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4화. 말이 좀 과하긴 했지. (4)
“좋은 말이지. 그래, 좋은 말이야.”
술병을 쥔 채 평상에 드러누운 청명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같이 간다느니, 발맞춰 간다느니. 물론 뭐 좋은 말이기는 하지. 그런데…….”
꼴꼴꼴꼴.
술이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간다.
“카하아아아! 죽이네!”
입에서 힘차게 술병을 뽑아낸 그는 제 손에 들린 술병을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여기 물맛이 좋아서 그런가? 술도 술술 넘어가네.”
행복한 얼굴로 입맛을 다신 청명은 이내 다시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 봐. 아무리 발맞춰 가려고 해도 사람이 굼벵이랑 발을 맞출 수가 있겠어? 없지?”
“…….”
“그러니까 최소한은 해야지. 최소한은. 응? 최소한 사람으로 대할 정도로는 해 줘야 발을 맞추든 손을 맞추든 할 것 아냐? 아무리 봐도 사람 새끼가 아닌데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끌고 가겠어?”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안 그래?”
“…….”
“안 그러냐고.”
“끄으으으으…….”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다 죽어 가는 신음이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엎어져 있던 백천이 원독 가득 찬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꼴꼴꼴꼴.
하지만 청명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힘차게 술만 마셔 댈 뿐이었다.
“크으으으으!”
술병을 입에서 뽑고 긴 탄성을 흘린 청명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최소한 사람 새끼로는 만들어야지. 그래야 뭘 해도 해 볼 거 아니야.”
“……개새끼.”
“귀신은…… 귀신은 대체 뭐 하나……. 저 새끼 안 잡아가고.”
“……아니, 이젠 그냥 나라도 잡아갔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가 지옥이지……. 저 새끼 없는 곳이 어디든 천국이고.”
항주에서 싸울 때보다 배는 더 너덜너덜해진 오검이 원독 어린 저주를 늘어놓을 때였다.
그들 뒤에 같은 꼴이 된……. 아니, 몰골로 보자면 좀 더 처참한 임소병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나, 나는……. 아니, 나는…… 왜…….”
오검이 시큰둥한 눈으로 임소병을 돌아본다.
“못 들으셨어요?”
“뭘…….”
“이제 천우맹에 속한 문파는 화산과 함께 나아간다잖아요.”
“근데 그게…….”
유이설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친구니까. 차별 없는 대우. 차별 없는 수련.”
“…….”
“그러니까 녹림도 구른다. 화산처럼.”
“……나, 나는 환자…….”
“환자도 같이 구른다.”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항의한 건 녹림도들이 아닌, 그들의 옆에서 같이 구르고 있던 당가인들이었다.
울분에 차 몸을 뒤틀던 이들의 눈에 뿌연 습기가 서렸다.
화산검협, 화산검협, 말로만 들었지. 아니, 눈으로도 보기는 했지만 저 인간의 발광이 당가와는 상관없는 건 줄 알았지.
새벽부터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오늘부터 너희 수련도 내가 맡기로 했다. 억울하면 당가주한테 가서 따져라’라고 소리쳐 대는 건 대체 어느 나라의 법도인가?
그리고 그걸 막아 줘야 할 당군악은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반항?
물론 해 봤다. 반항이라기보다는 소심한 저항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좋게 좋게 청명을 타이르려던 당잔이 걷어차여 저 차디찬 장강물에 처박힌 뒤로 반항이니 저항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과는 영 관계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저기…….”
그때, 널브러져 있던 남궁도위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남궁도위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 아까 저희를 모아 놓고…… 이제 우리는 같이 간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것과 이 수련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아, 물론 저희 남궁세가는 원래 하던 것이니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만, 당가 분들과 녹림 분들은 사정이 좀 다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아, 이거?”
청명이 으음, 소리를 내며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듣고 싶으시다면, 설명을 해 드려야지.”
그 말에 오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명을…… 해 줘?”
“저 새끼가?”
“해, 해가 서쪽에서 떴나?”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청명은 언제나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만 설명하고, 귀찮을 땐 그냥 무시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올 청명의 올바른 반응을 굳이 찾자면, ‘까라면 깔 것이지, 어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눈알을 희번덕대면서 꼬치꼬치 캐물어?’여야 할 텐데……. 그런 놈이 저리 순순히 설명해 준다고?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 순간, 당소소가 조용히 뇌까렸다.
“돈 많이 냈잖아요.”
“아…….”
그 한마디에 모든 걸 납득한 오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많이 내긴 했지. 무전유죄 유전무죄. 이 더러운 세상아…….
그러거나 말거나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깨달았거든.”
“……예? 뭘 말입니까?”
청명이 술병을 과격하게 평상에 쾅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저 마교 새끼들이 저리 눈이 시뻘게서 천마 새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저 얌생이 같은 장일소 새끼가 강북을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혀를 날름대고 있는데!”
“…….”
“내가 화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이 말이지.”
청명이 눈깔을 희번덕대며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쭉 돌아보았다.
“이렇게나 재료(?)가 많은데.”
얼핏 보면 청명의 두 눈에 귀화가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같이 간다는 게 무슨 의미냐?”
“……서로 한마음 한뜻으로…….”
“저 새끼, 저거! 누가 있는 집안 자식 아니랄까 봐 또 뻔한 소리 늘어놓는 거 봐라, 저거.”
쾅!
손바닥으로 평상을 강하게 내리친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같이 간다는 건 책임을 같이 진다는 거지! 연대 책임이라 이 말이야!”
“…….”
