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화. 말이 좀 과하긴 했지. (1)
커다란 전각의 처마 끝. 한 손에 술병을 든 청명이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오검이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환자가 술을 먹는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당소소도 지금만큼은 달려가지 못하고 그 모습을 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글쎄.”
당소소의 물음에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잖느냐.”
“……그렇긴 하지요.”
윤종과 조걸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을 바라보는 화산 제자들의 눈빛은 꽤 복잡했다.
“사형.”
“왜?”
“청명이 놈은 대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걸까요?”
윤종이 대답하지 않자 조걸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청명이 놈이 과거 마교에 원한이 있던 곳 출신이라면…… 마교에 대해 어느 정도 자세히 아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조걸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슬쩍 입을 다물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것 치고도 너무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였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청명의 과거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들이 암묵적으로 금기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고 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은연중에 모두가 그 언급을 피하게 되었다. 꺼내면 서로가 불편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조걸이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마교의 이주교를 보았을 때 청명이 보였던 반응 때문이었다.
‘아는 눈치였어.’
가정할 만한 상황은 넘쳐난다.
예를 들어 청명의 선조가 화산의 사람인데, 십만대산에서 벌어질 천마와의 전투 직전에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난 이라든가.
그렇기에 과거 화산의 무학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차마 그 죄스러움에 화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든가. 그래, 유이설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망해서 몰락해 가는 거대 문파. 그에 얽힌, 사연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렇기에 지금껏 모두 청명의 과거를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니 조걸은 조금 다른 생각에 닿게 된 것이다.
‘설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백 년 전 주교를 알아볼 수 있을까? 과거를 전하는 이가 정말, 백 년 전 주교들의 생김새까지 세세하게 전하려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청명이 가진 마교에 대한 지식은 그저 전해 들었다는 말로 설명될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하면?”
“……예?”
그 순간 윤종이 어두운 눈으로 조걸을 돌아보았다.
“왜? 이제 와 청명이 놈을 의심이라도 하려고?”
“아, 아니, 그건…….”
윤종이 눈살을 찌푸리며 딱 잘라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그걸 어떻게 알고 있건 간에, 청명이 놈은 우리를 돕기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해 왔다.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건 저도 알죠…….”
조걸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윤종의 저 말은 부정할 수도 없고, 조걸 역시 부정할 마음 따윈 없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저놈에게 얻어맞아 천장에 꽂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돌이켜보면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때만 해도 화산이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생각해 보면 다 저놈이 화산에 들어와서 벌어진 일들이네요.”
“응?”
“그렇잖습니까. 저놈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강호의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기나 했겠습니까?”
가만 되새겨 보던 윤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분명 청명이 아니었다면, 조걸은 제 가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윤종은 사람이 떠난 화산을 쓸쓸히 지켰을 것이다. 유이설이야 어떻게든 화산에 남았겠지만, 당소소가 화산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백천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화산이라는 문파가 망해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제 갈 길을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
“다 저놈이 뜬금없이 화산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던 일 아닙니까.”
“……그렇지.”
나직이 대답한 윤종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때 청명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청명은 어떻게든 화산을 과거처럼 대단한 문파로 만들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 망해 자빠진 문파로 걸어 들어오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도무지 모르겠네.”
조걸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던 바로 그때였다.
윤종이 매우 떨떠름한 시선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사숙.”
“응?”
“……제가 조걸이 놈보고 입 다물라고 해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지금 제가 좀 그럴싸한…… 아니, 그럴싸하다기보다는 좀 그런…… 여하튼 생각을 하나 해 봤거든요.”
윤종답지 않게 서두가 길고 어투가 기묘했다.
“대체 뭔데 그러느냐?”
“그…… 청명이 놈 말입니다.”
백천의 눈가가 슬며시 굳어졌다. 이미 한번 묻은 이야기를 굳이 또 다시 꺼내려 하니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그…… 저희가 지금 청명이 놈을 조금 의심……. 아니, 애매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저놈이 과거의 마교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렇…지?”
“백 년 전의 전쟁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윤종이 살짝 침묵하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호, 혹시 뭐.”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니 윤종은 슬쩍 불안하게 청명을 곁눈질하고는 입을 뗐다.
“저……. 청명이 놈…….”
그러다 눈을 질끈 감고는 에라 모르겠다 질러 버렸다.
