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0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5)
이들이 느낄 공포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청명은 누구보다도 더 절절히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한차례 겪은 일이니까.
마교가 중원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그 전력의 강대함과 그들의 목적을 머리로 이해하는 순간, 화산을 사로잡은 것은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과 압박감이었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중원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그리고 그 책임을 화산 역시 나눠 져야 한다는 압박감. 그 무게에 시달리던 화산은 결국 제 발로 달려가 희생을 자처했다.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중원은 천마를 무찌르고 마교를 막아 냈으니까. 하지만…….
‘장문사형.’
청명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청문에게 묻는다.
‘사형은 여전히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습니까?’
굳이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 청문이 흘리고 있는 저 눈물이 그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으니까.
만약 선계라는 것이 정말 있어서 청문이 몰락하는 화산과 그 후예들이 겪는 치욕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면?
아마 청문에게 있어서 그곳은 선계가 아니라 무간지옥이라 불려야 마땅할 테다. 차라리 지옥불에 타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느낄 광경을 지켜보게 하는 곳이 어찌 선계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제는 그 길을 현종이 걷고 있다.
청명이 눈을 떠 현종을 바라본다. 앞에 앉은 현종의 얼굴에 청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장문인.”
“……말하거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알긴 아는구나, 이놈.”
청명의 그 한마디가 무겁기 짝이 없던 분위기를 아주 조금이나마 풀었다.
청명은 늘 그랬다. 모두가 말릴 때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로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진으로 뛰어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 현종을 말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제자,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화산은 어째서 대의를 지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면서도 무너졌는가.”
“…….”
“어째서 옳은 일을 했음에도 피눈물을 흘려야 했는가.”
현종이 눈을 살짝 감았다. 사실 저 의문은 지금의 화산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풀 수 없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협의를 지키라 배운다. 하지만 그 협의를 지킨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배운 것과 몸으로 겪은 것의 괴리. 그 괴리가 때때로 그들이 걷는 길을 의심하게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지켜 내는 일이라면 이곳의 모두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알고 있다. 지금 그들이 하려 하는 일은 가장 지키고 싶은 이들마저 함께 희생이라는 굴레에 밀어 넣는 짓이라는 것을.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대가가 가장 지키려 했던 이들의 희생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말 웃으며 죽을 수 있을까?
함께 수련하고,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모조리 죽어 간 그 참혹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본 이가 중원의 멸망을 막아 냈다는 기쁨을 느끼며 웃으며 죽어 갈 수 있을까?
지금 청명은 화산의 제자들이 은연중에 언급하지 않으려 해 왔던 그 사실을 끄집어 올린 것이다.
“……생각을 해 보았느냐?”
“예.”
“그래서…… 그 답은 찾았느냐?”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찾지 못했습니다, 장문인.”
“…….”
“그저 바랄 뿐이었지요. 우리가 더 강해지기를. 그리고 저들이 과거보다 나약하기를.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일을 반복해도 이전과 같은 참혹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를 말입니다.”
현종이 눈을 감았다.
공허하고도 허무한 대답이다. 하나 현종 역시 청명과 다를 바 없었다. 협의와 대의라는 허울을 놓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저 바라 왔을 뿐이다. 그 이상이 언젠가 자신들의 목을 겨눌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말이다.
“그렇기에 마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이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
현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두 눈으로 마교의 힘을 확인한 청명이 느꼈을 암담함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 눈빛에서 똑똑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했겠구나.”
“예.”
청명이 담담히 대답했다. 너무도 담담해서 오히려 쓰라렸다.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어째서 이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항상 제 안에만 담아 두는 것일까?
그 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조금만 더 풀어내 준다면 어떻게든 힘이 되어 줄 터인데. 아니…… 힘이 될 수는 없다고 해도 최대한 노력이라도 해 줄 텐데 말이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싸웠습니다. 싸우지 않는 것보다는 싸우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
“하지만 싸우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왜 화산이 실패했는지 말입니다.”
현종이 멍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째서더냐?”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았다?”
“예.”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문은 분명 대단한 이였다. 무학의 강함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강함을 논한다면 청명의 평생을 통틀어도 비견할 대상 자체가 없을 정도다. 지금은 청명이 인정한 사람인 현종조차도 청문에 가져다 댄다면 그저 유약한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화산은 너무도 강했고, 화산을 이끄는 이는 너무도 훌륭했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그렇기에 화산은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믿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화산이 어째서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져야 했던 것인지를.
