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화.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5)
열을 가한다 해서 물이 단번에 끓진 않는다. 하지만 지속적인 열이 가해진다면, 물은 언젠가 반드시 끓어 넘친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랬다.
강남에 마교가 출현했다는 소식에도 강북의 사람들은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에게 있어 강남은 너무도 먼 곳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밭을 갈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이들에게 평생 가 볼 일도 없는 강남에서 벌어진 환란이 피부에 와닿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실감하기 어려운 일을 실감하게 한 것은 강을 타고 넘어온 한 가지 소식이었다.
- 항주를 침공한 마교가 항주인들을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살시켰다.
-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던 항주가 고작 며칠 만에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귀를 의심하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항주가 어떤 곳이던가? 천하에서 가장 큰 도시는 아닐지라도, 천하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곳이다.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모두 알 만큼 말이다.
그런 곳이 하루아침에 멸망해 버렸다는데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일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 북방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때, 도시 하나가 완전히 멸망하고 피난민들이 줄을 지어 달아나는 일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저 먼 북방이 아니라 웬만해서는 침공받을 일이 없었던 아랫지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충격의 강도가 같을 순 없었다.
“이, 이게 정말 사실일까?”
“계속 같은 말이 들려오지 않는가! 사실이겠지!”
“아니……. 아무리 마교 놈들이 신출귀몰하다고는 해도, 갑자기 강남 땅에 떡하니 나타나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항주가 얼마나 큰 도시인데 거기가 망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래도 못 믿겠네.”
“이 사람아! 지금 강남으로 가던 상행이 모조리 멈췄다지 않는가?”
“사, 상행이?”
우스갯소리 보태 전쟁이 나도 상행은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전쟁터도 가로지를 이들이 상인이라는 소리다.
저 장강이 수로채에 완전히 장악되어 도강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상행을 이어 갔던 게 바로 중원의 상인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이 강남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 너머에 정말 큰일이 벌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백 년 전이랑 똑같이 되겠지.”
“서, 설마……!”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다들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잊고 있었던 백 년 전의 이야기. 윗대에서 아래로, 말에서 말로 전해진 과거의 마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확히는, 그 마교라는 이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이들이었는지를 말이다.
그 끔찍한 전쟁 중엔 피가 강을 이루고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던 그 전쟁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단 가정은 강남 일에 관심이 없던 이들마저 몸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뭘 어떻게?”
“아니, 예전에는 소림과 구파일방이 나서서 마교를 막아 주지 않았던가? 그럼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 줘야지!”
“소림? 그 소림은 지금 장강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다는구만.”
“아니, 어째서?”
“강남을 사패련이 장악하지 않았는가? 그런 곳에서 불이 났는데 소림이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들 리 없지.”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마교가 어디 정과 사를 가릴 일인가? 예전 전쟁 때도 정과 사 할 것 없이 필사적으로 마교를 막아 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전쟁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활약한 곳이 소림이었다면서!”
“그때는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 소림은 그럴 깜냥이 안 되는 모양일세. 아니면 죽어도 사파 놈들과는 손을 잡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이, 이런 멍청한…….”
사람들은 사파를 경원시한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미 사파가 그들에게 무척 익숙하기 때문이다.
운 없이 얽힌다면 큰 피해를 보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평생을 가도 딱히 사파와 엮일 일이 없으니까.
그들에게는 사패련이고 어쩌고 하는 거대한 사파보다 차라리 뒷골목에 횡행하는 조무래기 흑도가 몇 배는 더 위협적이었다. 그러니 소림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강남을 외면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럼 소림은 언제 움직이겠다는 건가?”
“모르지. 마교 놈들이 강북으로 향하면 그때는 싸우겠지.”
“그럼 강남은? 강남에는 사람이 없는가? 사패련 놈들이 장악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구할 가치도 없단 말인가? 그들은 그냥 사패련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둔다고?”
“어디 저 고매하신 양반들이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수로채가 날뛰어 장강 인근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도 산 위에서 불법이나 닦던 양반들인데. 그때 사람들을 구한 게 사천당가였지, 소림이었는가?”
“저…… 저 때려죽일 놈들 같으니! 입만 열면 협의가 어쩌고, 중원의 평화가 어쩌고 반질반질한 소리만 해 대더니! 막상 일이 터지면 항상 뒤로 물러나서 구경만 하는군. 그런 입장 다 따질 것이면 저 사갈 같은 놈들이 대체 사파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한번 끓기 시작한 물은 쉽사리 식을 줄 몰랐다.
마교에 대한 공포, 그들이 언제 강북으로 몰려올지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지금껏 소림을 위시로 한 구파일방이 보여 주었던 행태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중원의 정파라 불리는 이들은 특혜를 받는다.
그들은 대낮에 칼을 차고 돌아다녀도 제지를 받지 않고, 싸움을 벌여도 관군의 제지를 받지 않는다. 되레 수많은 이들이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장을 일부러 더 많이 이용해 주고, 나아가 그들에게 직접적인 후원을 할 정도다.
