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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95화 (1,096/1,567)

1095화. 말이 좀 과하긴 했지. (5)

“으아아아아악!”

문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움찔한 당군악이 밖을 슬쩍 보았다. 방금 들려온 비명에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이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종이 넌지시 묻자 당군악이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실 터인데.”

“바라 마지않던 일입니다.”

당군악이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차가 살짝 식은 것을 확인한 당군악이 내력을 살짝 끌어 올렸다. 식었던 찻물이 곧 새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향을 음미하던 당군악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매화차는 향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당군악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다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생각하던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언젠가 화산을 따라갈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수밖에 없지요.”

“너무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누가 감히 천하의 사천당가를 화산과 비교하겠습니까?”

당군악이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아직 세상은 화산보다는 당가를 조금 더 위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막상 천우맹이 결성되었을 때도 내밀한 속사정을 아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천당가가 화산을 전면에 내세우고 실권을 쥐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들이 강남에서 한 일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그 잘못된 인식마저도 바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식이 아니다. 당군악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아니겠는가?

화산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지만, 당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동안은 화산이란 문파가 옆에 설 날을, 사천당가가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한데 이번 일을 기점으로 그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맹주님. 아니……. 장문인.”

달라진 호칭에 현종이 심유한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화산과 당가의 차이는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가주님.”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건 자존심도 뭣도 아닙니다. 그저 현실을 외면하는 소인배의 아집에 불과한 것이지요.”

현종이 가만히 당군악을 마주 보았다.

당군악은 쉬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자문의 수련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게 쉬운 일일 리 없다. 아니, 당장 현종조차도 할 수 있을 일인지 의문스럽다.

그걸 이리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당군악을 보고 있으니 존경심이 절로 샘솟았다.

“당가주님께서도 마음만 먹으시면 가능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당군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게 가능했더라면 제가 지금까지 당가의 전력을 강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당군악이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화산검협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무학이 뛰어난 것과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 뛰어난 것은 전혀 별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건 더하고 뺄 것 없는 당군악의 진심이었다.

물론 청명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화산을 일으킬 인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때의 청명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아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무위와 소름 돋는 심계를 동시에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화산검협을 얕잡아 본 것이었지.’

설마 화산이 이토록이나 강해질 것이라고는 당군악조차 생각지 못했다.

청명이 화산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청명에 대한 호의만 가득한 당군악조차도 때때로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낄 정도였다.

평범한 이라면 그 열등감을 화산검협에 대한 적의로 표출할지 모르지만, 당군악은 그런 얼간이가 아니었다. 그를 위한, 그리고 당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 제가 나서서 가솔들을 닦달하면 결국에는 화산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당가의 가주가 당가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으으음.”

현종이 침음했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러니 이게 맞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주님…….”

“대외적으로는 말이지요.”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었다.

“내심은 조금 다릅니다. 제가 직접 나서서 아이들을 닦달했는데도 제대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저만 망신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

“체면이란 쓸데없는 것이지만, 때로는 챙길 필요도 있지요. 겉으로 보자면 제가 천하의 화산검협을 교관으로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니 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슬쩍 짓궂게 웃는 당군악을 보며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요.”

“맹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니 꽤 의미심장합니다.”

당군악의 말에 현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 말은, 힘든 걸로 따지자면 현종이 제일 심한 게 아니냐는 의미다.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청명의 존재는 현종에게 축복과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목에 겨누어진 비수와도 같았다.

뛰어난 아랫사람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다. 청명처럼 과하게 뛰어난 이는 언제나 위에 선 이를 찔러 댄다. 그러니 위에 서고도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의심해야 한다.

그 부담감을 이겨 내는 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생각에 잠겨 있던 현종이 당군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당군악이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고개를 든 현종이 심유한 눈으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요청이었을 텐데도, 그걸 화내지 않고 이리 받아 주시니……. 화산의 장문으로서 감사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맹주님.”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예.”

당군악이 작게 미소 지었다.

“화산검협이 제게 당가를 가르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산검협에게 당가를 조금 맡아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랬군요.”

