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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01화 (1,102/1,567)

1101화. 이런 보답이라면 받아 볼 만도 하구나. (1)

“끄응.”

현영이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본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해가 떴나?’

오늘은 조금 늦잠을 자 버렸다.

평소에는 늦잠을 자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지만, 제자들이 강남으로 간 동안 며칠 밤낮을 한숨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웠더니 누적된 피곤이 한 번에 밀려온 듯했다.

“아이고, 뼈마디야.”

어깨를 퉁퉁 두드렸다. 무학을 익히고 몸을 정갈하게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나이는 역시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이불을 완전히 걷어 낸 그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습관과도 같은 운기조식을 끝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갈아입었다.

“흐음.”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

화산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경계해야 한다.

언제나 복(福)은 화(禍)와 함께 오는 법. 조금 성공했다고 교만해지거나 성공에 취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다.

‘조심해야지.’

이런 건 어린 제자들은 쉽사리 놓치는 부분들이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그가 먼저 경계하고 다독여야 한다.

현영이 살짝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오늘은 꼬투리를 조금 잡아 볼까?”

제자들을 위해 오늘 하루는 귀신이 되기로 작정한 현영이 단호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불과 한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깔끔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게 다 뭔…….”

장원 입구에 선 현영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짐 덩어리들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장원 안은 물론이고, 장원으로 들어오는 입구, 그 밖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엉망진창으로 겹겹이 쌓아 올려져 있었다.

“……마교 놈들이 여기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더냐? 피난이라도 가?”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백상이 이마에 흐른 진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마교를 물리쳐 줘서 감사하다고…….”

“이, 이걸?”

“예.”

“이걸 다?”

현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떨렸다.

쌓인 짐을 따라 고개를 올리던 그는 급기야 그 끝을 보기도 전에 목 뒤를 움켜잡았다.

“아이고. 뒷목이……!”

“괜찮으십니까?”

“……이게 다냐?”

“안에는 더 쌓을 데가 없어서 지금 제자들이 장원 밖에서 물건들을 받아 쌓고 있습니다.”

“뭐야?”

현영의 두 눈에 불꽃이 확 일었다.

“이놈이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그걸 좋다고 넙죽넙죽 받았다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 놈들이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양민들이 가져오는 걸 생각도 없이 처받아?”

백상이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장로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괜찮다고 거절했지요. 그런데 막무가내로 주는 걸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막무가내?”

“별것 아니라고, 왜 이것도 안 받냐고. 자기 목숨값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하는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막아도 휙 던져 놓고 달아나 버리시는데…….”

“……허, 허허.”

현영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어 버렸다.

각지에서 보낸 것들이 화산에 쌓인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현영 역시 이미 여러 번 보았던 일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경우가 다르다.

지금껏 화산에 왔던 선물들은 섬서의 유력자들이 화산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보낸 것들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보낸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뇌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쌓인 것들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화산은 곧 이 장강 유역을 떠나 먼 섬서로 갈 것이다. 이 지방 사람들이 그런 그들에게 환심을 사 무엇 하겠는가?

그 말인즉, 이 모든 것들은 정말 이곳 양민들이 순수한 감사의 표시로 준 물품들이란 의미였다.

“허허허…….”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웃음을 흘린 현영이 홀린 듯이 쌓인 짐 더미로 다가가 아래쪽에 있는 짐을 하나 풀어 보았다.

얼기설기 묶은 봇짐 안에는 딱히 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곡식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현영은 가만히 그걸 바라보다 손끝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이 귀한 것을…….”

유력자들이 보내는 진귀한 선물은 그 값이야 비쌀지 몰라도, 현영에게 ‘귀한 것’이 될 순 없었다. 돈이 남아도는 이들이 적당히 생색을 내겠답시고 보내는 게 어찌 큰 의미를 지니겠는가.

하지만 이 곡식은 아니다.

장강 유역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제야 겨우 수로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조차 쉽지 않은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신들이 겨울 동안 먹어야 할 곡식을 덜어 굳이 가져온 것이다.

이 곡식이 어찌 그런 보화보다 못하다 할 수 있겠는가?

“자잘한 것들이 많은데, 대부분은 먹을 것들입니다.”

“…….”

“그런데 너무 양이 많아서 보관이 쉽지 않습니다. 적당한 상인을 수배해서 팔아야…….”

“뭐, 이놈아?”

현영이 쌍심지를 켜며 획 고개를 돌렸다. 백상을 노려보는 눈에 노기가 등등했다.

“뭘 팔아?”

“고, 곡식을…….”

“이놈이 미쳤나?”

현영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게 어떤 건데! 이게 어떤 물건인데 판단 말이더냐! 이게 돈이랑 바꿀 수 있는 것들이더냐? 여기에 남아도는 놈들이 소가 형님 할 정도로 밥을 처먹어 대는 식충이들인데, 그놈들 다 먹이면 되지! 이걸 왜 판단 말이냐!”

“자, 장로님. 곡식이야 두고 먹을 수 있겠지만, 당장 들어온 고기나 채소 같은 것은 곧 상하지 않겠습니…….”

“다 먹어!”

현영이 입에서 불을 뿜자 현상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치워라!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다 뒈질 줄 알아!”

백상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장정의 대여섯 배를 먹어 치워 현영의 위장을 아프게 하는 주범들이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거대한 곳간 열 개는 채우고도 남을 것들을 무슨 수로 며칠 내에 다 먹는단 말인가?