“예전에는 화산만 독박을 썼었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거지! 아니, 마교 새끼들 못 막는 게 화산 잘못이야? 니들도 책임이 있는 거잖아.”
“아, 아니…….”
그게 말은 맞는 말인데……. 그게…….
역정을 내던 청명이 돌연 히죽 웃었다.
“같이 가야지. 아암, 같이 가야 하고말고. 그런데 왜 화산 새끼들만 고생을 해야 하냐고. 다들 공평하게 지옥도 보고, 공평하게 돌아가신 할아버님도 잠깐 뵙고 하면서 평등하게 짐을 나눠서 져야지.”
“아, 아니. 그건……!”
“저희 할아버님은 아직 살아 계시…….”
녹림도들과 당가인들이 뭔가 항변하려 할 때였다.
짝짝짝짝짝.
그들의 옆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어 가던 화산 놈들이 어느새 기력을 되찾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청명에게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훔치며 젖은 목소리로 연신 찬사를 보냈다.
“감동적인 연설이었어.”
“내가 웬만해서는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다 나네.”
“저는 찬성합니다!”
저 개새끼들이…….
녹림도들과 당가인들이 화산 놈들을 향해 미친 듯이 눈을 부라렸지만, 막상 질문을 했던 남궁도위의 시선은 청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그 말씀은 그러니까…….”
“그래.”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같이 뛰려고 해도 최소한 보조는 맞출 수 있어야지. 막말로 이번에 강남에 주교 놈 떴을 때, 거기서 싸울 수 있었던 놈들이 몇이나 되냐?”
청명의 눈이 당가에 꽂혔다.
“당가에서 잘해 봐야 한 명.”
당가인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에서 실력으로 폄하받을 일은 절대 없는 사천당가지만, 이번 강남 사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거기서 있었던 일을 감안한다면 당가인 중, 항주에서 활약을 할 만한 이는 당군악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번엔 청명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꽂혔다.
“녹림에서 한 놈.”
임소병은 당가와는 달리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산적 새끼들이 다 그렇지! 뭘 더 바라십니까?”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임소병을 보던 청명이 남궁도위에게로 고개를 획 돌렸다.
“남궁에 한 명.”
“…….”
“그것도 어설픈 반편이지.”
남궁도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매화도를 겪기 전, 남궁황과 장로들이 살아 있던 남궁세가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지금의 남궁세가는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다 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억울함이 부족한 실력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궁도위였다.
“그런데, 뭐? 천우맹? 천우매애애앵? 친구우우우우우우?”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린다.
“친구는 얼어 뒈질 친구야. 이런 와중에 마교 새끼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해 봐. 보나 마나 또 ‘일단 우리는 뒤에서 열띤 응원을 보낼 테니까 화산 너희가 가서 해결 좀 해 봐.’ 하면서 뒤에서 손뼉이나 쳐 대겠지. 이 새끼들아!”
“…….”
“내가 그 꼴을 볼 것 같아?”
청명의 광기가 극에 달해 휘몰아친다.
“이번에는 절대 혼자 안 죽는다! 죽으면 무조건 같이 죽는 거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야! 화산이 뒈지러 갈 때는 니들도 같이 뒈지러 간다. 그게 친구지!”
- ……청명아. 그거 아닌 것 같…….
“아, 사형은 시끄럽고!”
윤종과 조걸이 순간 서로를 돌아보았다.
“입 열었냐?”
“아뇨?”
“…….”
“여하튼!”
청명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당가고!”
당가인들이 움찔하고 목을 움츠린다.
“남궁이고!”
남궁도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산적 새끼들이고!”
“……아니. 차별하지 말고 적어도 녹림이라고 불러 주십쇼…….”
임소병의 항의했지만, 청명의 귀에 그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저 사패련 잡놈들이나 마교 새끼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최소한 밥값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냥 닥치고 시키는 대로 수련해라.”
“저, 저기…….”
그때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패가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뭐?”
“그…… 도장께선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를 주력으로 하는 문파라서 일반적인 무가와는 수련법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 저희는 자율적으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당가인들이 희망을 되찾은 눈으로 당패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청명이 그 희망을 단칼에 똑 부러뜨렸다.
“괜찮아.”
“……예?”
“괜찮다고.”
“……아, 아니. 그…….”
“애초에 당가주님도 동의한 일이니까 넌 그냥 조용히 해.”
당패의 고개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어쩐지 새벽부터 안 보이신다 싶더니, 그새 가솔들을 팔아넘겼을 줄이야.
“걱정할 것 없어.”
청명이 의욕에 가득 찬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가 문제를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찾아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반년. 그 반년이 지나기 전에 내가 너희를 하나도 빠짐없이 사람 새끼로 만들어 주마.”
“…….”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청명의 입가에 매우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모두에게 든 의문은 하나뿐이었다. ‘친구’라는 단어를 과연 저딴 식으로 써도 되는 것일까…….
“자, 그럼 시작…….”
그 순간 임소병이 손을 번쩍 들었다. 두 눈이 독기로 번뜩였다.
“뭐? 항의는 안 받…….”
“그게 아니고!”
청명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임소병이 악의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야수궁이랑 빙궁은 언제 옵니까?”
“…….”
“친구가 되어야죠. 걔들도 천우맹인데!”
결코 혼자서는 안 죽는다는, 그 결의에 찬 음성을 들은 청명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임소병을 보았다.
“……역시 사파 놈이네. 자질이 달라.”
모두가 그 말에 내심 동의하고 말았다.
“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청명이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시작하자고. 진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말이야. 낄낄낄낄낄.”
그 미소를 본 이들은 진지하게 탈맹을 고려해야 했다. 매우 진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