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화. 다음에는 네 목이야. (3)
기가 역류할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내뿜는 기세 때문이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혈이 제멋대로 날뛰는 기분이었다.
상황이 다르고 가진 게 다르다. 서로 할 수 있는 것도 분명 다르다. 하지만 둘 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긴장감이 당겨진 실처럼 팽팽했다.
그 지독한 긴장을 깬 건 장일소의 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탄식이었다.
“하.”
아주 미약한 소리임에도,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향해 단번에 내리친 칼날 같았다.
청명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인 순간, 장일소가 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숨 막히는 정적이 고였다.
태연하게 한 걸음을 물러선 장일소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뭔…….”
그가 물러선 동시에 청명이 움직였다. 저놈의 위협이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장일소가 조금이라도 공격할 기미를 보였다면 청명의 검은 일직선으로 목을 향해 날아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말이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군.”
감탄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청명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장일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지. 내가 인정하는 미친놈은 정말 흔치 않거든.”
“근데 이 새끼가?”
평소 같으면 그 말에 동조하든, 아니면 반박하든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을 화산의 제자들이지만, 지금은 입조차 뗄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이 두 사람의 대치가 무겁고도 날카로웠다.
그리고 백천은 알고 있었다.
분명 먼저 물러난 이는 장일소다. 하지만 저토록 팽팽하게 뒤얽히는 살기 속에서 뒤로 물러난다는 것 역시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러난다는 건 틈을 보인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누가 감히 저 청명의 앞에서 틈을 내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물러났음에도 이는 결코 약세를 보인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장일소가 자신의 배짱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용과 범을 가져다 붙이기에는(龍虎相搏) 과히 저열하고 살기 가득한 대치다.
이런 둘의 대치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게 무인으로서는 더없는 행운이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불행이었다.
“확인이라…….”
장일소가 느긋하게 혀를 찼다. 그러더니 슬쩍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는 직접 확인하는 걸 그리 꺼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지. 나는 감히 천하의 화산검협을 상대로 내 목숨을 시험해 볼 정도로 담이 큰 인간은 아니라서 말이야.”
“……개소리하고 있네.”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저 장일소가 제 목숨 아까워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건 천하의 모두가 알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일소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더더욱 알 수밖에 없다. 저 속 보이는 너스레가 짜증 났다.
하지만 장일소는 아예 항복한다는 듯 양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 뒷걸음질 쳤다. 그 표정과 그 동작, 어디에서도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득하기까지 한 조롱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할까?”
“려, 련주님!”
호가명이 한껏 당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장일소가 하는 말이 단순히 뒤로 몇 발짝 물러나겠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 저놈들을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 장일소가 한숨을 푹 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가명아.”
“련주님답지 않으십니다! 저 화산검협이라는 놈은 체면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합니다! 저놈은 반드시…….”
“가명아.”
두 번째 불린 이름에, 호가명이 입을 닫았다. 장일소의 목소리는 짜증 한 점 섞이지 않고 부드러웠다. 그렇기에 더욱 거역할 수 없었다.
장일소는 한탄하듯 호가명을 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야심이 많은 줄 내 미처 몰랐구나.”
“……예?”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죽이고 싶던?”
“……그, 그게 무슨…….”
호가명이 크게 당황했다. 장일소는 영 마뜩잖다는 듯 그와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르겠니? 지금 목숨이 저당 잡혀 있는 건, 화산검협이 아니라 바로 나란다.”
“……예?”
호가명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되묻자 장일소는 대답 없이 청명을 돌아보았다.
“삼 할. 아마 그쯤이겠지?”
그 말을 들은 청명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맞군.”
장일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정파 놈들의 무학은 더럽다니까. 그 잠깐의 입공으로 본 신진력의 삼 할을 회복해 버리다니. 이거 원 사파 놈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장일소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저놈에게 삼 할의 내력이면, 힘없고 연약한 내 목을 따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놀란 호가명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는 그도 있고, 천면수사도 있다. 그리고 홍견과 흑귀보의 정예들도 있다. 그 모두가 장일소의 앞에서 버티며 지킬 텐데, 저 청명이 그 모두를 뚫고 장일소를 벨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인가?
‘아, 아니…….’
생각에 잠겨 있던 호가명이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주교와 싸우던 청명의 모습을.
그 집요함과 과감성을 고려한다면, 장일소의 말이 영 틀렸다 할 순 없다. 그 몸이 모조리 찢겨 나가고,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장일소의 목에 칼 한 번은 기필코 휘두르려 들 테니까.
‘정말 막을 수 없나?’
호가명은 순간적으로 갈등에 빠졌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는 건 너무도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호가명은 절대 장일소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위험할 가능성이 일 푼이라 해도 물러나는 건 그들이어야 한다.
호가명의 얼굴이 변하는 걸 보던 장일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하겠니? 목숨을 구걸하는 건…….”
