 영물 체면에 날 좀 쌀쌀해졌다 하면 목도리로 활용되고, 잠잘 때는 목 베개로 쓰이고, 술 떨어지면 포악해지니까 눈치 좋게 술병 빌 즈음에 미리 술도 가져다 놔야 하고, 온갖 심부름은 다 도맡아 하…….
‘사형은 좋겠다…….’
어디 새끼 한 마리 없나?
“조, 족제비가…….”
그 순간 여인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휘둥그레진 눈이 백아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
하기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족제비가 탕약 그릇을 가져오고, 문을 여닫고,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게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착한……. 아니, 그냥 영물이에요.”
“여, 영물요?”
“네. 음……. 그냥 좀 많이 똑똑한 짐승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여인이 신기한 듯 백아를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백아도 슬쩍 고개를 돌려 여인을 마주 보았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 미묘한 시선 교환이 있었다. 뭔가를 생각했는지 백아가 턱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쫄래쫄래 여인에게 다가가더니, 폴짝 뛰어올라 여인의 목을 제 몸으로 감쌌다.
“아……!”
놀란 여인이 반사적으로 제 목에 감긴 백아를 움켜잡았지만, 그 부드러운 촉감에 이내 손에 실었던 힘을 풀고 말았다.
“따뜻해…….”
“와.”
당소소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워낙 호구처럼 맞고 다녀서 만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백아는 영물인 데다가 자존심이 유별하게 센 동물이다. 저 새하얗고 보드라운 털이 탐나서 길들여 보려다가 얼굴에 발톱 자국을 얻은 화산 제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청명 외에는 절대 곁을 내주지 않는 놈이 스스로 사람에게 다가가다니.
“신기하네.”
그 와중에도 백아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슬금슬금 여인의 목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아이와 여인의 사이에 끼어들어 편한 자세를 잡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위험하지는…….”
“괜찮을 거예요.”
당소소가 ‘사형한테 뒈지고 싶진 않을 테니까.’라는 말을 작게 중얼대며 덧붙였지만 여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안심한 여인은 백아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겉으로 봐서는 결코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짐승이라는 점이 그녀에게 위안을 주는 모양이었다.
여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본 당소소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쓸모가 있을 데가 있네.’
아니, 사실 쓸모야 많았지. 청명 사형한테만.
여인이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족제비가 사람을 따르는 건 처음 봤어요.”
“아, 그래요?”
사실 저도 처음 봤답니다. 물론 ‘사람’을 따르는 건지는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요.
“……동물은 좋은 사람만 따른다던데.”
여인의 말에, 당소소의 표정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다.
“그, 그럼요.”
하지만 결국 이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죄송해요. 그 말 거짓말인 것 같아요.’
그럼 저 백아가 청명의 옆에 붙어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런 일에 진실이 어떻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편하면 됐지.
그래도 백아의 등장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에이, 아니에요. 뭐 별일이라고.”
“그냥 걱정이 많기도 했고……. 정말…… 괜찮을까요?”
“네?”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이제부터는 제가 얘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겁이 많아서 괜찮을까요?”
당소소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 없이 던지는 괜찮을 거란 위로는, 결국 상황을 적당히 면피하고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저…….”
당소소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연 그때였다.
“소소 안에 있느냐?”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소소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예, 장문인! 제자 안에 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당소소가 슬쩍 여인의 안색을 살폈다. 여인은 살짝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는 곧장 달려가 정중히 문을 열었다.
이내 현종이 느릿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사람 좋은 푸근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녀석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느냐?”
“……글쎄요.”
백아는 이제 만사 귀찮단 표정으로 한껏 늘어져 있었다. 그 모양새가 딱…….
“동물은 주인을 닮는다더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고개를 내저은 현종이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당소소의 눈에는 그 동작 하나하나에 얼마나 세심한 배려가 어려 있는지 잘 보였다. 손짓 하나, 걸음 하나도 상대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뺀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숟가락 들 힘도 없는 노인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아…….”
당황한 여인을 보며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는 화산파의 현종이라고 합니다.”
“화산의 장문…….”
당소소가 재빨리 무언가 첨언하려는 순간 현종이 살짝 손을 들어 막았다. 괜히 상대가 부담을 느낄 만한 말은 하지 말란 뜻이었다.
