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77화 (1,078/1,567)

1077화. 다음에는 네 목이야. (2)

“……솔직히 이건 선 넘었지.”

“내 말이.”

윤종의 입에서 허탈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용과 싸우고, 달려드는 이리 떼와 싸웠다. 그 지독한 싸움을 모두 버텨 냈더니, 이제는 범과 이리와 승냥이 떼가 모조리 합심해서 주위를 둘러싼 형국이 아닌가?

계산하고 자시고도 없다. 애초에 장일소와 홍견이라는 우군을 두고도 밀리던 상황이다. 그들끼리 이곳을 돌파하는 건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죠?”

“난들…….”

“뭐라도 생각 좀 해 봐요! 사숙이잖아요!”

“채, 책사는 내가 아니잖아!”

백천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획 돌아갔다.

“바, 방법이 있는 거죠?”

그 기대에 찬 시선을 받은 임소병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있지요.”

“오?”

모두의 눈에 희망이 들어찼다. 믿음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임소병은 단호히 말했다.

“사파 새끼들한테 잡혀 죽으면 고통스러우니, 그냥 이쯤에서 깔끔하게 자진하는 게 명예도 지키고, 시체도 지키고…….”

“미쳤어?”

“뭔 개소리야!”

“이 썩을 산적 놈이!”

“스, 스님. 좀 진정하시고.”

“……아니…….”

비난이 쇄도하자 임소병이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한탄했다.

“제갈공명이 살아 돌아와도 답이 없을 상황인데, 저보고 뭘 어쩌라고.”

“그럼 일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해결했어야지! 뭔 생각으로 장일소 새끼를 도왔냐고!”

“아니면 다 죽을 판이었는데.”

“지금은 뭐가 다르고요?”

“하핫. 조금 늦게 죽지 않습니까? 그 잠시가 중요한 거죠, 잠시가. 적어도 마음의 각오라도 할 수 있을……. 저, 그런데 스님? 주먹은 왜 쥐십니까?”

보다 못한 남궁도위가 조심스레 혜연의 주먹을 움켜잡았다. 이러다가 이 주먹에 어린 황금빛 불광이 임소병의 주둥이에 처박힐 것만 같아서였다.

백천은 화산을 조여 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운 지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한 편인 것처럼 흑귀보 사이로 섞여 드는 홍견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못해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이 줏대도 없는 새끼들.’

어찌 보면 장일소의 장악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말도 되겠지만, 지금 백천은 그런 사실에 순순히 너그럽게 감탄해 줄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데 이 새끼들이!”

조걸이 슬금슬금 포위를 좁혀 오는 흑귀보를 향해 위협적으로 검기를 내뿜었다.

다가오던 흑귀보의 정예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거리를 좁혔다.

지금껏 보이던 반응이 아니다. 흑귀보가 완벽하게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였다.

“이런, 이런.”

누구의 것인지 너무도 명백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러자 화산을 압박해 오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짧은 탄성만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움직임을 단번에 봉해 버린 장일소가 굳어 버린 세상 속에서 홀로 여유롭게 발을 움직였다. 그의 앞을 막고 있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재빨리 좌우로 물러서 길을 터 주었다.

“모를 일이야.”

쏟아지는 경외와 두려움의 찬 시선을 즐기듯, 장일소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황제처럼 거칠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름 아닌 화산을 향해.

“그 기세 좋던 화산의 영웅들께서…….”

희롱하는 듯한 목소리. 그럼에도 감히 반발할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왜 이렇게들 움츠러드셨을까?”

그 말을 들은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더없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이 장일소를…… 함께 싸운 전우를 배신하는, 그런 간악한 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

“그렇게 생각했다면 조금 섭섭한걸?”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금대부가 죽기 직전까지 어떤 심정이었을지 절절히 이해되었다. 주도권을 틀어쥔 장일소만큼 상대하기 끔찍한 놈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마치 장일소가 가슴에 손을 박아 넣고 백천의 펄떡이는 심장을 마음대로 쥐었다 놓았다 하는 기분이었다.

“이거…… 꽤 난처하구나.”

마침내 지척에 도달한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이리도 나를 간악한 놈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데…… 내가 그 기대에 응해 줘야 할지……. 아니면…… 보기 좋게 벗어나 줘야 할지.”

백천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처음부터 보내 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날카로운 말이 쏟아지니 장일소의 얼굴에 묘하게 즐거운 기색이 스쳤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 대꾸하기 전에 뒤를 따르던 호가명이 조금 빠른 어조로 련주님, 하고 입을 뗐다.

그러자 화산을 바라보고 있던 장일소의 시선이 슬쩍 뒤쪽으로 옮겨 갔다.

“죽여야 합니다.”

호가명은 화산, 정확히는 그 중앙에서 눈을 감고 있는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이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저놈들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특히나 저…….”