장일소의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되레 이쪽이란다.”
제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하면서도 장일소의 얼굴엔 껄끄러움이나 두려움 따윈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달랐다. 못내 불안해진 그가 슬쩍 장일소와 청명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려 하자 장일소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밀어 냈다.
“쯧. 모양 떨어지게.”
“하오나…….”
“걱정할 거 없다. 내가 먼저 손을 쓰지 않는 이상 저 칼이 내 목으로 날아올 일은 없으니까.”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청명에게 물었다.
“그렇지?”
“……그 주둥아리만 처다물면 그럴 것도 같은데.”
“하하하하핫.”
뚱한 대답에 장일소는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청명은 장일소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은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 그리고 청명 자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장일소가 살아야 저들도 살고, 장일소가 죽으면 저들도 죽는 것이다. 그러니 청명은 장일소를 죽일 수 있지만, 거꾸로 절대 장일소를 죽일 수 없다.
“흐음, 별수 없나.”
장일소는 콧소리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으로 모두의 신경이 쏠려 있었다. 마침내 장일소가 말했다.
“보내 주지.”
짧게 말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우에 대한 예의로서.”
“지랄.”
“세상에, 이리 삐딱해서야. 사람이 이리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못 말리겠단 듯 고개를 저은 장일소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 보자…….”
그렇게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다 씨익 웃었다.
“저기로군.”
장일소는 앞에 있는 모두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도 그런 그를 막지 못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장일소의 수하들도, 그리고 심지어는 장일소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는 청명조차도.
그렇게 한참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한 장일소는 가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투에 휩쓸려 본래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느 폐허 위였다.
쿠웅!
장일소가 순간 땅을 강하게 내밟았다. 그 주변의 땅이 크게 울리며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구쳤다.
‘궤짝?’
화산 제자들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저 인간은 장일소다. 워낙 예상할 수 없는 일들만 벌이는 놈이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어 의심부터 앞선 것이다.
“그렇지.”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그들의 기색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태연히 궤짝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그는 다시 느릿한 걸음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걸어왔다.
“자.”
장일소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청명에게 던졌다. 주위에선 모두가 흠칫 놀랐지만, 청명은 그저 태연히 그것을 잡아챘다.
청명의 손에 들린 것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백천의 입에서 허,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 새하얀 자기 병은 분명…….
“……술?”
술병이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니?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낄낄 웃은 장일소가 나른하게 한숨 섞인 목소리를 흘려 냈다.
“항주의 큰 주루라면 지하에 주고(酒库: 술 창고) 하나쯤은 마련해 두는 법이지.”
“…….”
“함께 싸웠으면, 술 한 잔을 나눠 피를 씻는 게 이쪽의 방식이다. 잘나신 정파 분들께서 저열한 사파 놈들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실지는 모르겠…….”
장일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개를 따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청명은 장일소를 흘끗 보더니 마개를 툭 내던지고 병째 술을 들이켰다. 거침이라고는 없었다.
“……흠.”
장일소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피어났다.
“술맛 나는군.”
그도 손에 들린 병의 마개를 뽑아내고 청명처럼 병째 술을 들이켰다.
확실히 기묘한 광경이었다.
적이지만 함께 싸웠고,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갈 두 사람이 마주 선 채 말없이 술을 들이켠다. 정적으로 가득한 대지에는 두 사람이 술을 마셔 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퍼져 나간다.
선 자리에서 병을 모조리 비워 버릴 듯 술을 넘기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병을 입에서 뗐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뒤얽힌다. 청명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에 비해 장일소의 눈빛은 묘하게 들끓고 있었다.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그래.”
청명이 장일소의 말을 대신 이어 갔다.
“네 목이야.”
둘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어렸다. 숨길 생각도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한참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 장일소가 먼저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가명아.”
“예, 련주님.”
장일소를 빠르게 쫓던 호가명이 화산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를 갈아붙인 그가 말했다.
“북쪽으로 가라. 오직 그 한 길만 허하겠다. 그 길을 벗어나면 너희는 죽는다.”
“…….”
“제발 내 경고를 무시해 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장일소에게 따라붙었다. 화산을 포위하고 있던 홍견과 흑귀보도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멀어지는 장일소를 오래 빤히 보던 청명이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장일소.”
그러자 걸음을 옮기던 장일소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고개만 돌려 청명을 흘끗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청명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사 할이야.”
장일소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청명이 말했다.
“빚은 갚았다. 다음에는 없어.”
“하…….”
새하얀 장일소의 얼굴에 그어진 핏빛 입술이 섬뜩한 곡선을 그려 냈다.
“하하. 하하핫…….”
마귀처럼 나직이 웃던 장일소가 씹어뱉듯 말했다.
“다시 보자꾸나. 화산검협.”
청명을 향해 싱긋 웃어 준 장일소는 들끓던 눈빛을 거두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장일소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화산의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굳은 듯 한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