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93화 (1,094/1,567)

1093화. 말이 좀 과하긴 했지. (3)

“끄으으으응…….”

청명이 처마 위에서 구슬프게 몸을 비틀었다. 등을 타고 연신 좁쌀 같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말을…….”

- 줴금 애이드뤼 워리보다 냬으니깨요오.

“카아아아악! 시끄러워!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 양심.

“끄응.”

청명이 한숨을 푹 내쉰다.

“말이 좀 과하긴 했지.”

분위기에 취했다. 옛날 같았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각하면 어이없지 않은가. 저 병아리 같은 것들을 감히 위대했던 그 ‘대화산파’에 가져다 대다니. 소림도 ‘능력 없는 민머리 사교 부흥회’ 정도로 취급하던 옛날 청자 배들이 들었다면 눈알을 까뒤집고, 후손이고 나발이고 다 패 버리겠다고 날뛸 소리다.

“……생각해 보니 그 새끼들 답도 없었네.”

그러니 전 중원이 외면했지. 미친놈들.

-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다른 놈도 아니라 네가?

“오늘따라 말이 기시네. 아, 꼬우면 되살아나 보시든가.”

청명이 헹, 코웃음을 치고는 처마에 다시 풀썩 드러누웠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

매화검존과 지금의 청명이 동일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말을 듣고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가장 선두에서 칼 물고 달려올 인간은 다름 아닌 청명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냥 두자는 청진이 놈을 후려 까서 기절시키고 옆구리에 낀 채 달려오고 있었겠지.

“……나도 혈기가 과했어……. 어렸지, 어렸어.”

예전의 청명은 당대의 화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강호는 능력 있는 이들이 우대받아야 하는 곳이고, 화산은 그 어떤 문파보다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모자란 것들은 쓸데없이 입 털지 말고 시키는 대로 따라오기나 해야 한다는 게 청명의 생각이었다.

그런 관점으로 보았을 때, 당대의 화산은 분명 그럴 자격이 있는 문파였다. 어떤 문파보다 강했고, 어떤 문파보다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던 거지.’

청명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따지고 보면 청명은 단 한 번도 약자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대를 호령하던 화산이라는 문파, 그 내에서도 청명은 압도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심지어 아직 나이가 어릴 때조차 청명만은 특별대우를 받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청명이 화산의 제자로서 베풀었던 협의는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저 강자는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고 배운 것을 의심 없이 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나락이라 불러야 할 위치까지 떨어져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면서 알게 됐다. 세상은 강함과 약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강자들이지만, 약자들에게도 나름의 의지와 생각이 있다. 그저 약하다고 해서 그들의 방식이 모두 무시되고 폄하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내가 옛날의 매화검존을 봤으면 패 죽였다.’

뭐, 물론 실력 차와 성질머리를 감안하면 패 죽이긴커녕, 죽기 직전까지 처맞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절대 고운 눈으로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새끼보다 더 인생을 막장으로 산 놈도 찾아보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 그때 청명에게 두들겨 맞았던 놈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개차반이나 다름없는 놈이 거슬린다고 다 두들겨 패고 다니는데, 하필 그때 제일 깡패 같던 문파인 화산 놈이라 항의도 못 하고…….

굳이 예를 들자면, 혜연이 놈이 소림에 있으면서 예전 청명처럼 날뛰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만일 혜연이 그랬다면 청명이 어떻게 했을까?

‘민머리에 머리카락이 돋아날 때까지 패 버리려고 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매화검존과 화산을 감당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니 눈물을 머금고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미안함이 막 솟구치…….

- 종남도?

“아, 종남 새끼들은 빼야지!”

그 새끼들은 더 맞아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청명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하기에 이끄는 것이 당연하고, 강하기에 하고픈 대로 해도 된다는 논리를 긍정한다면, 저 마교 놈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도 일정 이상은 변호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걸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당연히 과거의 화산에 대한 생각 역시 달리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니 꼴받네.”

청명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옛날 그놈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 소림 새끼들이랑 별다를 것도 없었단 거잖아.”

- 야, 이 새끼야. 그 정도는 아니지.

“아, 조용히 하시라고. 어디 죄인이.”

청명이 먼 하늘을 향해 삿대질했다.

물론 청문의 입장에선 억울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화산은 위에 선 자의 책임은 확실히 지는 문파였으니까. 화산은 언제 어디서고 가장 많은 피를 흘렸고, 언제 어디서고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한 발 뒤에서 뒷짐 지고 턱짓이나 해 대고 있는 지금의 소림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문파는 아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그래서 이제 와 저 소림 새끼들이 열심히 싸우면 좋은 눈으로 봐 줄 거냐고?”

- 그건 아니지.

“거봐요.”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놈들은 소림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청명은 소림 놈들이 왜 저러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소림의 입장에서는 역사도 가장 깊고, 전력도 가장 우월하고, 고수 역시 다수 보유한 자신들이 강호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름 다 깊은 생각이 있어서 시행하는 일들인데, 소림의 반의반도 안 되는 문파들이 자기는 생각이 다르다고 사사건건 삿대질해 대는 짓거리가 어처구니가 없겠지.