그 모든 것들이 용인되는 이유는 양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이 나서서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관은 엄정한 곳이고, 대개 양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되레 제대로 세금을 내지 못하면 사람들을 겁박하고 치도곤을 내는 곳이다.
그에 반해 정파는 거둬 가는 것 없이 그들을 돕기만 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양민들은 소위 정파라 불리는 이들에게 관 이상의 믿음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간 꾹꾹 참아 오던 양민들이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항주에 사는 이들의 수가 얼마던가? 그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데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난이라도 가야 하나…….”
“야, 이 사람아. 피난은 어디 쉬운 일인가? 여길 떠나면 어떻게 먹고살려고?”
“죽는 것보다는 낫지.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는가?”
“그게 죽는 거랑 뭐가 다르나? 처자식에게 동냥질이라도 시킬 셈이야?”
“그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끓이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민심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 강남 땅에서부터 하나의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발호했던 마교가 섬멸됐다.
- 화산을 위시로 한 천우맹의 정예들이 강남으로 급파되어 마교 수괴의 목을 베었다.
- 천우맹이 일시적으로 사패련과 손을 잡고 마교를 무찔렀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그 소식들을 접한 양민들은 일단 환호했다.
“화산! 이번에도 화산이구만!”
“내 화산이라면 나서 줄 줄 알았지! 문제만 있으면 해결해 주는 곳이 바로 화산 아니던가!”
“예끼! 이 사람아, 어찌 화산만 이야기하는가? 천우맹이 함께 움직였다지 않는가?”
“그게 그 말 아닌가! 화산이 천우맹의 수장인데. 천우맹이 화산이고, 화산이 천우맹이지!”
“하기야 그렇지, 그렇지!”
불안에 떨던 이들에게 이 소식은 한 모금의 감로수와도 같았다.
“마교 수괴의 목을 잘랐다고? 그럼 이제 마교가 완전히 박멸된 건가?”
“그건 모르지. 이번에 나타난 마교가 본대인지 아닌지는 봐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도 어쨌거나 이번에 나타난 놈들은 모두 처리됐다는 의미 아닌가?”
“그런 모양이네. 역시 믿을 건 화산밖에 없다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중 대부분은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화산이라는 문파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들도 화산을 칭송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평가란 결국 실적과 행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
당시에는 높이 평가받지 못하던 일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결국은 힘이 되는 법이다.
장강에 수적이 발호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 녹림이 혼란에 빠졌을 때부터 가장 먼저 달려와 양민들을 구해 내던 화산의 행적은 모두의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저 멍청한 소림 땡중 놈들이 구경만 하고 있을 때, 화산은 위험을 무릅쓰고 강남으로 달려갔다는 거구먼.”
“그게 이제 뭐 놀랄 일이나 되나. 화산은 원래 그런 문파가 아니었는가?”
“고생은 화산이 다 하는데, 저 사기꾼 같은 놈들이 또 목에 힘을 주겠구먼! 저 사파만도 못한 것들.”
“구파일방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은 완전히 썩어 빠졌네. 퉤엣! 내가 일전에 탁발하던 놈들에게 줬던 쌀이 아까워, 아주!”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 이상으로 격했다.
그동안 화산이 행하는 일들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과 힘이 소림에 비해 낫다고 여길 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이 강남으로 가서 마교를 무찔렀다는 것은, 이제 화산의 힘이 저 소림에 비해 모자라지 않다는 증거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설사 부족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 해도 검집에서 뽑히지 않으면 몽둥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뽑혀 나오지 않는 명검을 기다리느니, 눈앞에 있는 단도에 눈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조금 찝찝하군.”
“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무리 그래도 사파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은 좀…….”
“이 멍청한 작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래서 사패련이 항주 사람들을 학살하기라도 했는가?”
“그건 아니네만…….”
“사파와 손을 잡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마냥 지켜보면 그건 주객전도지! 소위 명문 정파라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사파를 쓰러뜨리는 건가, 아니면 양민들을 지키는 것인가? 뭐가 우선인가? 엉?”
“……그야.”
“쯧쯧쯧. 화산이라고 해서 자네처럼 말할 이들이 있을 걸 몰랐겠는가? 솔직히 저 소림 놈들이 그런 것처럼 뒷짐만 지고 있었어도 됐을 일이네. 그런데도 오욕과 위험을 감수하고 강남으로 가 사람들을 구해 냈는데, 칭찬은 못 할망정! 내가 자네를 한참 잘못 봤군!”
“내,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아이고, 화 좀 그만 내게.”
“다시는 그런 소리 입 밖으로도 내지 말라고! 괜히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가 다음에 같은 일이 있을 때, 저 화산마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같은 이들만 죽어 나가는 거야! 알겠는가?”
“아, 알았다니까.”
물은 한 번에 끓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화산에 대한 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년간 화산과 천우맹이 해 온 일들은 조금씩 세상을 달궈 왔다. 그리고 마교라는 비등점을 넘어 버린 순간 마침내 폭발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청명과 법정마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