“많은 일을 겪은 후라,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겠지요. 그래서 굳이 찾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쯤은 와 보지 않으면 거꾸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이 당황하여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너무 잘 대해 주셔서……. 제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너무 따뜻하게 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꾸뻑꾸뻑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던 현종이 문득 품에 안긴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이가 참 귀엽게 생겼군요.”
“네…….”
현종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와 함께 갈 데가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여인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한참 머뭇대던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라도…… 가야지요. 어디라도…….”
“…….”
“제가 너무 폐를 끼쳤죠. 죄송합니다……. 염치가 없어서.”
당소소는 순간 당황하여 현종을 바라보았다. 마치 현종이 여인을 다그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소소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감히 장문인에게 이 자리에서 지적할 순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현종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말을 뱉을 사람이 아니란 믿음 때문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자식을 건사하며 외지에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종의 말에 여인이 슬픈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더없이 따뜻한 곳이지만, 또한 더없이 매정하기도 하지요. 당장 갈 곳을 정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예…….”
현종이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양민을 구휼하는 것이 정파의 의무이기는 하나, 저희 역시 한정 없이 돌봐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표정과 몸짓은 담담했으나, 입술은 막막한 마음을 차마 숨기지 못하여 파르르 떨렸다.
그녀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폐를 끼쳤는지 말이다. 애초에 의원의 진료는 돈 있는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호사가 아니던가?
하는 일도 없이 따뜻한 방을 차지하고 누워 식사를 대접받고 치료를 받는 건, 감히 그녀가 꿈도 꿔 볼 수 없던 삶이었다. 그저 이제는 그만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 은혜는…… 꼭,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자, 장문…….”
결국 당소소가 무어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현종은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여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식이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제 발로 서야 합니다.”
“……예, 도사님.”
여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일 그때였다. 현종이 물었다.
“혹시 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여인은 무거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이곳을 떠나 아는 이에게 의탁하란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강남에서 이곳까지 온 그녀에게 지인이 있을 리 있겠는가.
실로 무심한 질문이었으나, 눈앞의 사람들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미 저들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걸 베풀어 주었다.
때문에 여인은 담담히 말했다.
“네.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럼 혹시 그 지인분이 음식은 좀 할 줄 아십니까?”
“예?”
여인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현종을 보았다.
그러자 현종이 짐짓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장원에 오래 기거하게 된 데다가, 저놈들이 워낙에 먹어 대니 숙수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 음식은 도무지 사람 먹을 것이 못 되지요. 하여 숙수를 구하는 중입니다. 그냥 재료를 망치지 않고 사람 먹을 정도로만 요리할 줄 알면 됩니다. 이곳이 인가와도 거리가 있으니 숙수에게 방을 내어 주고, 삯도 섭섭지 않게 줄 생각인데…… 혹여 아시는 분이…….”
“제, 제가……!”
“예?”
여인이 다급한 얼굴로 현종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할게요, 제가! 저 요리 잘해요!”
“…….”
“정말 열심히 일할 수 있어요. 저를 시켜 주세요!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흐음.”
“부탁드립니다, 도사님! 제발…….”
현종이 곤란하단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일을 하시기엔 건강이 너무 나빠 보이시는데……. 탕약도 잘 드시지 않는 것 같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이 황급히 바닥에 놓인 약사발을 잡아채어 쭉 들이켰다. 단번에 탕약을 마셔 버린 그녀는 사발을 내려놓기 무섭게 현종을 보며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 이제 건강합니다!”
현종이 곤란하다는 투로 침음성을 흘리며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분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장문인!”
“…….”
“이틀이면 됩니다. 이틀이면 충분히 일할 수 있게 고쳐 드릴 수 있어요. 문제없을 거예요!”
“그러하더냐?”
당소소의 씩씩한 대답에, 현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수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니 별수 없구나. 그럼 이제부터 이분은 이곳에 얹혀사는 식객이 아니라, 정당하게 화산에서 삯을 받고 일하시는 분이다. 대함에 모자람이 없도록 하거라.”
“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장문인.”
“그럼.”
현종이 가만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온갖 감정이 뒤엉킨 얼굴로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
그때 몸을 반쯤 일으켰던 현종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부터 저희가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여인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은…… 추영(秋榮)입니다.”
“추 부인이셨군요.”
“그리고…… 이 아이는…….”
추영은 가만히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학이. 이학(李學)이에요.”
현종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추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