“마, 마교 출신 아닐까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백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곁에 서 있던 이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백천은 황망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 아니……. 아니…… 이 자식아.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설득력이…… 있어!”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엥?”
백천이 벙 찐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매와 사질들이 모두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파보다는 마교가 어울리는 놈이기는 했죠.”
“……그러면 저 마교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도 이해가 되고.”
“성격도.”
“맞아요, 사고! 성격도!”
“아, 아니…….”
백천의 단정한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무척 그럴싸한……. 아니! 이런 빌어 처먹을! 그럴싸하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청명이 놈보다 마교를 싫어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저놈의 마교 혐오증은 의원의 진료와 상담을 요하는 수준이란 말이다.”
“보십쇼, 사숙.”
그때 조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사숙이 아무래도 곱게 자라서 모르시는 모양인데.”
“그 말을 네가 하니까 좀 띠껍다?”
“……그건 넘어가시고.”
조걸이 건방지게도 턱짓으로 백천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숙이 제일 싫어하는 문파가 어딥니까?”
“종남.”
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조걸은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이 본래 어디 출신이죠?”
“……종남.”
“더 할 말 있습니까?”
와……. 이거 반박이 안 되네.
“원래 돌아선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저 새끼가 마교도였다가 마교에 빡쳐서 탈주한 놈이라면 다 이해가 되는 거죠. 저 지랄 맞은 성격 하며, 말도 안 되는 무공 하며.”
조걸의 말을 듣던 윤종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다른 놈이면 몰라도 저 새끼라면, 내가 마교가 싫으니까 마교가 제일 싫어하는 화산에 가서 화산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 저놈이라면 말이죠.”
백천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당장 백천만 해도 진금룡과 종남에 꼴받아서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화산으로 돌진해 버린 역사가 있지 않던가? 이게 가능성이 있는 말이건, 없는 말이건, 백천만은 그럴 리 없다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괜히 여기서 그럴 리 없다고 한마디를 얹었다가는 ‘어이쿠? 그래서 그런 마교도 새끼도 안 할 짓을 직접 하신 분이 누구시더라?’ 하는 소리나 듣고 집중포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개소리는 그 정도로 하고.”
“가능성이 있다니까요?”
“있는 게 아니라 높아.”
“확정.”
백천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제는 이 새끼들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을 정도다.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말해야 할 일이면 말해 주겠지. 너희도 알잖느냐. 청명이 놈은 필요하지 않은 건 굳이 말해 주지 않지만, 필요한 것은 반드시 말해 주는 놈이라는 걸.”
“그렇긴 하죠.”
“놈은 마교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너희도 알지?”
“……예.”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만약 그들이 삼 년 전에 마교의 진정한 힘을 알아 버렸다면, 마음이 꺾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교와 자신들의 격차 앞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인데,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청명은 여전히 술병을 쥔 채 달만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슬쩍 본 백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놈이 생각하기에 이제는 우리가 그 모든 사실을 알아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했다는 의미겠지.”
“…….”
“그러니 조금 더 기다리자꾸나. 우리가 알아야 할 상황이 온다면 놈은 반드시 말해 줄 테니까.”
“예, 사숙.”
윤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모두를 슬쩍 살피고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보다…… 저…… 솔직히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무슨 생각?”
“아까 장문인과 청명이 한 대화를 사숙은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백천은 대답이 없었다. 윤종이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잘나가다가 애매하게 끝난 것처럼 느껴져서……. 결론이 어떻게 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하셨다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어……. 그게…….”
백천의 얼굴이 영 떨떠름했다.
사실 그 역시 마지막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우맹이 해 오던 대로 하면 된다’라는 게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명확하질 않았다.
“솔직히 나도 잘…….”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오, 씨! 깜짝이야!”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어느새 나타난 임소병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고 있었다.
“후후후후후.”
“…….”
“후후후후후.”
임소병은 부채를 쫙 펼쳐 제 입을 반쯤 가리고는 기분 나쁘게 웃어 댔다.
“……왜 이러시는 건데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죄송합니다. 생각하니 유쾌해져서.”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며 본론을 꺼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화산검협, 그러니까 청명 도장께서는 천우맹으로 강호를 일통하겠다고 선언하신 것뿐입니다.”
“아아, 그런 거였……. 뭐, 이 미친놈아?”
백천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