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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96화 (1,097/1,567)

1096화. 전 중원의 화산화라고? (1)

때로 사람에게 놀랄 때가 있다.

평범한 이들이 하지 않을 생각을 하는 이를 볼 때,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이를 볼 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놀라움을 느낄 때는, 평범한 이들보다 더 멀리 보는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할 때다.

“저희는 마교를 두려워했습니다. 더불어 사패련의 일통과 구파일방의 분열을 우려했지요. 그렇기에 당황하고 급해졌습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했던 건, 이제부터 저들에게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였습니다.”

당군악의 말에,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화산검협만은 다른 걸 보고 있었던 겁니다. 마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당군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 기묘하지요…….”

“으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현종만은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때때로 화산검협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어떻게 저리 생각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저토록 완벽한 길을 걸어온 이가 어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저리 없을 수가 있는지.”

“……가주님.”

당군악의 시선이 살짝 위쪽으로 향했다. 천장이 아닌 그 너머의 어딘가를 보는 듯했다.

“천우맹의 입장에서는 축복받은 일이지요. 화산의 입장에서도 가히 반길 일입니다. 그런 이의 존재는 모두를 이끌어 주니까요. 하지만…….”

잠깐 말을 흐린 당군악의 눈빛이 어두웠다.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게 반길 일인지는…….”

그 목소리에는 뚜렷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맹주님. 어쩌면 그건…… 슬픈 일일지도 모릅니다.”

현종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당군악의 말이 청명이라는 한 사람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청명은 자기 확신의 화신처럼 보인다. 자신이 틀렸을 거라는 의심 없이, 언제나 옳은 답을 제시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마저 이끄는 초인이다.

하지만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 안, 그 깊고 깊은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의심과 불안, 그리고…… 공포다.

현종은 처음 청명의 내면을 엿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제 잘난 맛에 콧대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 있어도 누구도 과하다 탓하지 않을 만하건만, 그런 청명이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을 알아 버렸다. 현종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놀랐을 것이다.

현종이 굳이 청명의 과거를 파고들지 않는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청명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었건 간에, 설령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해도…… 저토록 후회하고 저토록 고통스러워하지 않는가.

꼭 장문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도인으로서 저토록 고통에 오래도록 허덕이는 이의 상처를 어떻게 헤집을 수 있을까.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당군악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소림은 자문의 이득을 가장 우선시하다가 이미 이루어져 있던 연합마저 분열시켰습니다.”

“…….”

“그리고 만인방은 연합한 문파들마저 자신의 휘하로 복속시키고 있지요. 지금 당장은 그것이 옳아 보일지는 모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껏 그 세를 과시하다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대 사파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화산검협이 선택한 방법은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이지요. 문파 간에 벽을 세우지 않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누군가가 더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는……. 그렇지요. 그게 친구겠지요.”

당군악이 미소를 지었다.

이전까지의 청명은 언제나 다른 문파들을 우대해 주면서도, 그 내심에는 언제나 화산이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화산은 그토록 지독하게 수련을 시키면서도 다른 문파들의 전력 강화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사패련의 발호에 위협을 느꼈을 때 가장 먼저 행한 일이 다른 문파를 모두 내버려 둔 채, 화산을 봉문 해 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게 그의 내심을 확연히 보여 주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청명은 화산뿐 아니라 천우맹에 속한 다른 문파들에도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월권, 혹은 과한 간섭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건 청명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큰 것을 내어 놓는 일이다. 청명은 제 능력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니까.

그때 현종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청명이 녀석의 생각을 조금 깨웠을지도 모르는 일이겠군요.”

“영향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 청명에게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남궁세가 정도 되는 문파가 성장하기 위해 낮은 자세로 다가오는 경험은 말이다.

그러니 그간 각 문파의 독립성을 존중하던 청명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조금은 늘린 것이겠지.

“가주님께서는…….”

현종이 살짝 고민하는 듯 말을 골랐다. 그러더니 물었다.

