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7화.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2)
“끄으으으으…….”
“사, 살려…….”
“아니……. 죽여 줘…….”
당가인들과 녹채의 산적들이 땅에 엎어져 헐떡이고 있다.
녹색 옷을 입은 당가의 가솔들과 비슷한 풀색 옷을 입은 녹채의 정예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다 죽어 가는 모습을 어디 가서 또 볼 수 있겠는가.
청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정사 화합의 장이지, 이게.”
남궁도위는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차례나 보고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진정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참 놀랍기만 했다.
사천당가는 강호에서 알아주는 명문가다. 당연히 그들의 수련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녹채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그 많은 녹림도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아닌가? 저 녹림왕이 이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단련시켰을지는 강호의 사정에 무지한 이들이라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험난한 수련을 이겨낸 이들이 청명의 지시에 따라 구르기 시작한 지 불과 몇 시진 만에, 어디서 있는 대로 처맞고 목숨만 겨우 부지한 패잔병의 몰골로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저 인간은 정말 ‘무인’이라는 속성을 가진 이들을 괴롭히는 것만 평생 연구해 온 사람 같다.
그래도 나름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곳에 합류하는 꼴만은 면한 남궁도위는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쓰러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남궁세가도, 처음 저 꼴을 당했을 때는 생전 써 본 적 없는 욕지거리가 속사포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왔었다.
하지만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는 남궁도위와는 달리, 저 안쓰러운 광경을 보며 되레 웃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다 죽었네.”
“에이. 아직 덜 죽었는뎁쇼?”
“이 정도로 벌써 헥헥거리면 안 되죠.”
저건 마귀 새끼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나.
남궁도위는 낄낄대고 있는 오검을 흘끗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듯이 웃고 있는 저 도가의 마귀들을 보고 있자니 태상노군이……. 어? 스님? ……스님은 왜 거기서 같이 웃고 계십…….
남궁도위가 생각을 뚝 끊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곳은 도가와 불가를 가리지 않는 타락의 장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타락의 장 속에서도 진정한 도(道)를 품은 도인이 한 사람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마귀들 속에서 눈치를 보던 누군가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저…… 사숙. 그래도 열심히 수련 끝에 저리 힘들어하시는 건데, 이리 대놓고 즐거워하는 건 좀…….”
남궁도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윤종 도장!’
과연 화산의 도기(道器)! 마귀의 집합소가 된 화산에도 희망은 있었다.
윤종의 말을 들은 백천은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종아.”
“예, 사숙.”
“분명 네 말이 틀리지 않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그럼 왜…….”
“한데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보거라. 지금까지는 저분들이 우리가 수련받는 걸 지켜보는 입장이지 않았느냐?”
“…….”
“그동안 우릴 보며 얼마나 즐거웠을지를 생각하니 내 웃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
“기억해 보려무나. 우리가 수련할 때, 저 사람들이 우릴 어떤 눈으로 지켜보았는지.”
“아니, 그건…….”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윤종이 널브러져 있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인생사…… 결국은 되돌려 받는 것을.”
“그렇지. 깨달았구나.”
화산의 도기가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남궁도위는 ‘그런 걸 깨닫지 말라’고 속으로 절규했으나, 윤종이나 백천이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녹림왕 돌아가신 것 같은데?”
“어이쿠, 몸도 약하신 분이.”
“정말 골로 가시겠는데?”
“에이. 저 정도로는 안 죽죠. 저 새끼가 시키는 수련이 제일 엿 같은 점이 정말 뒈질 것 같은데 안 죽는다는 거잖아요. 죽으면 차라리 편하기라도 하지.”
“그렇지. 아직 한참 더 겪어야지.”
“건강해져.”
마귀들이 낄낄대는 소리에, 임소병이 고개를 들어 오검을 노려보았다. 핏발이 선 그의 두 눈에서 원독에 찬 눈빛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이, 이 사파보다 더한 새끼들…….”
“낄낄낄낄낄.”
“으히히히히히힛!”
그 목불인견의 참상을 지켜보던 남궁도위가 결국 눈을 돌렸다.
‘천우맹은 어디로 가는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니!”
청명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평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뭔 다들 피죽만 퍼먹었나? 뭐 얼마나 굴렀다고 벌써 바닥에 찰싹 들러붙어서 꿈틀대고 있어?”
“…….”
“…….”
“이러고도 당가니 녹림이니 하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녔어? 이 실력으로? 이 체력으로? 아이고오, 내 팔자야. 내가 이런 것들을 믿고 앞에서 싸우고 있었네!”
오검에게는 원독에 찬 눈빛을 보내던 이들이 청명이 나서자마자 곱게 눈을 내리깔았다. 열받는다고 생각 없이 저 인간에게 대거리했다가 피 본 이들만 늘어놓아도 장강쯤이야 우습게 가로지를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죽었다 생각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쯧쯧쯧.”
그 꼴을 지켜보던 청명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 댔다.
“잘도 이 실력으로 마교 새끼들을 상대하겠다. 오줌 지리고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
뭔가 억울한 마음에 항변하려 고개를 들었던 이들이 청명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눈 딱 감자.’
‘저 인간은 우리가 알던 화산신룡이 아니라, 화산검협이다.’
‘이제는 가주님도 한 수 접어 줘야 해.’
성격이 개차반인 건 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 그들이 알던 화산신룡과 지금 화산검협의 위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굳이 그가 화산의 제자라는 점, 그리고 당가주와의 친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아도 저만한 실력을 가진 이가 하는 훈계라면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들어야 한다.