청문은 항상 그에게 홀로 나서지 말고 제 사형제들을 돌보라 했다. 홀로 나아가지 말고 그 뛰어남으로 부족한 이들을 이끌라 했다. 그게 청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청명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쩌면 이건 그가 그 긴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방식은 틀렸습니다.”
말을 내뱉는 순간 혀가 쓰라려 왔다. 청문을 부정한다는 건 청명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청명은 그 쓰디쓴 일을 해야 했다.
과거에 남겨진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화산이 선두에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뒤를 받쳐 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명이 선두에서 싸울 수 있었던 건, 그를 받쳐 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산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청명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한다고 여겼다.
“만약 화산이 조금이나마 뒤에서 싸우는 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면…….”
만약 청명이 조금이나마 뒤에서 싸우던 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두를 잃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말한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대의 화산은 분명 강인하고 위대한 문파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만하고 독선적인 문파이기도 했다. 화산이 추구하는 옳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청문은 늘 화합하지 못하는 청명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런 청문을 수장으로 둔 화산 역시 청명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문파였을지 모른다. 청문이 말하는 화합은 그저 문파 내의 화합일 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청명은 청문이 무조건 옳다 여겼다.
청문은 항상 옳은 사람이고 청명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자강과 싸우며 알게 되었다.
그의 등 뒤에는 당보가 있었지만, 화산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청명이 그토록 태산처럼 여기던 청문 역시 완벽한 이는 아니었다. 그 역시 사는 내내 고뇌를 거듭했던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청명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던 청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본다. 너무도 따뜻했지만, 또한 무겁고도 짙었던 그림자를 벗어난 것이다.
“장문인.”
“그래……. 그래, 청명아.”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면 자신이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도 잊게 됩니다.”
“…….”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현종이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라…….
대의? 협의? 아니면……. 무력?
현종이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 자리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더는 생각할 것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화산이 가진 것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귀하고 중한 것을 말하라 한다면 오직 하나.”
현종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사람이구나.”
청명이 그 말에 마주 웃었다. 그가 현종에게 바랐던 말이 고스란히 나온 것이다.
“과거와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산뿐 아니라 화산과 함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현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명이 온 후, 화산은 수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관계일 것이고, 유대일 것이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패련의 힘에 짓눌렸을 때, 제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그저 제 힘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지요.”
“그래, 그랬지.”
“원래라면 천우맹은 그때 무너졌어야 합니다. 제 힘을 키우기 위해 책임을 모두 내팽개치고 물러난 이를 누가 기다리려 하겠습니까. 하지만…… 당가주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마저 짊어지고 묵묵히 저희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청명이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당군악이 난처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가주님.”
“이유가 딱히 있겠는가. 그저…….”
당군악에게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겸연쩍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진심만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친우이기 때문이지.”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쑥스럽다는 듯, 당군악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청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때.
과거 그들이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을 잃었던 그때.
화산에 당가 같은 문파가 있었다면, 청명에게 있어서 당보 같은 이가 화산에도 있었다면, 그들은 정말 화산의 몰락을 지켜보기만 했을까? 승냥이 떼가 화산으로 몰려가는 것을 좌시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당보라면 제 목숨을 걸고라도 막았을 것이다. 지금의 당가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화산의 산문에 그들이 발을 들이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화산에는 있고, 그때의 화산은 가지지 못했던 것.
“장문인…….”
이건 화산의 제자인 청명이 장문인 현종에게 건네는 말이자, 매화검존 청명이 과거의 청문에게 건네는 말이다.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흔들리는 검수가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의 검과 자신이 해 온 수련의 시간입니다.”
“……그렇지.”
“그러면 문파는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그야…….”
현종이 다시 한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온화한 눈빛으로 청명을 보며 대답했다.
“스스로 지켜 온 것의 가치와……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이다.”
“예, 장문인.”
청명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천우맹을 만든 이유는 서로 믿고 싸울 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보루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그러니, 장문인.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실 때는 장문인께서, 화산이 지켜 온 것을 돌이켜 보십시오. 모든 해답은 그 안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개를 숙인 청명을 현종이 가만히 바라본다.
그들이 해 온 것. 그들이 지켜 온 것.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청명은 눈을 감았다.
‘장문사형.’
어둠 속에선 청문이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청문의 얼굴은 더 이상 고통에 차 있지 않다.
‘걱정 마세요. 지금 아이들이 우리보다 나으니까요.’
그 순간, 그를 바라보는 청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청명은 오래도록 눈을 감은 채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