“저 아이가 하려는 일의 결과가 어찌 되리라 보십니까?”

“글쎄요.”

당군악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강호에서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니까요.”

“으음.”

그는 이내 또렷한 눈으로 현종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처한 상황 역시 이제껏 유례가 없었던 일입니다. 마교는 언제 발호하여 중원을 침공할지 모르고, 그 대처의 중심에 서야 할 구파일방은 서로 분열해 제힘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더구나 협조를 바라기 어려운 사패련마저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천우맹이 희생 없이 모든 것을 이겨 낼 확률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지난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당군악이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면, 지푸라기를 잡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비록 이제껏 단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현종 역시 마주 웃었다.

“그래야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저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묵묵히 지원해 주는 것뿐일 테니까요.”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화산검협에게는 그 묵묵한 지원보다 더 힘이 되는 게 없을 것입니다.”

현종의 얼굴에 슬쩍 겸연쩍은 기색이 어렸다.

“해야 할 일이 많겠군요.”

“예. 우선은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합류를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가 은연중에 그들을 조금 버려두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잖습니까.”

당군악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부러 피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야수궁과 빙궁이 중원과 먼 곳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섣불리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궁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배려 아닌 배려가 천우맹의 대부분 행보를 화산과 당가가 주도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모두를 품고 가겠다고 천명한 이상, 결코 그들이 소외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야수궁주께서는 조금 귀찮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종의 말에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권한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니까요. 그 정도는 이해하실 분입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청명이 큰일을 겪을 때마다, 작게는 화산에, 크게는 천우맹에 격변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걸 탓해서는 안 된다. 청명은 작게는 자신을, 그리고 크게는 천우맹을 매번 그렇게 뒤엎고 새로이 세워 가며 여기까지 달려온 이니까.

현종이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청명이 부담 없이 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다만…….”

당군악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려가 없는 건 아닙니다. 내부적인 문제도 내부적인 문제지만, 가장 큰 걱정은 아무래도 외부겠지요.”

“……구파일방과 사패련 말씀이십니까?”

“예.”

당군악의 두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이번 항주마화의 전말은 곧 천하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화산과, 그 일에 동참했던 사패련의 위상은 지금까지와 비할 수 없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 사실에 가장 불편함을 느낄 이는…….”

“구파일방이겠군요.”

“예. 그리고 그 정도는 맹주님께서 상상하시는 이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현종이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소림이 어떻게서든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건 ‘강호를 수호하는 소림’이라는 관념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 관념을 화산이 가져가 버렸지요.”

“아아…….”

현종이 살짝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언가 말하려던 당군악이 슬쩍 넓은 소매로 입을 가렸다.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현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인 줄은 알지만, 법정 그 작자가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와서 그만.”

당군악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박한 소리였다.

하지만 현종은 당군악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그 역시 법정이 길길이 날뛸 모습을 생각하면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 주체하기가 힘드니까.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딱한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본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가 뛰어남을 알고 자존심이 강할 뿐이지요.”

이런 면을 볼 때, 법정은 청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다.

법정 역시 더없이 뛰어난 이다. 저 천년소림의 인재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끝끝내 방장 자리에 오른 것만 보아도 결코 모자랄 수 없는 이였다.

‘그렇기 때문이지.’

법정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언제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비수처럼 품고 살아가는 청명과 완벽히 대비되지 않는가?

“그러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법정이 어찌 나올지 모를 일이니까요.”

현종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갑한 일이지만, 중원을 멸망시키려 하는 마교나, 호시탐탐 강북을 노리고 있는 사패련보다 당장 곁에 있는 구파일방이 조금 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현종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확고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갑자기 확 돌변한 기세에, 맞은편에 앉은 당군악의 두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저 아이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게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 의지가 확연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당군악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맹주님.”

어쩌면 천우맹의 이런 행보조차도 작은 변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격변하는 강호의 정세를 두고 보자면 미미한 변화다.

하지만 이 변화의 끝은 결코 미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군악은 거듭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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