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화. 그게 도사 된 자의 도리니까. (1)
“어휴.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어. 까딱했으면 다 뒈졌다니까?”
히죽히죽 웃으며 말해 대는 청명을 보며 백천이 눈을 끔뻑였다. 시선을 느낀 청명이 물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잠깐 침묵하던 백천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네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그런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그런데…… 사패련은 정말 그냥 돌아간 거냐?”
“그럼 가짜로 돌아갔겠어?”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장일소와 그 무리가 사라져 간 방향이다. 백천의 눈에는 여전히 미묘한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놈치고는 너무 쉽게 발을 뺀 것 같아서.”
“그건 장일소로서도 별수 없는 선택입니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부채를 쫙 펼쳐 든 임소병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까요.”
“……불이요?”
“예. 정확하게는 자기가 지른 불이지만.”
백천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자, 임소병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미 장일소는 흑룡왕이 실각한 수로채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치 않게 만금대부까지 실각해 버렸으니 할 일이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으음. 사패련 내에서 반란이라도 일어날 거란 겁니까?”
“아, 그건 어렵지요. 수로채나 흑귀보나 머리를 잃은 상황이 아닙니까? 반란이란 구심점이 명확해야 벌어질 수 있지요. 하지만…….”
임소병이 살랑대던 부채를 단번에 확 접었다.
“다른 경우는 벌어질 수 있지요.”
“다른 경우요?”
“예. 이탈입니다.”
“이탈?”
귀 기울이고 있던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임소병에게 주목했다. 임소병은 슬쩍 웃었다.
“정파 분들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일지 모르지만, 애초에 사파 놈들은 충성심이 그리 대단하진 않습니다.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놈들이 많고, 개중에서는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문파를 떠나는 놈들도 꽤 됩니다.”
“아아.”
“그런 이들을 붙들어 매어 놓는 것이 수장의 존재감과 이탈자에 대한 보복입니다. 그러니 수장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하던 이들은 문파가 혼란해진 틈을 타 문파를 벗어나려 들지요.”
백천이 무슨 말인지 알겠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파 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네요.”
“거꾸로 저희의 입장에서는 백천 도장 같은 분들이 더 이해가 안 갑니다. 사실 화산은 이미 진즉에 망한 문파였고, 그곳에 남아 있어 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잖습니까?”
“얻으려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백천의 담담한 대답에 임소병이 고소를 머금었다.
아마 이건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눈다 해도 좁힐 수 없는 간극일 것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니까.
임소병이 제 머리를 부채로 긁적였다.
“이야기가 좀 샜는데, 아무튼 흑귀보 역시 만금대부의 장악력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었던 곳이니, 만금대부가 죽었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하면 당연히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이 틈을 타서 이득을 취하려 들거나, 문파를 빠져나가려 하는 이들이 확 늘어나겠죠,”
“확실히…….”
“그러니 장일소가 바쁠 수밖에요. 놈이 원하는 건 수로채와 흑귀보의 세력을 티끌 하나까지 남김없이 온전하게 흡수하는 걸 테니까요. 아마 한동안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일단 직접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영역이 몇 배로 커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제야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예?”
왜 그런 결론이 나오냐는 듯 임소병이 되물었다.
“어쨌든 한동안은 장일소도 움직이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말씀하신 대로라면 저 장일소라 해도 흑귀보와 수로채의 모든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장악이라는 개념이 발아래에 둔다라면 장일소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탈하는 이들은 막아 내고 그들의 세력을 빠짐없이 온전히 수습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난해할 테다.
천하의 장일소라 해도 한동안 발이 묶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연. 그런 의미셨군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임소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때 백천이 윤종의 말에 힘을 보탰다.
“게다가…… 어쨌든 만금대부가 죽고, 흑룡왕이 한쪽 팔을 잃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사파 측에서 부족했던 절대고수의 수가 둘이나 준 것과 마찬가지니, 사패련 쪽도 손실이 크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 역시 맞습니다.”
임소병은 빙긋 웃었다.
“확실히…… 만인방의 힘을 모두 동원하고, 하오문의 힘까지 모조리 끌어 쓴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겠죠.”
“역시나…….”
“하지만 윤종 도장.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이해하고 계십니까?”
“예?”