소림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궁 새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매화도로 돌진해서 전멸할 위기에 처한, 세상에서 제일 병신 같은 문파에 불과하…….

“어? 이건 맞는 말 아닌가?”

청명이 슬쩍 시선을 내려 저 멀리 있는 남궁도위를 보았다.

아니…… 그냥 더 냉정하게 보자면, 남궁황이 있는 거 다 들고 장강에 투신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건으로 소림한테 욕하는 건 인간적으로 좀 선 넘은…….

“크, 크흠. 여하튼.”

그리고 소림의 시선으로 볼 때, 화산이나 당가는 잘 뭉쳐 있던 중원에 분란을 획책하고, 멀쩡한 중원에 새외 세력을 끌어들이고 있는 정신 나간 문파에 불과할 것이다.

심지어 사파 놈들이 대놓고 발호를 하고 있는데도 같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답답하면 니들이 우리 밑으로 기어들어 오시든지?’ 하고 어깃장이나 놓는 천하의 개쌍놈들일 거고……. 심지어 방장이 직접 고개를 숙이러 왔는데도 말이다.

“와…….”

청명이 떨리는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꾸로 대입하니까 다 풀리는데요, 장문사형?”

- 나는 안 그랬다고, 이 새끼야!

“누가 뭐랬나? 괜히 찔려서는.”

청명이 피식 웃어 버렸다.

청명은 알고 있다. 저 소림의 모든 행위는 ‘우월감’이라는 세 글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소림은 분명 강호를 대표하는 위치에 다시 서는 순간, 과거의 화산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앞에서 용맹하게 싸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이득이 아니라 강호를 수호하는 문파 ‘소림’의 입지니까. 그건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없는 호칭이라는 것을 모를 법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거야. 멍청아.”

이제는 청명도 안다. 이미 그는 겪어 봤으니까.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런 행위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한때 세상을 호령했지만, 이제는 잊혀 버린 수많은 문파와 다를 바 없는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장문사형, 나는요…….”

청명이 밤하늘을 바라본다.

숱한 별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과거의 사형제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화산이 좋았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예전의 화산을 그리워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화산도 그때의 화산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그 어떤 문파보다 우월하고, 그 어떤 문파보다 훌륭한 문파로.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욕심이었던 거죠.”

그게 잘못된 길이란 걸, 이제는 안다.

이미 그들은 한 번 실패했다. 더 큰 실패가 무엇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그럼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정해져 있는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결과를 바꾸고 싶다면 과정 역시 달라져야 한다.

홀로 뛰어났던 화산은 실패했다. 그리고 홀로 뛰어나려 애쓰는 문파가 어떤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지, 지금 청명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도, 화산도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청명도 이해하니까.

강하지 못한 문파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강하지 못한 무인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강자의 뒤에서 그들의 등을 받치며 싸우는 이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부족하기에 무시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하다 해도 그들의 노력과 생각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저기 있지 않은가? 그 증거와도 같은 이들이.

청명이 고개를 돌려 백천과 그 무리를 보았다. 저들끼리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지 얼굴들이 사뭇 진지했다. 청명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꼬맹이들이 뭐가 저리 심각한지.’

만약 저들이 예전의 화산에 입문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들이 청명과 같은 과거의 청자 배나, 그 후대인 명자 배로 입문했다면?

아마 저 아이들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그런 제자로 잊히거나, 결국은 화산에서 버티지 못해 떠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저 아이들은 당당한 화산의 일원이자, 화산의 미래로 성장했다.

마찬가지다. 부족하다 해서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강하지 못하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강하지만 포용하지 못하는 문파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과거의 화산과 지금의 소림이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화산은 달라야 한다.

과거만큼 강하지 않아도, 그때처럼 확고하게 이끌지 못해도 괜찮다. 화산의 부족함을 채워 줄 이들은 너무도 많으니까.

그렇기에 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같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까?’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쉽게 이야기했지만,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지금의 화산을 과거의 화산처럼 강하게 만드는 것보다 배는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청명은 눈을 뜨고 아래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화산과 소림, 남궁세가와 녹림.

전혀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이들이 서로에게 언성을 높여 대며 툭탁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 모습을 엉망진창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저 모습을 잡탕이라 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 광경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 희망.

“…….”

- 아닙니까, 도사 형님?

청명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켰다.

“바빠지겠구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마교는 너무도 강대하고, 정파는 삐걱대고 있다. 거기에 천하의 안위보다 제 욕망을 우선하는 괴물 같은 놈이 호시탐탐 강 너머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나는 해낼 테니까.”

왜냐면 이제 나는 ‘내’가 아니라 ‘우리’니까.

씨익 웃은 청명이 손에 든 술병을 꽉 움켜잡고는 처마 아래로 뛰어내렸다.

“작작 싸워라, 이 새끼들아!”

“뭐래?”

“싸우는 거 아니거든?”

청명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이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요란한 대화는 달이 한참 넘어가도록 그렇게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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