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99화 (1,100/1,567)

1099화.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4)

“방장…….”

법계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소승이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칼날 같은 법정의 눈빛이 법계를 관통했다.

순간 입을 닫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법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렵다 해서 고언을 미루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모든 것이 어그러질 테니까.

“방장께서…… 정말 그 상황을 우려하셨다면, 화산의 장문이 찾아왔을 때, 진지하게 논의하심이 옳지 않았습니까? 일이 다 끝나 버린 뒤에 그들을 탓하시는 것은…….”

“논의?”

법정의 입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목소리가 법계의 말을 끊었다.

“누구와 논의하란 말인가?”

“화산의 현종과…….”

“그 허수아비와 말이더냐?”

법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떤 일이 있다 해도, 다른 문파의 장문인을 허수아비라 칭해서는 안 된다. 작은 중소 문파에게도 더없는 굴욕이 될 만한 말인데, 화산만 한 문파에게야 오죽하겠는가?

법정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를 이가 아니다. 소림의 방장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걸맞도록 그동안 언행을 극도로 조심해 온 이가 바로 법정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화산 관련된 일에는 법정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아니…….’

법계의 두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그가 아는 법정이라는 사람이 정말 단순한 적의 때문에 누군가에게 저런 표현을 쓸 이던가? ……정말로?

‘내가 무슨 생각을!’

법계는 재빨리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혹을 지워 냈다. 그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려면 소림의 방장인 법정이 화산의 장문인에 불과한 현종에게 경쟁심을 느끼겠는가?

그 순간 법정이 일갈했다.

“현종 그와 논의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화산에서 진짜 중차대한 일을 결정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그건…….”

“현종은 모를 수 있다. 그 사람만 좋은 이라면 화산이 강남으로 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 간악한 패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를 짐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

법정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저 화산검협이! 그자가 정말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지 못해서 강남으로 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법계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법정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지. 뱃속에 구렁이를 열 마리는 품고 있는 것 같은 그 작자가 이 구도를 몰랐겠느냐? 뻔히 알면서도 간 것이다! 알면서도!”

이 말에는 법계 역시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본 화산검협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이 모든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협의와 양민을 논하는 이들이 그 짧은 공명심을 참지 못해 강남의 양민들 전체를 끝내 지옥으로 몰아넣었구나! 이번에야말로 저 사패련을 무너뜨리고 강남을 해방시킬 기회였거늘!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런 식으로!”

법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불법을 추구하던 고아한 노승의 모습은 이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특하다! 사특해! 내게는 저들의 속셈이 뻔히 보인다! 조금만 오욕을 감수하면, 조금만 비난을 참아 내고 기다리면 천하에 안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망쳐 버린단 말인가! 그게 화산의 방식인가!”

서릿발 같은 노기였다.

“게다가!”

가사 자락을 움켜잡은 법정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필이면 저 사파 놈들과 결탁해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말인가!”

“…….”

“화산이 장일소와 손을 잡지 않고, 단독으로 이 모든 일을 치렀다면 우매하다 화를 낼지언정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을 표방하는 이들이 사파의 주구와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대체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직 저 흑룡채에서 죽어 간 이들과, 매화도에서 죽은 남궁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사패련과 손을 잡아?”

법정은 흡사 불을 토하듯 말했다. 그 지독한 진노에 법계의 몸이 절로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건 노기에 찬 호성이 아니라 허탈한 웃음이었다.

“허……. 허허허…….”

법정이 돌연 헛헛하게 웃어 버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되구나……. 그저 고돼.”

“……방장.”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이제 화산을 칭송하겠지. 그리고 저 장일소도 칭송할 것이다. 그 끔찍한 마교에 맞서 중원을 지켜 내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 있었느냐고.”

법계가 입을 다물었다.

드러난 정황만을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항주의 변란에서 소림이 한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 아니던가?

아니, 냉정하게 말해 최근 강호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에서 소림이 대체 무슨 역할을 한 것인지 법계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언제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상황이 무르익기만을 기다리다가 저 사패련이나 화산에 선수를 빼앗기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법계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방장. 제 생각이지만…… 마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거움을 감안했을 때, 이리 기다려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법정이 가만히 법계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무거운 침묵으로 법계를 압박하던 법정의 입에서 한탄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마저도 그리 생각하는 것이더냐?”

“그게 아니옵고…….”

법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그렇기에 더욱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예? 그게…….”

“모르겠느냐?”

법정이 법계를 뚫어지라 노려보며 말했다.

“화산이 정녕 마교를 우려했다면, 그들에게 경각심을 가졌다면 섣불리 강남으로 달려갈 것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와 손을 잡으려 했어야 한다. 아니, 더 대놓고 말하자면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어야 해!”

“바, 방장……. 천우맹은 더 이상 작은 연합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법정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말한 그 천우맹에 든 이들이 대체 누구더냐?”

