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9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4)
침묵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말 자체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반쯤은 농처럼, 반쯤은 흘리는 말로 그동안 제법 들어 왔던 이야기니까. 하지만 같은 말이라 해도 언제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무게는 천차만별로 달라지지 않던가.
‘멸망’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커다란 무게에 몸이 짓눌리는 것만 같다.
특히 항주의 참상을 그 두 눈으로 목격한 이들에게는 이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멸망이라…….”
백천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보았다. 중원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칭해지던 항주라는 도시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그 처참한 참상을 말이다.
‘그런 일이 전 중원에서…….’
으득.
백천의 이가 절로 강하게 맞물렸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거 참.”
그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임소병이었다. 부채 끝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그의 얼굴엔 곤란하단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에는 좀 심각한 말 같은데.”
평소 습관처럼 웃음을 내걸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만일 마교가 도장의 예측대로 전력을 갖추고, 중원으로 쳐들어온다면 지금 중원의 상태로는 막아 낼 수 없다는 의미 아닙니까?”
임소병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날카롭고 서늘했다. 청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골치로군요.”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내분은 정리되기 마련이다. 아니, 정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분명 역사적으로 보자면 외적의 침입으로 내환이 정리된 경우도 있지만, 끝끝내 그 내환을 정리하지 못해서 나라 자체가 안팎으로 멸망해 버린 경우도 수없이 많다.
임소병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마교가…… 언제 발호하냐의 문제긴 하겠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건 사실이군요.”
그 말에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당연하게도 법정과 장일소의 얼굴이었다.
천하는 지금 세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법정을 중심으로 한 구파일방(九派一幇)과 장일소를 중심으로 한 사패련(邪覇聯), 그리고 화산을 중심으로 한 천우맹(天友盟).
각 세력이 자신들의 중심지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임소병은 뺨을 긁적였다. 영 마음이 껄끄러웠다.
‘차라리…….’
그래, 차라리 마교가 오 년 전에 발호했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오 년 전에는 천우맹도, 사패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만약 마교가 그때 발호했다면, 화산이든 장일소든 별수 없이 소림을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지난 오 년간 소림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오 년 전의 위상과 지금의 위상은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다. 그때의 소림은 강호의 북두로서 천하를 수호하는 문파로 여겨졌지만, 지금의 소림은 그 위상을 모두 잃고, 구파일방의 내분을 단속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그에 반해, 만인방과 화산은 어떠한가. 오 년 전과는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상을 쌓아 올렸다.
‘더불어 악감정도 같이 말이지…….’
인간의 태도를 결정하게 하는 것은 성향과 감정이다. 만약 오 년 전 법정과 청명, 장일소가 한 자리에서 만났다면 서로를 특이하다 여겼을지언정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세 사람이 같은 공간에 앉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다. 그만큼이나 서로 쌓아 온 악감정의 골이 넓고도 깊은 것이다.
‘그런 세 세력의 연합이라…….’
임소병의 입장에서는 천마의 부활이니 마교의 침공 따위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황당무계하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가 닿았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가 아는 청명은 언제나 누구보다 더 먼 곳을 보는 이였다. 웬만한 이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다고 자부하는 임소병조차 시일이 지나고 나서야 청명의 안배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흠칫흠칫 놀랐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청명아.”
현종 역시 임소병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넌지시 청명을 불렀다.
“예, 장문인.”
“내 하나 묻고 싶구나. 상황이 정말 그리 심각하다면 너는 이제부터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현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면 몰랐되,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구나. 어찌 되었든 간에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장문인.”
다른 이들도 현종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청명만은 요지부동 말이 없었다.
“네 말대로라면, 전 중원이 힘을 합쳐야 겨우 가능성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 말이 맞더냐?”
“……그럴 겁니다.”
현종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는 현기 가득한 눈으로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묻겠는데…….”
“…….”
“네 생각에는 구파일방과 사패련, 그리고 우리가 연합을 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주변의 제자들이 즉각 반응했다.
“무립니다, 장문인.”
“장일소와는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놈은 절대 안 됩니다.”
그 격렬한 반발에 현종이 놀라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운검이 모두를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장문인. 장문인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천하만민의 대의를 위해서 저 사파 놈들과도 손을 잡으려 하시는 장문인의 대의에는 저 역시 존경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운검이 단호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장일소는 협상이 가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가 항주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으음.”
