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9화. 다음에는 네 목이야. (4)
화산의 제자들을 남겨 두고 말없이 묵묵히 걷던 장일소가 슬쩍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흐음.”
그 묘한 비음에 호가명이 의문 어린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장일소가 입을 뗐다.
“의외로구나.”
“……어떤 부분이 말씀이십니까?”
“이쯤 오면 네가 저놈들을 처리하자는 말을 다시 꺼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호가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 틀린 예상은 아니다.
그가 물러난 이유는 장일소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검협을 그토록 높이 인정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의 자존심보다는 장일소의 목숨이 천 배쯤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 평소의 그라면 장일소의 안전이 확보된 지금, 약속을 뒤집고 저놈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련주님.”
“음?”
“제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호가명의 말에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었다. 물론 장일소는 호가명이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다. 단순히 충성심이 높단 이유만으로 자신을 보좌하는 자리를 내어 줄 정도로 장일소는 정 많은 사람이 아니다.
잠깐 그를 바라보던 호가명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쳤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저들의 목숨을 거두고자 하셨다면 방법은 여럿 있었겠지요. 그저 련주님의 생각에 저들의 쓸모가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장일소가 빙그레 웃는다.
“그걸 조금 일찍 알아채 주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련주님.”
호가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주군을 그저 지켜볼 신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쯧쯧. 너는 그게 문제다.”
“그리 말씀하셔도 고칠 생각은 없습니다.”
호가명은 절대 멍청한 이가 아니다. 오히려 세력을 관리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장일소 이상의 능력을 보인다.
장일소가 정신 나간 전략을 아무렇지 않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이유도, 그가 무슨 짓을 하든 그에 맞춰 전력으로 병력을 운용해 내는 호가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족이란 생각을 실현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호가명은 진정으로 장일소의 수족이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는 자였다.
그럼에도 때때로 호가명이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그저 하나. 그에게는 늘 승리나 이득보다 장일소의 안위가 가장 우선이기 때문이다.
장일소가 설득하기를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다. 저들은 아직 죽어서는 안 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산검협은 아직 죽어선 안 된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말이야.”
그때,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면수사가 넌지시 물었다.
“혹여, 마교 때문입니까?”
장일소가 슬쩍 천면수사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비틀려 올라간다.
“글쎄. 어떨까…….”
그 미소를 본 천면수사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지금 장일소는 부상을 다스리지 못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어쩌면 이 순간 장일소에게 가장 위험한 이는 저 화산파도 마교도 아닌, 옆에 있는 천면수사일지도 모른다.
분명 장일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면수사에게 조금의 경계심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 여유가 되레 천면수사를 긴장하게 했다. 물론 예전에도 존재감 하나만큼은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장일소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마교라. 그래, 그들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
천살의 모습을 떠올린 장일소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이 내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이야.”
마교는 강하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자존심도 뭣도 아니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짓일 뿐이다. 천살 같은 이가 저렇게 태연히 존재하는 마교는, 어쩌면 중원 전체가 모두 힘을 합쳐 싸워도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곳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뿐이란다.”
장일소가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먼 훗날의 일 때문에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건 더 멍청한 짓거리지. 나는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멍청한 광신도들에게 눈을 빼앗길 만큼 한가하지 않단다.”
“하오나, 련주님. 저들이 말하는 천마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장일소의 목소리가 심드렁하게 흘러나왔다.
“확실히…… 언젠가는 저들의 말대로 그 천마라는 작자가 돌아와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천마가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 정도 되는 이가 허황한 전설 하나를 믿고 저리 은인자중한다는 건, 호가명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언제일지도 모를 그때를 기다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겠니? 인간의 삶이란 그리 길지 않단다. 내 인내심 역시 그리 대단치 않고.”
장일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섬뜩한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딱히 대비할 방도도 없지 않으냐? 마교가 무서우니 저 정파의 돼지 놈들과 하하호호 즐겁게 지내기라도 해야 할까?”
“……어렵습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장일소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정파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들 사이에 파인 감정의 골이 너무도 깊다.
‘차라리…….’
호가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만약 지금 정파의 중심이 화산검협을 위시한 천우맹이라면 다른 방도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파일방과 사패련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관계다.
“정 마교가 두렵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천면수사와 호가명이 동시에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장일소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먼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그 천마라는 놈이 돌아와 중원을 침공하기 전에 내가 중원을 일통해 버리는 것이다. 그럼 서로 어정쩡하게 협력을 하니 마니 할 필요도 없겠지. 모든 이들이 내 아래에서 하나가 되어 맞설 테니까.”
이 역시 황당한 말인 건 마찬가지다. 중원일통이라는 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는 차라리 이쪽이 현실성 있는 이야기로 들렸다. 정과 사의 협력이라는 꿈같은 이야기에 비한다면, 중원일통이라는 말은 그나마 피부에 와닿는다.
그리고…….