윤종의 얼굴이 조금 얼떨떨해졌다. 임소병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사패련은 한동안 내흉을 겪을 겁니다. 장일소의 성향을 고려했을 땐, 그 과정에서 많은 피가 흐를지도 모르지요. 사패련 전체의 전력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감소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변화에는 반드시 피가 동반된다.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이들은 언제나 변화에 반발하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이들을 어르고 달랠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철저하게 짓밟아 다시는 그에게 반발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저 장강에서 수로채에 본보기를 보였던 것과 같이.
“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사패련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어설프게 연합으로 존재해 오던 사패련은 세상에서 사라지겠죠. 그리고 그곳에 완전한 사패련이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장일소의 손짓 하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문파로서의 사패련이.”
그야말로 만인방의 사파일통이다. 물론 상징성이 있으니 다시 만인방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
“하오문주조차 패군에게 굴복한 이상, 더는 그를 막을 이가 없습니다. 길어야 반년. 그 안에 장일소는 모든 사파를 제 아래에 규합할 겁니다. 그러고 나면…….”
모두가 그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장일소는 분명 다음 먹잇감을 노리겠지요.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이니까요.”
길어야 반년이라는 말이 모두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장일소가 어떤 이인지 똑똑하게 지켜보았다.
단자강, 그리고 천살. 그 두 주교가 보여 준 무력은 분명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선 이들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장일소였다.
“혹시 협력…….”
“아니.”
눈치를 보다 입을 연 윤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청명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럴 일은 없어.”
모두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장일소는 장일소다. 결국은 사파 새끼일 뿐이야. 그런 놈과 협력은 애초에 불가능해.”
“……하지만 이번에는 가능했잖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니까. 하지만 놈들이 마교를 막아 내기 위해 우리와 협력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특히 그놈이 머리가 된 사파라면.”
윤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이 저리 단정적으로 말하는 이유를 그는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놈이 저리도 확신하는 거라면, 분명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으니까.
“반년이라…….”
청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그것도 길게 봐야 반 년이다. 그게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 청명이 모를 리 없다.
“좋아.”
그는 고개를 들어 다른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우선은 돌아가자. 장문인께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일단은 나중에 하자고.”
“음, 그래.”
“알겠다.”
화산의 제자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것은 여전히 많이 남았지만, 이곳은 강남이다. 그들이 편히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화를 하는 건 강남 땅을 빠져나간 후라도 충분하다.
“자. 그럼 우선…….”
“잠시만 기다리거라.”
“예?”
청명이 우뚝 멈추며 말을 꺼낸 이를 돌아보았다. 운검이 담담한 얼굴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사숙조?”
운검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깐 굳은 얼굴로 황량한 항주 땅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니 이건 윗사람으로서의 명이 아니라, 그저 내 의견이라 생각하고 답을 해 주거라.”
“예, 사숙조. 말씀하십시오.”
“이대로 그냥 떠나는 게 마음이 영 편치 않구나.”
“예……?”
백천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운검은 씁쓸하게 답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느냐. 강호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저 살아가던 이들조차.”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말에 모두가 숙연해진 것이다. 연이은 위기를 넘기고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취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한 것은 안다. 어쩌면 내 욕심 때문에 너희를 또 위기로 몰아가는 짓일지도 몰라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구나. 하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을 위해 간단하게나마 진혼제라도 올리고 싶구나. 괜찮겠느냐?”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씩 잊고는 한다. 그들이 무인 이전에 도사라는 것을. 그리고 이기는 것 이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숙.’
모두가 잊은 와중에 운검만은 그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백천은 새삼 느꼈다. 사숙들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는 괜찮다고 생…….”
“해야죠!”
백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약하고 부족해서 이곳 사람들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넋이라도 위로해야죠. 그게 도사 된 자의 도리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임소병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여긴 강남이고, 사패련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해야지.”
“빌어먹을, 멍청한 새끼. 그걸 잊고 있었네. 그냥 갔으면 땅을 쳤을 뻔.”
“그러게나 말이다.”
“일단 뭐부터 준비해야죠? 빨리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자리부터.”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시나요? 저기요?”
화산의 제자들이 임소병을 빼놓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심지어 혜연조차도 얼굴이 뻘게진 채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돕겠습니다, 시주들!”
“도관에서 하는 진혼제를 모르시잖아요.”
“힘쓰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대신 끝나시면 저도 이들을 위해 경 하나쯤은 외게 해 주십시오!”
“그건 당연한 거죠.”
저들끼리 북적대며 움직이기 시작한 정신 나간 정파 놈들을 보며 임소병은 영혼 빠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장일소가 이 인간들보다는 좀 더 제정신 아닐까?’
실로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