하지만 현종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그 말인즉, 당가주님께서 청명이 녀석의 말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고, 그 아이가 싫은 소리를 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먼저 나셔 주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맹주님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당군악이 쓰게 웃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맹주님.”

그러더니 문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용기가 부족한 편입니다. 저 녹림왕처럼 직접 화산검협이 시키는 대로 할 용기는 없어서 여기서 이리 맹주님과 차나 마시고 있지 않습니까?”

“저건…… 조금 경우가…….”

“딱히 다를 것도 없습니다. 진짜 대단한 건 녹림왕이지요.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려 한다면 화산 역시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입니다. 게다가 이번 항주에서도 활약이 대단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의 사람 됨됨이는 접어 두고라도, 녹림왕이라는 직위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선대가 물려준 녹림을 착실하게 접수한 것만으로도 녹림왕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일은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당연히 임소병은 천하를 호령하는 문파의 수장으로 어디에서나 존중받을 만했다.

그런데 그런 이가 저리 흙밭에 몸을 굴리고 있다.

“굳이 저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그래야 반발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당군악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 삼 년간 장강에서 임소병과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젠 임소병이 어떤 사람인지도 웬만큼 이해하고 있었다.

“사파가 강자존의 논리로 모든 게 좌우되는 곳이라고는 하나, 그건 대체로 사파 내에서의 일입니다.”

“흐음.”

“아무리 화산검협이 강하다고는 하나, 결국 화산의 장문인도 아닌 일개 제자입니다. 그런 이의 명을 따르는 게 달가울 리 없지요. 아무리 그가 평범한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녹림왕인 임소병이 가장 앞에서, 저리 군말 없이 수련하게 되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여지가 사라지게 됩니다. 아마도 녹림왕은 그걸 노리고 저러는 것이겠지요.”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당군악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물론 녹림왕의 내심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녹채의 힘을 키워 장악력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도 있겠지요. 겸사겸사 화산검협에게 빚도 하나 지워 놓고 말입니다.”

조곤조곤 말하던 당군악이 쓰게 웃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나, 노림수가 있다 한들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예.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종의 표정은 조금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다른 면이 보이는 사람이 바로 임소병이다. 처음 그가 화산에 들었을 때와 지금의 평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만 봐도 확연하지 않은가?

“대단한…….”

그때였다.

“난 환자라고, 이 썩을 말코 새끼야!”

“환자? 환자아아? 오냐, 이 사파 새끼야! 내가 진짜 환자가 뭔지 알려 준다! 이리 와, 이 새끼야!”

“히이이이이익!”

당군악과 현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뚱해진 얼굴로 문 쪽을 보았다. 한참 말없이 비명을 듣고 있던 당군악이 하던 말을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크흠. 여하튼.”

헛기침한 당군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녹림왕이 저리 애를 쓰고 있으니, 저도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요. 이번 화산검협의 의도에 당가는 최선을 다해 협조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당군악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새삼 느낀 일이지만, 사람에게는 그릇이라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어려운 일인가를 접어 두고, 이런 구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산검협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으음……. 여러 의미로 말입니다.”

“예. 여러 의미로.”

두 사람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스쳤다.

좋은 쪽으로만 평범하지 않으면 참 좋을 텐데…….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예?”

“겉으로 보자면 화산이 졌던 책임을 다른 문파들 역시 분담하라는 의미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현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저 화산검협이…….”

잠깐 말끝을 흐린 당군악이 이내 그 말을 이었다.

“천우맹에 속한 다른 문파 역시 자신이 짊어지고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까?”

현종도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검협이 처음 천우맹은 만들 때 제게 내세운 논리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이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익이란 말이 빠졌지요.”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대단한 것이지요.”

당군악이 못 당하겠다는 듯 웃어 버렸다.

“이익과 논리를 넘어 그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가겠다는 말을 천하의 누가 감히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 오직 화산검협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요.”

“…….”

“그러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문밖에선 연신 어린 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선 듯한 그 목소리 안에는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잔정이 녹아 있다.

“저는 줄곧 그가 도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생각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거대한 도는 평범한 이의 눈에는 도로 보이지 않는 것이고,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게 된다는 말을…….”

당군악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현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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