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2)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현종이 고개를 든 순간 화산의 제자들이 벼락처럼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눈 마주치면 죽는다.’
‘농담 아니라 진짜 죽는다.’
‘방금 내가 뭘 본거지?’
화산 제자들의 등에선 식은땀이 배어났다. 지금껏 현종이 화내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지만, 그것과 이건 ‘결’이 다르다.
‘차라리 주교가 나았지.’
‘살려 주세요!’
두 눈으로 살기를 뿜어내던 현종의 입에서 별안간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가…….”
“…….”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운검과 백천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끄으으응.”
현종이 제 머리를 벅벅 긁어 댄다. 성질 같아서는 정말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이놈들이 얼마나 큰 고생을 하고 왔는지를 생각하면 이 이상 화내기도 쉽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로, 이들이 어디 욕을 먹을 상황인가? 다른 문파 같으면 환영회를 도시가 떠나가도록 벌일 만한 위업을 달성하고 온 영웅들이다. 그런데 그런 영웅들이…….
“…….”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자들과, 그 와중에도 ‘거 꼬장이 심하시네?’라는 눈빛을 보내는 청명이 놈을 보고 있자니…….
“끄으윽…….”
뒷목이 자연히 뻣뻣해져 온다. 순간적으로 탕약을 찾으려 했는데, 그 탕약을 조제해야 할 당소소마저 구석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다. 현종은 결국 또다시 탄식했다.
“다 내 죄지. 그래, 다 내 죄로다…….”
“…….”
“다들…….”
현종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다들 몸 성히 돌아와서.”
“아니, 거 팔이라도 내리게 해 주시고 말씀을 하셔야…….”
“아, 닥치라고!”
“소소야! 침 어디 갔냐! 저 새끼 주둥아리에 침 좀 박아라!”
“넌 좀 죽어, 좀!”
화산 제자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입만 좀 덜 털었어도 혼날 게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다들 손 내려라.”
“헤헤.”
“너는 들고 있고.”
“……왜 저만요?”
“그냥 들어.”
청명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다시 팔을 미적미적 들어 올리는 움직임에 불만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은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 보며 현종은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못났구나.’
그는 천릿길을 헛되이 다녀와서 화가 난 게 아니다. 진짜 화는 이곳에서 어슬렁대고 있는 이들의 몰골을 보는 순간 치밀어 올랐다.
의복은 곳곳이 찢겨 너덜대고 있고, 심지어 말라붙은 핏물로 얼룩덜룩하다. 갈라진 의복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피딱지들은 이들이 얼마나 험한 격전을 치르고 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자랑스럽지. 물론 자랑스럽다. 이들이 왜 강남으로 갔는지 잘 안다. 이들이 지키고 온 것의 가치, 그리고 이들이 지켜 낸 협의의 중요함을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났다.
아무리 대의를 앞세웠다 해도, 자식 놈이 위험한 전장으로 가는 걸 좋아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험한 전장을 겪고 돌아오고도 좋다고 배시시 웃고 있는 놈들을 보니 순간 화가 치밀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다들…… 고맙다.”
그러자 모두가 당황하여 입을 쩍 벌렸다.
“자, 장문인!”
“아, 아니,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빌어, 이 새끼들아! 빨리 빌어!”
고개를 든 현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는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한 일을 두고 고맙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
“너희는 중원의 위기를 해결했고, 화산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아직 강호인들에게 협의가 남아 있음을 세상 만방에 알렸다.”
“장문인…….”
현종이 가라앉은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하나도 고맙지 않구나.”
“…….”
“내가 너희에게 고마운 건 하나뿐이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몸 성히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정말 고맙구나.”
화산의 제자들이 함께 고개를 숙였다.
현종이 얼마나 그들을 걱정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 안에서 싸우던 제 안위만 걱정했을 뿐, 뒤에 남겨진 이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쉬이 할 수 있던 연락조차 잊었던 거겠지.
새삼스레 죄스러운 마음이 솟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손 내려도 돼요?”
“안 돼.”
“아오, 진짜.”
청명이 구시렁댔지만, 그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귀에 닿지도 못했다.
“후우.”
현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자, 결국 옆에 있던 현영이 혀를 찼다.
“거참, 애들이 정신없이 싸우고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좀스럽게.”
“뭐, 이놈아?”
“여하튼 나이가 들수록 애가 되신다니까.”
옆에서 눈치를 보던 현상이 슬그머니 현영을 만류했다.
“장문인께서도 걱정이 되셔서 그런 것 아니냐?”
“여기서 걱정 안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애들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우선 칭찬부터 해 줘야지. 장문인이라는 분이!”
