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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92화 (1,093/1,567)

1092화. 말이 좀 과하긴 했지. (2)

“뭐? 강호일통?”

“뭐라는 거야?”

비난과 힐난 뒤섞인 눈빛이 쏟아지자 임소병이 혀를 찼다.

“쯧쯧쯧.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쪽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정신머리가 없으신 것 같은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남궁도위는 식은땀을 흘리느라 등허리가 축축할 지경이었다.

‘진짜 저래도 되는 건가?’

그래도 중원의 모든 산을 지배한다는 녹림왕이다.

물론 녹림왕이 생각보다는 좀 젊고, 병약하고, 조금…… 어…… 그래, 조금 철딱서니 없어 보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녹림왕은 녹림왕이다. 원래대로라면 화산의 일개 제자가 저렇게 막말해도 될 사람이 아닐 텐데…….

“쯔읏!”

아니나 다를까 임소병이 불편한 기색을 팍팍 풍기며 길게 혀를 찼다. 그 반응에 긴장한 남궁도위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래서 못 배운 양반들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 된다니까! 도장들이 뭘 알겠소. 사서삼경이 뭔지도 모르고, 도경이나 읽어 대던 양반들이 고매한 유학자의 뜻을 짐작이나 하시겠소?”

“고매한 유학자아아?”

“이래서 공자께서 군자불어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이라 하신 거지요. 사특한 도가와 말을 섞는 것이 아닌데.”

백천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그게 산적이 할 소리요?”

“후후. 공자께서는 구사(九思)와 구용(九容)을 지키면 군자라 하셨으니, 한낱 출신 성분이 무슨 상관이겠소. 제 말을 반박하고 싶으시면 최소 삼경은 떼고 오시지요.”

그 말을 들은 백천이 코웃음을 쳤다.

“녹림왕께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예?”

“삼경(三經)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은 도가의 필독서요.”

“……진짜?”

“쯧쯧. 이래서 사파란. 산에서 막 자란 사파 놈이 고매한 도가의 뜻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결국 남궁도위의 고개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는 더 이상 이 정신 나간 대화를 해석하는 걸 포기했다.

“여하튼!”

임소병이 언제 풀 죽었냐는 듯 분위기를 환기하며 부채를 쫙 펼쳐 들었다.

“맹주님과 청명 도장이 나눈 대화는 간단한 겁니다. 앞으로 마교를 상대함에 있어서 천우맹의 근본을 꺾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천우맹의 근본이 뭡니까?”

“그야…….”

백천이 슬쩍 제 사질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들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백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결국 대답은 그의 몫이었다.

“내 확실히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믿을 수 있는 친우와 함께한다는 것 아니겠소?”

“정확합니다.”

“……오, 진짜요?”

“…….”

임소병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자 백천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정확하긴 한데, 거기에 하나를 추가해야지요. 천우맹의 가장 유별난 점은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백천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금 천우맹이 정사지간의 문파로도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다.

“애초에 천우맹은 시작부터 그러했습니다. 사실 강호에서야 명문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은연중에 사천당가를 경원시하는 이들이 있던 것도 사실 아닙니까?”

“어떤 새끼가 그래?”

“……소소야, 욕하는 거 아니니 진정해라.”

“빡치잖아요.”

“워워. 자, 착하지.”

백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소소가 이를 갈아붙이기는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천당가는 분명 명문이고, 강대한 힘을 가진 가문이다. 그들이 명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과 암기를 사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강호에서는 은근히 당가를 비겁하다 여기고, 차라리 사파에 가깝다고 경원시하는 경향 역시 분명 존재했다.

차마 당가인들 앞에서 그 말을 대놓고 할 수 없을 뿐.

“강호뿐만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사천은 중원에서도 천시당하는 땅이었죠.”

“……뭐 그거야…….”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야수궁과 북해는 어떻습니까? 새외오궁이니 뭐니 하며 묶어 부르지만 사실 그들 간의 거리는 중원과 그들의 거리보다 배는 더 멉니다. 애초에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거죠. 그걸 엮어 부르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

“중원인이 아닌 이들.”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 역시 틀리지 않다. 결국 새외오궁이라는 호칭에는 중원인이 아닌 이들에 대한 멸시가 녹아 있다.

“그러니까 천우맹의 시작은 중원에서 버림받은 화산이라는 문파를 중심으로 경원시되는 문파와 천대받는 문파가 모인 잡탕……. 아, 아니. 유이설 도장. 그, 그 검은 내려놓으시고. 제가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유이설은 아예 반쯤 검을 뽑은 채로 임소병을 노려보았다.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이.

“심지어는 거기에 녹림 같은 허접쓰레기 같은 사파 놈들까지 끼어들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유이설이 뽑던 검을 밀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임소병이었지만, 뭘 어쩌겠는가. 저 칼귀신은 무서운데.

“그러니 천우맹의 정체성은 뭐겠습니까? 정파, 외도, 외세, 사파, 도가, 속가에……. 어이쿠. 여기 파계승도 계시고. 불가로 쳐줘도 되나?”

“누가 파곕니까, 누가!”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을 다 모아서 정체성이고 나발이고 ‘우리는 다 친구다’ 하고 냅다 부어서 휘휘 저어 버린 것이죠. 그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엉망진창.”

“멸망.”

“잡탕찌개.”

“아니죠. 아니죠.”

임소병이 씨익 웃었다.