“아, 아니…….”

“시끄럽다! 오늘 점심부터 당장 먹여! 모조리 다 퍼먹여라!”

“…….”

“알겠느냐?”

“예, 예…….”

“쯧.”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찬 현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쌓인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어린 제자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에게 협의는 선택의 문제지만, 누군가에게는 차마 눈부셔서 바라볼 수도 없는 간절함이었단 것을.

과거 화산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을 때, 현영은 협객행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어떤 이들에겐 능력을 갖추고도 귀찮으면 안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겠으나, 현영을 비롯한 현자 배에게 있어서 협객행이란 그저 눈부신 무언가였다.

그 험난한 삶 속에서 그들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언젠가는 그들 역시 강호의 당당한 무인으로서 고통받는 양민들을 위해 싸우고, 화산의 이름을 널리 알릴 날이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이었다.

동경 속에 비치는 제 머리가 점점 하얗게 바래 갈 때마다, 젊음이란 게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갈 때마다, 조금씩 내려놓았던 그런 희망 말이다.

현영은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곡식을 조심스레 내려 두었다.

“……틀리지 않았구나.”

“예?”

“아니다.”

현영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얼굴을 제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 시간을 들여 표정을 관리하고서야 현영은 다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래서, 밖에는 여전히 찾아온 분들이 계신 것이냐?”

“예. 제자들이 지금 짐을 받고 있습니다.”

“가 보자.”

“예!”

백상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를 따라나서니 잠시 후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 줄을 선 이들이 보였다.

기다림 끝에 제자들 앞에 도착한 커다란 장정이 콧김을 뿜으며 손에 든 것들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도사님들이 고기를 드시는지 모르겠지만, 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이거라도 싸 왔소.”

“감사합니다. 저희는 고기도 먹습니다.”

“다행이구려.”

퉁명스레 말한 장정은 보따리를 제자들 품에 거의 내던지듯 떠안겼다.

“……많아 보이는데.”

“제까짓 게 많아 봤자지!”

“가, 감사합니다.”

그 퉁명스런 태도에 제자들이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짐을 받아 들었다.

“어디 사시는…….”

“됐소. 그건 알아 뭐 하게.”

“……아, 예.”

사내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획 돌리려다 말고 슬쩍 화산의 제자를 바라본다.

“고맙수다.”

짐을 받아 든 청상이 의문 어린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노모가 계시오. 혹여 피난이라도 가야 했다면, 모진 바깥바람을 버티지 못하셨을 테니 그냥 여기서 꼼짝없이 죽어야 할 판이었지.”

“…….”

“덕분에 살았소. 감사하외다.”

잠깐 멍하니 그를 보던 청상은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크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획 돌려 휘적휘적 걸어갔다.

현영은 그 사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도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기인지 보따리 아래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백상아.”

“예, 장로님.”

“가서 제자들을 더 불러오거라. 날씨가 찬데 줄이 너무 길구나. 거절을 못 할 거라면 서 있는 시간이라도 줄여 드려야지.”

“예? 지금 청명이 놈이 애들을 때려잡……. 아니, 수련 시키는 중이라서 더는 안 보내 줄 텐데요?”

“내가 불렀다고 하고 빼 오거라. 아니, 청명이 놈을 비롯해서 수련하고 있는 놈들 모조리 다 끌고 와서 짐부터 받으라고 해라.”

“그 수련은…….”

“어서.”

“예! 장로님.”

백상이 안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무리 청명이 놈이라고 해도 장문인과 현영 장로님의 지시에 토를 다는 경우는 없으니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현영은 줄을 선 이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더벅머리 장정도, 나이 들어 허리가 굽어진 노파도, 거칠어진 손으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아낙도 하나같이 무언가를 손에 든 채, 선망 어린 시선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뗐던 현영은 이내 다시 입을 닫았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보기 좋지 않더냐?”

슬쩍 뒤쪽을 바라본 현영이 퉁명스레 말했다.

“언제 오셨수?”

“조금 전에.”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장문인이란 양반이 한가하기도 합니다. 뭐 볼 것 있다고 여기까지 나와 보십니까?”

“아무리 바빠도 봐야 할 게 있는 법이지.”

“그럼 손이나 보태시든지?”

현영의 말에 현종이 조용히 웃었다.

“저들을 맞이해야 할 이들은 우리가 아니지. 그렇잖으냐?”

그 말에는 현영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의란 보답을 바라고 이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답을 바라는 순간 그건 협행이 아니라 거래가 되어 버리는 법이지.”

“…….”

“하지만…….”

현종이 말했다.

“이런 보답이라면……. 그래, 받아 볼 만도 하구나.”

현영은 입술만 삐쭉거렸다. 입을 열면 애먼 소리가 나와 버릴 것 같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제자들이 보였다.

“일이다!”

“젠장! 일을 할 수 있어!”

“제가 하겠습니다! 제발 저 좀 시켜 주십시오!”

수련보다는 일이 낫다는 듯 신이 나서 뛰어오는 제자들과 뒤쪽에서 입을 댓 발은 내민 채 터덜터덜 걸어오는 청명을 본 현영은 피식 웃어 버렸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 게으른 것들아!”

카랑카랑한 현영의 목소리엔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활력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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