“그건…….”

“정파에서도 사도라 배척받던 사천당가. 전력을 잃고 오갈 데가 없어진 남궁세가! 그리고 중원인으로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새외의 문파와, 구파일방에서 쫓겨난 화산!”

“…….”

“그중 정말 강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파가 존재하더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들 허울만 보고 있다! 다들!”

쿵!

법정이 답답하다는 듯이 바닥을 내리쳤다.

“화산이 종남을 이겼다 해서 종남이 화산에 고개를 숙였더냐?”

“…….”

“화산이 무당을 이겼다 해서 무당이 화산에 그 자리를 내어 주었더냐?”

“아닙니다, 방장.”

“그게 화산이라는 문파가 가진 한계고, 천우맹이라는 연합이 가진 한계다. 그들이 아무리 활약하고 입지를 넓힌다 한들, 저 자존심 높은 구파일방의 명문들이 화산의 휘하로 들어가려 하겠느냐?”

법계는 차마 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 입장 바꿔 소림이 화산에 고개를 숙이고, 천우맹에 드는 모습이 상상이나 가는가?

아니.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질 수 없다.

아마 다른 구파일방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신경 쓰지 않는 개방이라면 또 모를까.

“……내가 소림의 방장이기에 소림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강호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소림이 그 중심이 되었는지 아느냐?”

“그건…….”

“저들은 오직 소림을 대할 때만, 한발 물러나 주기 때문이다! 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남궁황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그가 오대세가의 수장 자리를 내어 놓고 천우맹에 들었겠느냐 이 말이다!”

“…….”

“천우맹으로는 강호를 하나로 엮어 낼 수 없다. 그렇기에 천우맹은 자신들이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들만 그러모아 세를 넓히려 드는 것이지. 그런 행위가 중원에 확연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법정의 어깨가 노기로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느냐?”

“……예, 방장.”

법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법정의 말에는 사실 틀린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우맹이 기존 중원의 강자인 구파일방의 명문을 복속시키는 광경은 그려지지 않는다. 결국 천우맹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강북은 천우맹과 구파일방이라는 두 세력으로 뚜렷하게 나뉠 뿐이다.

더구나 그 두 세력은 이미 짙은 악감정을 서로 쌓아 가고 있지 않은가?

딱히 소림의 예를 들지 않는다 해도, 애초에 화산과 구파일방은 서로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관계였다. 진즉에 해결했어야 할 일을 여기까지 묻어 두다 보니 그 상처가 곪다 못해 썩어들어 가는 중이다.

“저들이 그 사실을 모를 것 같으냐?”

“…….”

“저들이 구상하는 천우맹에 과연 구파일방의 자리가 있겠느냐?”

“그건…….”

“그런데 내가 언제까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저들을 품고 가야 할 이들로 생각해야 하는가? 부처조차 마라(魔羅)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 그런데 감히 그 깊은 뜻에 달하지 못한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한단 말이더냐?”

법정의 두 눈에 살기가 흘러나왔다.

처음 화산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들을 지원한 이는 법정이었다. 그리고 화산은 생각 이상으로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그렇기에 천성적으로 소심해서 약점을 지닌 혜연을 그들에게 보내 그 패기를 배우게 하지 않았던가?

비록 때때로 마음에 안 드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적당한 방종 역시 허용되어야 하는 법. 그렇기에 단죄보다는 기다림으로 그들을 대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저들의 방종을 좌시할 수 없구나.’

불가가 모든 것을 자비로 해결하려 했다면, 계율을 어긴 이를 벌하는 계도(戒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썩은 싹은 잘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멀쩡한 싹들마저 썩어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미 화산이라는 썩은 싹은 수많은 병폐를 만들어 냈다. 이대로 분열이 가속화된다면 마교는 고사하고, 당장 저 사패련마저 감당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놀아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법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그의 입술에서 진득한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방장?”

“아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개방을 불러라. 천우맹이 사패련과 손을 잡은 부분을 추궁해야겠다.”

“이, 이럴 때에 말입니까?”

법계가 놀라 되묻자 법정은 말없이 그저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결국 법계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하겠습니다.”

“서둘러라.”

“예!”

법계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홀로 남은 법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타오르는 등잔을 응시했다. 바람 한 점 불고 있지 않은 방 안이건만, 저 등불은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지금 그의 내심이 드러난 듯했다.

“화산……. 화산검협 청명.”

뿌드득.

터질 듯이 주먹을 움켜쥔 법정이 이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목탁을 가볍게 잡았다.

쩌저적.

그 순간, 그의 손때 묻은 목탁이 쩍 갈라졌다.

법정은 갈라진 목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 허허.”

등잔불이 더욱 거칠게 흔들렸다.

“허허허허헛. 허허허허허허허허!”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방에 노승의 힘없는 웃음소리만이 끝없이 새어 나왔다.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