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85화 (1,086/1,567)

1085화. 그게 도사 된 자의 도리니까. (5)

“왜…….”

힘없이 주걱을 저어 대는 조걸의 입에서 영혼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내가…….”

그의 눈이 뒤쪽으로 돌아간다.

화산의 제자들. 아니, 지금만은 쓸모없는 잉여 인간들이라 불러야 할 것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가 미음 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야, 잘하네.”

“걸이가 잘하는 것도 있었네.”

“말씀을 그리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시주들. 세상 만물은 모두 작게나마 쓰임이 있는 법이지요. 아미타불.”

“……그럼 얘는 미음 쑤려고 태어난 겁니까?”

망할 것들.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인 조걸이 당소소를 노려보았다.

“왜요?”

“……아니.”

“왜요?”

“…….”

“뭐? 나 곱게 자랐다고! 내가 언제 그런 걸 해 봤겠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어느 산채든 들어가기만 하면 당당한 산적 두목이 되고도 남을 당소소지만, 한때는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이었으니까. 나름 귀하게 자랐다는 조걸조차 감히 비벼 볼 수 없는 귀한 신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미음을 쒀 본 적이 없을 수는 있다. 그럴 순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미음을 태워 먹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사람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게 화산인의 덕목 아니겠어요?”

“고개 끄덕이지 마십시오, 사숙조!”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운검을 향해 조걸이 빽 고함을 질렀다. 아니, 거기서 왜 고개를 끄덕이냐고!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죽 쒀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미안하다.”

“죄송하긴 하네.”

화산 공인 귀한 집 자식(?) 백천과 당소소가 슬그머니 조걸의 눈빛을 외면했다.

“아니, 그래. 이 양반들이야 그렇다 쳐. 근데 댁들은 길바닥 출신들이면서 왜?”

윤종, 유이설, 청명.

자타공인 화산파 길바닥 삼인방이 뚱한 얼굴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을 보인 것은 윤종이었다.

“미안하다.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

“사고는요?”

“나?”

유이설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없었어.”

“뭐가요?”

“부엌.”

“…….”

“보통은 열매 주워 먹고, 나무뿌리 뜯거나……. 이제 벌레 먹어야 하나 생각할 때 장문인께서…….”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사고!”

그러니까 그만.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

“됐으니까 빨리 미음이나 저어라. 근데 원래 미음이라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냐?”

“아니…….”

조걸은 제 앞에 걸린 거대한 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사람 밥이냐? 소먹이지.’

한 그릇만 하면 된다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달려들어서 그걸로 배가 차냐느니, 더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하냐느니, 미리 많이 쒀 놔야 하는 것 아니냐느니, 지금 환자한테 곡식을 아끼는 거냐느니……!

그렇게 한 홉 한 홉 추가하다 보니 거대한 솥이 미어터지도록 미음이 들어찼다.

‘이거 한 솥 해 놓으면 낙양에서 제일 큰 의원에서도 하루 동안 다 못 먹겠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일찍 입문했어야지. 한숨을 쉬며 미음을 젓던 조걸의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불이 조금 약한 것 같기도 한…….”

“그래?”

우드드드득.

그 순간 청명이 무심한 얼굴로 배의 난간을 뜯어냈다. 그러더니 또각또각 부숴 솥 아래의 불길에 와르르 던져 넣었다.

“더?”

“아니. 불은 이제 괜찮은데, 그…… 청명아.”

“왜?”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걸까?”

“뭐? 이거?”

청명이 제 손에 남은 목재의 잔해,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는 난간이라 불렸던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어.”

“뭔 상관이야. 내 배도 아닌데.”

“…….”

“그리고 상식적으로 수적 새끼들 배가 부서져 가라앉으면 좋은 일 아닌가?”

그 말을 들은 혜연이 흐뭇한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청명 시주의 공덕이로다. 아미타불.”

……아무래도 저 중놈도 이젠 완전히 돌아 버린 것 같다.

“아니, 그럴 거면 적어도 갑판 위에서는 안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이러다 배가 타면 어쩔 건데?”

청명이 되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조걸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물인데 불이 나든 말든 그게 뭔 상관이야?”

“배가 타잖아!”

“배가 타면 좋은 거라니까? 사형 사람 말을 못 알아먹어?”

이쯤에서 조걸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이놈과 논리를 따지느니 차라리 백아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게 낫다.

모두를 눈 밖으로 밀어 내고 맹렬하게 미음을 젓던 조걸은 잠시 후 들고 있던 주걱을 내려놓고 솥을 불 위에서 빼냈다.

“……다 됐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부자에 대해 확고하고 명확한 악감정을 가진 길바닥 삼인방이 영 미덥지 않다는 눈으로 조걸을 보았다.

“있는 집 자식이 미음 쒔다니까 영 찝찝한데.”

“못 먹을 음식.”

“먹으면 병나는 거 아냐?”

조걸이 버럭 고함을 쳤다.

“아니! 상인들은 상행을 자주 나가기 때문에 야외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음식을 필수적으로 배운다고요! 나도 배웠다고, 나도!”

그러자 백천이 웃으며 조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걸아.”

“예?”

“오해를 거두거라. 우리는 그 지식을 의심하는 게 아니란다.”

“……그럼요?”

“너를 의심하는 거지. 사람. 너라는 사람을. 그러니 속상해 말거라.”

아, 그냥 진짜 다 뒈졌으면 좋겠다. 진짜.

그때 슬쩍 미음을 찍어 맛을 본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됐어요.”

“진짜?”

“오오오.”

“드디어 걸이의 쓸모를 찾았군. 긴 세월이었다.”