녹림도들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여긴 녹림왕이 직접 구르고 있으니까.
청명이 한심하다는 듯 모두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내일부터는 딱 오늘 두 배만큼 할 테니까 미리 각오해라. 오늘처럼 매가리 없이 굴 놈은 그냥 오늘 밤에 미리 탈출해. 나도 내 손에 피 묻히는 것보다는 그게 편하니까.”
“……저, 저기.”
그 순간 당가의 소가주인 당패가 솔깃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타, 탈출해도 됩니까? 뭐 따로 보복이라든가……?”
“내가 당가나 녹림에 무슨 보복을 해. 당연히 안 하지.”
“저, 정말…….”
당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이어진 청명의 말에 시커멓게 죽어 버렸지만 말이다.
“대신 당가주님의 분노는 네가 알아서 감당해야지.”
“…….”
양손에 비도를 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달려오는 당군악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당패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지옥이다. 아니, 어쩌면 그 상황에 비한다면 여기가 천국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청명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이러니 화산만 죽어났지.’
예전의 화산도 결국 자기 전력을 높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후방에서 지원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청명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온갖 곳에서 마교 놈들을 썰어 대며 영웅적인 행적을 쌓아 올린 것이지만…….
‘아니, 생각해 보면 그냥 나만 죽어라 구른 거잖아?’
- 허허허. 빨리도 아는구나.
“이 양반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들어 청문에 대한 존경심이 살살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양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청명아! 여기 마교 놈이 나타났다! 네가 좀 다녀오거라!’만 주야장천 외쳐 대는 인간이었잖은가?
하다못해 현종도 청명이 눈이 돌아가서 나서려고 하면 다친다고 어떻게든 못 말릴 놈 말려 보자고 진땀을 빼는데.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예?”
“크흠. 됐고!”
청명이 손을 획 휘젓고는 눈을 부라렸다.
“구파일방 새끼들은 눈이 뻘게서 우릴 조질 방법만 궁리하고, 사패련 새끼들은 어떻게든 우리 배때기에 칼 찔러 넣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이딴 실력으로 걔들 둘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임소병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아니, 내가 언제 걔들을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입을 뗐어, 코를 뗐…….”
퍼억!
그 순간 날아간 신발이 임소병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터엉.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넘어간 임소병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어른 말씀하시는데, 버릇없이!”
그 상황을 지켜보던 윤종이 작게 속삭였다.
“사숙. 저 새끼가 여기서 제일 어린 것 아닙니까?”
“그냥 쟤가 형이라고 생각하자꾸나. 그게 우리 서로 편하잖으냐.”
“……그건 그렇죠.”
반듯하게 뻗어 경련하는 임소병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저런 걸 녹림왕이라고. 어휴.”
“…….”
“여하튼 내일도 수련은 한다. 내일부터는 다 뒈졌다고 생각하고 나와.”
“…….”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너희를 쓸 만하게 만들어 주마.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두 눈을 희번덕대던 청명이 몸을 획 돌려 걸어갔다.
놈이 저 멀리까지 간 것을 확인한 백천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독 품었네.”
“제대로 할 생각인 모양인데요.”
“이쯤 되면 진짜 좀 안쓰러운데.”
조걸은 한 손에 술병을 쥔 채 휘적휘적 걸어가는 청명의 뒷모습을 흘낏 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저 새끼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응?”
“아니, 뭐…… 저희야 이분들이랑 보조를 맞춰서 수련하니까 평소보다 편하고 좋지만…….”
그 말을 들은 당가인들과 녹림도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조걸을 노려보았다.
편해? 이게? 진짜?
“저 새끼 성미를 감안하면 보나 마나 숨 돌리자마자 우리보고 항주에서 한 거 없다고 발악하고 나설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그 화살이 저쪽으로 가는 것 같네요.”
“뭐긴 뭐겠느냐.”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패련이고 마교고, 이제 화산 하나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잖느냐?”
“그건 그렇지요.”
솔직히 이건 화산의 제자들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실력으로 극복해 보려 해도 일단 그 수가 너무 다르다. 화산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그 수로만 치면 작은 문파에 불과하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일당백의 실력을 갖춘다고 해도 마교나 사패련의 수는 화산의 백 배를 넘어갈 것이다. 그러니 답이 나오지 않을 수밖에.
“그러니 그놈들에게 대항하려면 다른 문파들을 키우는 수밖에 없겠지. 화산처럼.”
“……어디처럼요?”
“화산처럼.”
“…….”
백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니 청명이 놈이 노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 천우맹의 화산화. 더 나아가서는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할 수 있겠지?”
“저,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모두가 충격받은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야 저 마교 놈들과 천마에게 대항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마, 말은 맞는데…….”
“그거 진짜 끔찍하게 들리네요.”
“그게 바로 지옥이지.”
“아니, 그쯤 되면 마교의 전 중원 말살 계획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끔찍한지 생각해 봐야 할 상황 아닙니까?”
“……얘들아. 너희 화산파다.”
“알긴 아는데…….”
조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장일소 놈은 정말 무섭겠네요.”
“아니지.”
“예?”
백천이 피식 웃었다.
“그 상황을 장일소보다 더 끔찍하게 여길 이가 하나 있지 않으냐?”
“누구를……. 아!”
그 순간 오검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로, 정확히는 한 사람의 반질거리는 머리 쪽으로 향했다.
반들반들한 머리가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