“끄, 끄응…….”
현종도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현영이 혀를 차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음부터는 기다리며 속을 끓이는 사람 생각도 좀 해 주고 그러거라. 나는 너희 장문인 숨넘어가시는 줄 알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로님.”
“꼭 그러겠습니다.”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대충 장문인도 화가 풀리신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거라. 무슨 일이 있었느냐?”
좌정한 이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대표로 말을 하라는 듯.
백천이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은…….”
강남에서 겪었던 일들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그리 짧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현종의 입에선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두가 그런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장 먼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운검.”
“예, 장문인.”
“항주에서 구해 왔다는 그 여인과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을 들은 화산 제자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실로 현종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인과 아이는 한적한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차분히 답한 운검이 부연했다.
“딱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나, 많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저희는 몰라도 평범한 여인에게는 물길을 거슬러 오는 것조차 보통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렇지, 그렇지.”
“하여, 우선은 편한 곳에서 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가의 의원들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 아이도 무사하고?”
“예, 장문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이로구나.”
그제야 현종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마교의 발호와 사패련의 일통. 강호를 혼란에 밀어 넣을 것이 분명한 이 두 가지 거대한 사건에 비한다면 겨우 생존자 두 사람의 안위 따위는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종은 그 모든 일 중, 두 사람의 안위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그 말에 현종이란 사람이 어떤 이인지가 모두 녹아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그때 당소소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걱정이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일가친척도 없이 타향에 강제로 옮겨진 상황이다 보니…….”
“그렇겠지. 당연히 그러하겠지.”
현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현영을 돌아보았다.
“현영.”
“예, 장문인.”
“그분과 아이가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정착할 만한 곳을 알아보도록 해라. 화음이면 화음, 이곳이면 이곳. 아니면 사천도 좋겠지. 어디든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마음 편히 사실 수 있도록 돕거라.”
“그리하겠습니다, 장문인.”
현종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천운 끝에 그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기꺼운 소식이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그 넓은 항주 땅에서 살아남은 이가 고작 둘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일이 터지고 다른 곳으로 달아난 이들도 있을 터이니, 정말로 모두가 희생된 것은 아니겠지만, 희생이 큰 것은 매한가지였다.
“마교라…….”
이들의 입으로 직접 들은 마교는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두렵고도 끔찍한 곳이었다. 이들이 현종을 배려해 말의 수위를 낮추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청명아.”
“…….”
“청명아.”
두 번의 부름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현종의 눈썹이 꿈틀했다.
묘하게 입매를 굳힌 현종과 입을 삐쭉 내민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팔 내려라.”
“예, 장문인. 하문하십시오.”
곧장 돌아오는 공손한 대답에,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은 대체…….’
다른 사람 같으면 성격이 열댓 번은 바뀔 일을 요 며칠 사이에 겪고 온 것인데, 어찌 사람이 저리 초지일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저 성격이 나쁜 게 아니라, 저 성격을 고치려 드는 인간들이 잘못된 게 아닌지를 의심해 봐야 할 지경이다.
“네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현종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개운치 않고 답답한 얼굴로 청명을 잠시 바라본 후에야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네가 어찌 그리 마교를 잘 알고 있는지 굳이 캐묻지는 않겠다.”
“아, 그거요? 그건…….”
“되었다.”
청명이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바로 뭔가를 말하려 들자, 현종이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어 버렸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이라면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낫다.
“그건 나중에 네가 마음이 나면 이야기해 주거라.”
물론 현종이라 해서 청명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관계란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 해서 더 긴밀해지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 해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든, 그에게 있어 청명은 그저 청명일 뿐이다.
이미 마음을 연 아이가 제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 데에는 분명 그만한 사정이 있을 터. 지금 현종이 해야 할 일은 보채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었다.
현종이 슬쩍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도 눈짓을 보냈다. 그들의 태도 역시 다를 게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 중에서 네가 마교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물으마. 백천이의 말대로라면 이번 항주에 나타난 마교는 그들의 일부에 불과한 것 같더구나. 내 생각이 맞느냐?”
“예. 그럴 거예요.”
“하면…… 이번에 중원에 나타나지 않은 이들의 힘까지 모두 합하였을 때, 마교의 전력은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으냐?”
청명이 슬그머니 눈썹을 찌푸렸다. 손가락을 펴고 접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는 이내 굳은 얼굴로 현종을 보았다.
“……천마를 제외한 전력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하다.”
“하면…….”
그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무언가를 숙고하는 듯 침묵하던 청명은 모두가 긴장으로 침이 말라 갈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
“적게 잡아도 열 배, 아니……. 그 이상일 겁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