차마 난장판에 다가가지 못하고 조금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도위는 떨리는 눈으로 제 옆에 선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저기…… 그…….”

“예?”

“그…… 저희 사이에,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여기 분위기가 원래 이렇습니까?”

임소병이 빙그레 웃으며 남궁도위의 어깨를 도닥였다.

“소가주.”

“예?”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

“처음에는 이게 웬 미친놈들인가 싶지만, 노력하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지. 이해는 안 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쉽지 않지만 소가주 정도의 근성이면 가능할 겁니다.”

“…….”

이 와중에도 분주히 움직인 당소소는 준비된 그릇에 미음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얼른 선실로 향했다. 유이설이 빠른 걸음으로 그런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당소소가 선실 문을 닫기 전에 고개를 뒤로 비죽 빼며 말했다.

“남은 것 좀 드시고 계세요. 우리도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그러마.”

선실 문이 닫히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바닥에 놓인 솥으로 향했다.

“그러네. 우리 아무것도 못 먹었네.”

“……사흘은 굶은 것 아닌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꼬르르륵.

그 정적을 깨고, 누군가의 배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슬금슬금 솥으로 다가갔다.

딸각.

손에 든 미음 그릇에 숟가락을 담근 백천이 뭐가 그리 웃긴지 피식피식 웃어 댔다.

“……진짜 솥이고, 그릇이고 없는 게 없네. 이거 진짜 수적 놈들이 얼마 전까지 타고 있던 배를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이상한 데서 친절하다니까요, 장일소 그놈.”

“심지어 쌀도 있었잖습니까. 설마 밥까지 챙겨 줄 줄이야.”

“……난 그거 소소 없었으면 안 먹었다.”

“저도요. 그 새끼를 어떻게 믿고.”

독의 유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먹거리 때문에 죽을 걱정이 없어지는 법이다.

보아하니 일부러 챙겨 놓은 쌀은 아닌 것 같고, 수적 놈들이 비상식량 삼아 들고 다녔던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배를 채울 곡식이 있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배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배는 장강의 우측에 최대한 붙은 채 강의 상류로 향하는 중이었다. 언제든 수적들이 습격해 오면 곧장 강북에 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에는 배는 도하하는 데만 쓰고 안전한 육지를 달리는 쪽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이와 환자를 대동하고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편안히 이동할 방법과 조금 더 안전한 방법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게 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다른 수적선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기껏해야 정박해 있던 수적선의 옆을 지나친 정도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장일소가 편히 가라고 수적 놈들을 모조리 묶어 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하튼…… 지금이야 별일 없다고 해도, 장강은 수로채 놈들의 소굴이니만큼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

“한 그릇 더.”

“이야. 걸이 죽 잘 끓이네.”

“이건 죽이 아니라 미음이라던데?”

“다른 거야?”

백천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솥에 담긴 미음이 쉴 새 없이 줄었다. 백천의 시선이 조금 다급해졌다. 사흘을 굶은 건 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백천의 말이 조금 더 빨라진다.

“그러니 경계를 좀 더 확실하게 하자. 우리만 있다면 모를까, 여기에는…….”

“간장 없어? 소금이나?”

“환자 먹는 거라서 간을 아예 안 한 것 같은데?”

“저기 식재 창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소금 찾아볼까?”

“됐어. 그냥 먹지 뭐. 삼삼하니 먹을 만하네.”

“아니, 얘들아 내 말을…….”

심지어 운검과 임소병, 남궁도위마저 빠르게 그릇을 비워 나갔다. 결국 백천도 설교고 나발이고 다 집어던지고 솥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 먹을 건 좀 남겨 놓으라고, 이 망할 것들아!”

갑판 위는 순식간에 먹는 소리와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로만 가득 찼다. 실로 전투적인 식사였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장문인.”

“으으음.”

현종이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강과 그 너머에 있는 강남 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금이라도 강을 건너는 게…….”

“안 됩니다, 장문인. 청명이 놈이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이 올 것입니다. 그럴 능력은 있는 아이들이 아닙니까?”

“……그렇겠지.”

현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설프게 도하했다가 상황이 꼬이기라도 하면 제때 연락이 닿지 않아서 아이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종을 비롯한 나머지 화산 인원들은 이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 보자꾸나.”

“이미 많이 왔습니다, 장문인.”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연락하지 못할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빨리 향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도 맞는 말입니다만…….”

운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그들은 구강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이동한 뒤였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빠르게 아이들에게 향해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까드득.

현종이 급기야 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어린 걱정과 불안을 보니, 운암은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조금만…….”

바로 그때였다.

“장문인! 조금 전에 수적선 한 채가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이들의 소식이 아니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현종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 그게, 배의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마치 싸우면서 뜯긴 것처럼 배가 망가져 있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양새가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

현종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안에 누가 타고 있더냐!”

“멀리서는 확인이 어려워서…….”

현종은 불안이 깃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장강에서 수적과 싸울 이라면 우리 아이들밖에 없지 않으냐!”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 아니, 아니긴 한데……. 아니지만…….”

그 순간 평정을 유지하던 운암의 얼굴도 무너지고 말았다.

“하류 쪽으로 가 보시죠!”

“그래! 그게 옳겠구나! 아이들에게 일러라! 이동한다! 당장!”

“예!”

그렇게 화산의 제자들이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지며 전력으로 하류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할 때.

“근데 이거 불은 왜 계속 피워 놓은 건데?”

“따뜻하잖아.”

“그렇긴 하네.”

화산의 제자들은 갑판 위에 피운 모닥불 주변으로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아, 따땃하다.”

흡사 불 앞에 앉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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