“쯧쯧. 가명아.”

듣던 장일소가 영 못마땅하단 투로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네가 그리 말해 버리면 내가 너무 막돼먹은 인간이 되어 버리잖니.”

“……죄송합니다. 련주님, 하지만 이 일은…….”

“물론 사파에 신의를 바라는 것만큼 멍청한 짓거리도 없지. 그건 우리도, 심지어는 저들도 알고 있단다. 다만…….”

장일소의 묘한 시선이 화산, 그중에서도 백천에게로 향했다.

“사파에 신의는 없어도 의리는 있는 법이잖니?”

“련주님……. 그렇다 해도, 의리 때문에 실리를 저버리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될 일 아닙니까?”

“끄응.”

장일소는 영 곤란하다는 듯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휘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구나.”

“…….”

“너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자상한 윗사람이라서 말이다. 수하 되는 이가 저리도 간곡히 말하는데, 그걸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도 위에 선 이가 할 짓은 아니잖니?”

“이 새끼가…….”

“그래서 고민이 깊구나. 이를 어찌해야 할지. 하하하핫!”

화산의 제자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는 모양새다. 이미 잡아 놓은 사냥감이니 농락할 대로 농락한 뒤 죽이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백천이 죽일 듯한 눈으로 장일소를 노려보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지금껏 네가 상대했던 놈들과 우리가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는 죽을지언정 농락은 당하지 않아.”

“……호오?”

“그걸 모른다면 그 야들야들한 모가지가 잘려 나갈지도 모르지, 장일소.”

“아니면 대가리가 터져 죽을지도 모르고.”

“배때기에 칼이 쑤셔 박힐 수도 있지.”

하나같이 으르렁대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장일소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살쾡이들치고는 제법 으르렁댈 줄 아는군.”

장일소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보다 보니 궁금해지는걸? 그 목이 잘려 나갈 때도 과연 그렇게 이를 세울 수 있을지 말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아니지, 아니지. 너희에게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정정해야겠군.”

장일소의 입꼬리에 사특한 미소가 맺혔다.

“동료의 목이 바로 옆에서 잘려 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도 허세를 부릴 수 있을까?”

“너…… 이 새끼!”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두 눈에 핏발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함께 마교를 상대하고 연이어 흑귀보까지 상대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었던, 장일소에 대한 미묘한 호감이 모조리 싹 달아났다. 머리로 피가 몰렸다. 백천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듯이 땅을 내리밟았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해 봐.”

백천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감히 장일소를 앞에 두고 시선을 돌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상은 가능했다.

“처…… 청명아!”

“야, 인마!”

“……더럽게 늦네. 진짜.”

청명을 둘러싼 이들의 입에서 안도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고작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그들은 흑귀보와 홍견에게 둘러싸여 있고, 천하의 장일소와 천면수사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눈을 뜬 순간,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어찌할 수 없는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마치 눈을 뜬 이만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을 쭉 훑어본 청명이 장일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장일소 역시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목을 자른다고?”

북풍한설이 불어치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홍견이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라도 뛰어들어 장일소의 전방을 지킬 수 있도록.

“한번 해봐. 누구 목이 잘릴지.”

“흐음.”

장일소가 손을 들어 제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이리되면 분명 이야기가 좀 달라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 것 아닌가? 되레 협박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응, 화산검협?”

“그러니까 해보라고.”

백천은 아직 청명의 몸 상태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이제 못 할 것도 없잖아? 안 그래?”

“……무슨 의미지?”

“쓸모가 다한 사파 새끼를 굳이 살려 둘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 순간 화산의 제자들은 분명히 보았다.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장일소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는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장일소의 굳은 표정은 애초부터 그런 적 없었다는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어느새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장일소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쓴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쓴 거다?”

“그 정도면 삼생의 영광이지. 죽여 거름으로 쓰는 게 최선인 사파 새끼를 그렇게라도 써먹어 줬잖아? 아아, 감사는 굳이 안 해도 돼. 도구한테 감사 인사를 받는 사람은 없으니. 안 그래?”

“하하핫……. 화산검협.”

장일소의 얼굴이 뒤틀린다.

“여전히 사람 속 긁어 놓는 것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주는군. 그건 인정해야겠어. 하지만…… 조심해야지. 내 인내심이 그리 대단치 않을 수도 있잖니?”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잘하는 건 따로 있거든.”

청명이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움켜잡았다.

“꼴같잖은 사파 새끼 목을 잘라서 저승에서나마 제 주제를 알게 해 주는 것. 어때? 한번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장일소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받은 청명 역시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정(正)과 사(邪).

두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지금 이곳에서 서로에 대한 악의를 단 한 치의 가감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교와 흑귀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기에 실낱같이 유지되던 유대. 그 끈이 끊어지는 순간, 이들은 그저 가장 증오해야 할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