“세상은 그걸 천하라 부릅니다.”

“천하…….”

백천이 되뇌었다. 임소병은 부채로 목덜미를 탁탁 쳤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천우맹은 무엇이든 다 포용합니다. 신뢰라는 두 글자만 충족할 수 있다면 출신과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말은 누구라도 천우맹에 소속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산적 놈까지 받았는데.”

“그러게요.”

“내 말이.”

임소병이 상처받은 얼굴로 백천을 보았다. 하지만 백천은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산적 놈아?’라는 말을 얼굴로 해 대는 신기를 보여 주며 녹림왕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그러니 천우맹은 굳이 세력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안에 모든 것을 포용해 버리면 되는 거죠.”

“아니 말은 쉬운데…….”

“그리고 천우맹이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닙니다. 천우맹은 가장 다양한 이들을 섞어 낸 세력이지만, 그 결속력은 오히려 세 세력 중 가장 강하지 않습니까?”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사분오열 직전인 구파일방은 논할 가치도 없다.

결집력이라는 말을 좀 넓게 해석해서 장일소가 가진 존재감에 억눌려 있는 이들까지 평가한다면 사패련을 높이 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상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 세력 중 가장 강하게 결집되어 있는 곳은 누가 뭐라 해도 천우맹일 것이다.

“여긴 정신 나간 곳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마교가 쳐들어왔다지만, 지금 천하에서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인 화산과 소림의 제자들이 힘을 합치고, 거기에 오대세가의 필두였던 남궁이 힘을 더합니다. 심지어는 저도, 녹림왕인 저도 끌려왔죠.”

“…….”

“천우맹의 수좌, 구파일방의 수좌, 오대세가의 수좌, 그리고 녹림의 왕. 이게 본디 한데 섞일 수 있는 조합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겠죠.”

백천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은 너무 자연스러워 잊고 있었는데,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 모든 이들이 그리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거라면, 강호인들이 뭐 하러 정파와 사파, 명문과 중소 문파를 구분하고 철저하게 서로를 배격해 댔겠는가?

심지어는 같은 정파 내에서도 그 형태에 따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나뉘고 서로 은연중에 견제해 대는 판인데.

“하지만 천우맹에서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니 천우맹은 굳이 다른 곳의 생각에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저 천우맹의 안으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그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뭐, 뭘 의미하는 건데요?”

“굳이 천하의 구성원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세를 불려 나가기만 해도 천우맹이 바로 그 천하가 될 테니까요. 구파일방이든 사패련이든 그냥 집어삼켜 버리면 됩니다. 누더기처럼 억지로 연합하는 게 아니라 천우맹 아래로 밀어 넣는 거죠.”

“…….”

“후후후후. 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야망이 큰 사내였을 줄이야. 못 당하겠다니까, 역시. 후후후후.”

임소병의 눈이 처마 위에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의 말이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유이설이 입을 열었다.

“전과 다르다는 것.”

“……음?”

백천이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백천이 아닌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은 실패했어요. 철저하게.”

“…….”

“이전에는 그게 배은망덕한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아니야. 화산이 실패했던 이유는, 혼자였으니까.”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청명이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달라질 거예요. 이제 화산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이전만큼 강하지 않아도, 같이 싸워 주고 서로 지켜 줄 이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할 수 있으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툴지만, 이 말이 그들에게는 훨씬 와 닿았다.

“그렇죠. 이전에 화산이 혼자였다면, 그 연합 내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당가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도와줄 테니까.”

“당가뿐만이 아니지. 그러면 연합을 한다 해서 우리가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거잖아. 지금 화산은 단순한 하나의 문파가 아니라, 천우맹을 대표하는 곳이니까.”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숙제가 많아지는군.’

예전 같았으면 청명이 놈은 뒤의 모든 사람이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풀어 주었을 것이다.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면서도 어떻게든 이해를 시키고 가는 게 청명이란 놈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저 화두를 툭 하니 던져 놓고는 발을 빼 버린다. 마치 결정한 대로 따라오지 말고, 그들 스스로 생각하라는 듯이.

“다들 각자 해석은 다르겠지.”

“…….”

“하지만 그게 맞는 거라고 본다. 애초에 연합이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그 생각을 조율하는 곳이니까.”

“예, 사숙.”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매가 한 말도 맞고, 녹림왕이 한 말도 뭐…… 맞을 확률이 조금은 있겠지.”

“……거, 취급이 너무 다른 것 같은데.”

백천이 임소병의 말을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장문인과 청명이 놈이 나눈 대화의 핵심은 그저 천우맹 그 자체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곳이 천우맹이다. 그런 곳이 강호를 지키겠답시고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건 우리가 천우맹을 만든 이유를 근본부터 거스르는 거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힘든 길일 것이다. 청명이 놈은 지금 천하를 마교의 마수에서 지켜 내는 동시에, 지키고자 하는 이들 모두를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니까. 가시밭길이겠지. 그러니…….”

백천이 고개를 들어 다시 청명을 바라본다.

머리 위로 뜬 보름달이 청명을 은은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우리가 돕자꾸나. 우리 역시 저놈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이니까.”

“예, 사숙.”

“예, 사형.”

청명을 바라보는 백천의 입가에 가만히 미소가 어렸다.

굳이 모두의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서로를 믿는 것, 서로를 지키려 하는 것.

그것이 연합이고, 그것이 맹이고, 그것이 문파고.

그래. 그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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