운검이 아닌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젊은 혈기에 대의를 보지 못한다고 여길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운검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화산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던가.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장일소를 직접 겪은 이들에게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다.
그때 당군악도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맹주님. 구파일방과 협의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당 가주님.”
당군악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이 가장 중시하는 건 자존심과 자문의 이득입니다. 천우맹이 제안하는 연대를 저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현종은 차마 부정할 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설령 연대를 한다고 해도, 그 연대는 맹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끈끈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 신주오패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동상이몽이 되겠지요.”
듣다 보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말 역시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청명이 입을 열었다.
“아뇨.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청명아!”
“인마! 너 뭔 소리를!”
기겁한 화산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청명을 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무심한 얼굴로 현종을 응시할 뿐이었다.
“구파일방과 연합하는 것도, 장일소를 끌어들이는 것도 어쩌면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원하는 게 있다면 원하는 걸 주면 됩니다.”
청명이 단호하게 임소병의 말을 끊어 버렸다. 임소병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청명은 자리에 있는 모두를 쭉 훑어본 뒤 말을 이었다.
“명분을 원한다면 명분을.”
“…….”
“이득을 원한다면 이득을 주면 됩니다.”
현종의 눈빛이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림이 강호를 이끌어 간다는 명예를 얻기를 원한다면 천우맹의 이름으로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면 됩니다. 천우맹의 투항을 받아 냈다는 명분 하나만으로도 법정은 지금껏 그가 저질렀던 모든 일을 수습할 수 있을 테니, 얼마든지 요청에 응해 줄 겁니다.”
“그건…….”
당군악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사실 이건 무척이나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법정이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실추된 소림의 명예를 되찾는 것. 위상을 가진 천우맹이, 저 화산검협이 직접 법정의 앞에 고개를 숙인다면 지금까지의 실태(失態) 따위는 작은 흠에 불과해질 것이다.
그 법정이라면 이 정도 이득을 위해서는 부모의 원수와도 손을 잡을 사람이다.
“장일소가 실리를 원한다면 실리를 주면 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강북 진출. 그리고 사패련의 영역을 늘리는 거죠. 천우맹이 장악한 장강 유역을 장일소에게 내주고, 사천과 섬서로 이어지는 영역을 적당히 내어 주면 장일소도 못 이긴 척 제안을 받을 겁니다.”
“……끄응.”
이번에는 임소병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건 분명 장일소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성과일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를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데는 부족하지 않은 미끼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짜로 얻을 것이 있다는데 그 망할 놈이 발을 뺄 리가 없다. 저 장강 유역과 중원의 서쪽 땅을 차지하는 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니…… 원하신다면 연대는 가능합니다.”
현종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그 뒤에 진의를 숨긴다는 것을 이제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장문인.”
아니나 다를까, 청명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대의를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도는…….”
“물론 처음에는 작은 것을 내어 주면 됩니다. 하지만 한번 그런 식으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으려 든다면 결국 내가 희생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청명의 목소리에 서늘한 한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팔 한쪽.”
“…….”
“이윽고 팔다리를 모두 내어 놓고, 결국에는 그 목까지 내놓아야 할 겁니다.”
모두를 훑는 청명의 시선이 차가웠다.
“중원의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현종은 얼굴을 굳혔다. 청명이 무엇을 두고 이 말을 하는지, 그만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중원의 평화는 지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장문인……. 한 가지는 아셔야 합니다.”
청명의 목소리는 내내 칼날 같았다. 충고와 우려, 다른 이들에겐 느껴지지 않을 짙은 회한까지 담겨 있었다.
“그렇게 지켜 낸 평화로운 중원에 화산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장문인께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아니, 어쩌면 멸문조차 하지 못하고 괄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린 화산의 모습을 저승에서 지켜보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종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그럼에도 그게 장문인께서 지키고자 하시는 대의라면.”
청명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에 앉아 있는 제자들을 하나씩, 눈에 새기듯이 보았다.
“그게 화산이 가고자 하는 길이라면…….”
“…….”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세상 속에 한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문사형…….’
허벅지 위에 올려진 청명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