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0화. 다음에는 네 목이야. (5)
“어으…….”
더는 사패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순간, 조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신호인 것처럼,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혼이 빠진 듯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던 백천이 힘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갔냐?”
“간 것 같은데요?”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십쇼, 사숙.”
백천이 질린 듯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다.
“……정말 뒈지는 줄 알았네.”
지금껏 수많은 위기를 헤쳐 온 그들이지만, 이번만큼 마음을 졸였던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마교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저 망할 장일소와 흑귀보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윤종이 말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 중얼거렸다.
“수명이 일 년은 준 것 같아…….”
“저는 삼 년이요.”
“소승은 오 년…….”
다들 맥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저 사패련 놈들이 마음을 바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다.
‘장일소.’
백천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대지를 넘어 지평선 쪽을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주교로 시작해 장일소로 끝났다. 그 살벌한 무위를 보여 준 단자강에 대한 인상이 마지막에는 장일소로 모두 뒤덮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주교.’
백천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단자강의 심장을 꿰뚫었던 그를 생각하니 몸이 절로 떨려 왔다.
‘세상에는 괴물들이 이리도 많은 건가?’
왜 강호를 용담호혈이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하나 강호를 뒤집어 놓고 남을 괴물이 셋이나 있었다. 그런 이들을 동시에 셋이나 보게 되다니. 이게 복인지 불행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니……. 셋이 아니다.’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넷이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따지고 보면 정말 대단한 건 이놈이지.’
적어도 장일소는 흑귀보와 홍견을 이끌고 왔고, 주교들 역시 마교도들을 이끌고 왔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십여 명에 불과한 인원만을 대동하고, 괴물들이 서로 잡아먹기 위해 날뛰는 판을 뒤흔들어 버렸다.
‘내가 이놈을 적의 입장에서 봤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쩌면 청명을 상대한 이들은 그가 주교를 보고 느낀 두려움이나 장일소를 보며 느낀 위압감보다 더 큰 무언가를 안고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럴 때마다 새삼 느끼게 된다. 너무 익숙해서 잊어버리곤 하지만, 이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말이다.
“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백천의 시선을 느낀 듯, 청명이 퉁명스레 물어왔다. 백천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냐?”
물어볼 게 너무 많았지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말은 결국 이것밖에 없다. 이제는 조금 늦어 버린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꼭 묻고 넘어가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별걱정을…….”
태연히 말을 하던 그가 순간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왜? 누가 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아니. 뭔가 느낌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백천이 그게 뭔 소리냐고 물으려 하는 순간, 청명의 코와 입에서 붉은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백천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확장됐다.
“너……. 너, 너……. 아, 아니, 너, 너 왜 그래?”
“어?”
백천의 반응에 청명이 손을 뻗어 제 얼굴을 훔쳤다.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본 청명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뒤바뀌었다.
“……어?”
“우, 운기 했잖아! 이 새끼야! 운기 했는데 왜 그래?”
“……아니. 내력 되찾는 게 바빠서……. 요상(療像: 운기를 통해 상처를 치료)은 쥐꼬리만큼도 못 했…….”
“뭐?”
청명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걸 본 화산 제자들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괜찮아. 이 정도는 별것 아닌……. 어? 왜 어지럽…….”
“소, 소소야! 소소야아아아! 저 새끼 죽는다!”
현기증이 이는지 뒤로 넘어가는 청명을 보며 조걸이 비명을 질렀다.
“야, 이 미친 인간아!”
그리고 그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소소는 이미 눈을 까뒤집고 청명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드러누운 청명의 두 눈에 공허함이 어렸다. 입술이 달싹였다.
“저기…….”
푸욱!
“끅…….”
윗입술 한가운데에 대침이 박힌 청명이 눈을 까뒤집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입술에 침은 왜 박는데?! 이건 치료랑 상관없잖아!”
“제가 개발한 주둥아리 치료술이에요. 사형은 입이 제일 문제니까.”
“아니!”
푸욱!
청명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이마 한가운데 대침이 파고들었다.
“……계속 말해 봐. 계속.”
대침을 들고 눈을 부라리는 당소소에게서 지옥의 칼바람 같은 한기가 흘러나왔다.
청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놀라운 일일지 모르나, 그에게도 그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럴 때는.
“아니, 이 미친 인간이 말이야. 운기 하라고 시간을 그렇게 벌어 줬는데, 뭐? 요상을 안 해? 진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이 새끼야?”
“소소야……. 그래도 네 사형…….”
“뭐요?”
“……거기 정수리에 침 꽂을 데 하나 비었다고.”
“네.”
푸욱!