천면수사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꼭 어렵다고만 볼 일도 아니지.’
불과 삼 년 전만 해도 누구 하나 상상하지 못했다. 저 장일소가 신주오패를 하나로 규합해 사패련을 만들고, 그 수장이 되리라는 걸. 그리고 불과 삼 년의 시간 만에 그 사패련마저 완벽히 제 발아래에 굴복시킬 거라는 걸.
그 황당하기까지 한 업적에 비한다면 사패련을 이끌고 중원을 일통하는 건 오히려 쉬워 보이는 일이 아닌가?
“고인 물은 둑을 허물기 전에는 흐르지 않는 법이란다. 제 턱에 비수가 겨눠져도 안 움직일 만큼 엉덩이가 무거운 놈들이, 제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은 마교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낄 리가 없지.”
“…….”
“그러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된단다. 지금까지처럼.”
호가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할 정도로 망상 같은 이야기와 묘하게 현실적인 이야기가 뒤섞인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부터 흘려들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장일소의 이야기에는 분명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련주님.”
“음?”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장일소가 부드럽게 허하자 호가명이 살짝 머뭇대다 물었다.
“하지만 혹여…… 마교의 공격이 예상보다 빨라서, 정파 놈들과 일전을 벌이는 중에 이뤄지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쯧쯧. 가명아, 가명아.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그걸 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느냐. 정파 놈들이 휴전하고 힘을 합치자고 빌어 대면 그때 가서 고민해 주면 될 일이고, 그 지경이 되어도 그놈들이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면 같이 죽으면 될 일이 아니냐?”
“…….”
“똑똑히 알아 두거라. 어차피 우리가 합심하여 마교를 막아 낸 뒤에 다시 싸워 정파 놈들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저 망할 마공의 특성을 생각해 보렴. 피해를 더 크게 입는 쪽은 우리일 수밖에 없다.”
까라라락.
장일소의 반지가 순간적으로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즉, 어차피 그때가 되면 세상은 내 것이 될 수 없단 소리지. 내가 가지지 못할 세상이라면 망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더냐. 차라리…….”
장일소의 두 눈이 기묘한 호선을 그려 냈다.
“모조리 불타 없어져 버리는 편이 낫단다.”
호가명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확실히…… 정과 사가 연합하여 마교를 막아 봐야 결국에는 정파 놈들만 이득을 보게 될 뿐이다.
“……련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마교가 발호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겠군요.”
“그렇지.”
“알겠습니다.”
호가명 역시 결심을 굳힌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일소의 안위. 그리고 두 번째는 장일소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다.
“한데…… 그것과 화산검협을 살려 주시는 것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 말씀대로라면 차라리 위협이 될 만한 이를 빨리 죽여 버리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말했잖느냐. 지금 천우맹은 그를 중심으로 뭉쳐 있다고. 화산검협의 존재가 없어진다면 천우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우리가 이곳에서 화산검협을 죽여 없애면 천우맹 따위야 순식간에 분열해 만만한 먹잇감이 되겠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 과실을 우리가 딸 수 있느냐?”
잠시 생각해 본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렵습니다.”
“이유는?”
“수로채와 흑귀보를 안정시키기 전에는 강을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만금대부의 죽음과 흑룡왕의 부상도 치명적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회를 틈타 누가 그 과실을 따겠느냐?”
“……독이 오른 구파일방 놈들입니다.”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구파일방은 사패련과 다를 바 없이……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천우맹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니 그 약해진 틈을 노리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장강을 중심으로 선을 그어 놓은 것이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이 천우맹을 삼키게 되면 그 선은 더는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버린다. 그건 최악의 수지.”
“확실히…….”
그렇기에 장일소 역시 청명을 살려 둬야 했다.
실로 묘한 관계다.
“쓸모가 많은 패지, 정말 유용한.”
중얼거린 장일소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먼 지평선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지평선을 바라보던 장일소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더는 아니겠지.”
“…….”
“범 새끼를 키우는 이는 항상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언제 그 고양이가 진짜 범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그 시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의 목에는 범의 송곳니가 틀어박히게 되지.”
호가명의 우려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 청명이라는 놈은 그 가치만으로 살려 두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자다.
“모든 패는 쓸모가 다하는 때가 있는 법.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다음에는…….”
장일소의 두 눈에 언뜻 서늘한 빛이 스쳤다.
세상을 노리는 거대한 이무기처럼 지평선을 노려보던 그는 이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한동안 바쁠 터이니.”
“예, 련주님!”
걸음을 옮기는 동안 장일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교, 구파일방, 천우맹, 그리고 사패련이라…….’
안 그래도 복잡하기 짝이 없던 구도에 마교라는 변수가 생겨났다. 하지만 장일소는 되레 이 상황이 즐겁기만 했다.
‘모두 알게 되겠지. 기회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는 사실을.’
들뜬 그의 눈빛이 잔혹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