정수리에 대침이 박히는 순간, 청명이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퍼덕퍼덕 경련했다. 물기 맺힌 눈이 원한을 담아 백천을 노려보았다. 백천은 죄책감 어린 얼굴로 그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부는 바람은 피해 가는 게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숙.”
“응?”
조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보통 그…… 운기라는 게 내력을 회복하는 것과 몸을 치료하는 걸 나눠서 할 수 있습니까?”
“보통은 못 하지?”
순간 조걸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는 청명을 보며 생각했다. 저 대단한 재주를 저렇게 쓰는 것도 재주라고.
운검은 전신에 침을 고슴도치처럼 박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청명을 빤히 바라보다 당소소에게 물었다.
“좀 어떠하더냐?”
“엉망이에요.”
당소소가 딱 잘라 말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워낙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라 회복은 될 텐데, 거기서 더 싸웠으면 정말 죽었을 거예요. 아니, 진짜 생각이라는 게 있으…….”
“안 그랬으면 내가 뒈지는 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 다 죽었…….”
빛살처럼 청명의 주둥이를 향해 날아드는 대침에, 운검은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푸욱.
“끄으…윽…….”
그냥 입만 다물고 있으면 침 한 대라도 덜 꽂힐 텐데, 그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가…….
운검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아니지.’
당소소는 청명을 두고 미련하다 화내고 있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명이 조금만 운기를 늦게 끝냈어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는 것을.
그 짧은 시간 내에 내력의 회복과 육체의 회복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상황에서 청명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터.
당소소가 화를 내는 이유도, 결국은 청명을 그토록 무리하게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무력감과 자책 때문이겠지. 지금 운검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구해 줘도 뭐라고 하네! 내가 안 이랬으면 방법이 있었을 것 같아? 하여튼 요즘 것……. 끄으으윽!”
청명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유이설이 손가락 끝으로 청명의 이마에 박힌 대침 하나를 꾹 밀어 넣었다.
“사고.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거 너무 깊이 박히면 사형 정말 죽어요.”
“그러라고 한 거야.”
유이설의 무표정한 얼굴을 힐끔 본 당소소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급한 불은 껐어요.”
“다시 불 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래도 살려는 주죠.”
“흠.”
유이설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청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천하의 청명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놈 진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천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소소야.”
“네, 사숙.”
“그래서 치료는 언제 끝나느냐?”
“여기서 완전하게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적당히 숨만 불어넣는 정도죠. 그건 이미 끝났어요.”
“응? 그런데 침은 왜 계속 꽂아 놓느냐?”
“뽑을까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꽂아 두자꾸나.”
“네.”
칼바람 부는 화산 제자들의 대화를 듣던 임소병은 문득 끼쳐 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통풍 하나는 눈물 나게 잘되겠네.”
수백 개의 구멍이 뚫려버린 제 옷을 보며, 청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당소소가 회수했던 대침을 다시 움켜잡았다.
“왜? 추워? 그 구멍 다시 막아 드려?”
“……내, 내가 뭐라고 했어? 나 아무 말 안 했어.”
청명이 슬금슬금 당소소에게서 물러났다. 개인적으로 이럴 때의 당소소는 주교보다 더 무섭다.
“여하튼 진짜.”
당소소가 이를 빠득빠득 갈아 댔다. 그 소리가 살벌했다. 임소병은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빚을 졌다고 해야 하나.’
굳이 이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어도, 장일소는 청명을 살려 보냈을 것이다. 임소병의 생각에는 그랬다. 청명은 지금 이 시점의 장일소에게 있어서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이니까.
하지만 임소병은 안다. 장일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청명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그 외 화산의 제자들은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죽이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는 생각할 것도 없지.’
그가 장일소였다면, 이 자리에서 임소병만은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모든 것을 짐작했기에, 청명은 장일소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이 위험한 전장 한가운데에서 운기를 하는 모험수를 둬 가며.
‘그 결과…….’
결국에는 이 살벌했던 전장에서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임소병은 지금까지 화산이 희생자를 내지 않은 것이 그저 운이 좋아 벌어진 일이라 생각해 왔다. 그들이 겪어 온 전장을 감안한다면,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니까.
하지만 이번 전투를 겪으며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운이 아니었어.’
운이란 의도치 않게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끄는 이가 철저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로 준비한 결과를 운이라 하지는 않는다.
임소병 역시 한 단체를 이끌고 있기에 알고 있다. 강호에서 희생을 배제한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지만 화산검협은 그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들을 실제로 해내고 있었다. 때로는 대비하고, 때로는 몰아치고,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해 가며.
화산이라는 문파를 이곳까지 이끌며 청명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 왔을지, 임소병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임소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황량한 땅에 우뚝 서 있는 청명의 등이 이 순간, 더없이 거대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