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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76화 (1,077/1,567)

1076화. 다음에는 네 목이야. (1)

어지간해선 이 말을 지금 입 밖으로 내선 안 된다는 걸, 백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이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말이야 백천이 꺼냈지만, 사실 이건 화산의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파의 생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들로서는 갑자기 장일소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흑귀보와, 만금대부를 암습한 그의 수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여전히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흑귀보 놈들 때문에 저 너머의 상황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그들의 곁에는 이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해 줄 사파 놈이 있었다.

“흠.”

임소병이 펼쳐 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천면수사가 장일소에게 붙은 모양이군요.”

“……천면수사요?”

백천이 눈을 끔뻑이며 장일소 쪽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만금대부와 그의 앞에 서 있는 그의 수하…….

“그럼 만금대부의 수하가 배신한 게 아니라…… 저자가 하오문의 문주인 천면수사란 말씀이십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천면수사의 역용술은 천하일절이라, 그 누구도 그의 변용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만금대부가 제 측근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할 줄이야.”

말투는 담담했지만, 임소병 역시 지금 꽤 놀란 상황이었다.

‘소름 돋는군.’

만금대부가 알아채지 못했다면, 임소병 역시 똑같이 당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물론 만금대부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범의 목을 따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 그 누가 등 뒤에서 어슬렁대는 토끼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상황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곳이 또 강호지.’

임소병은 새삼 저 말도 안 되는 역용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 실감했다. 물론 천면수사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만큼 쉽사리 사용할 수 있는 수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럼 장일소 놈은 처음부터 천면수사를 숨겨 놓고 상황을 이리 끌어갔다는 겁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백천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 채 장일소를 보았다.

‘뭐 저런 인간이…….’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이제 장일소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 장일소란 인간이 얼마나 상식을 벗어나 있는지 이미 충분할 정도로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 순간 그들은 대체 저 장일소라는 인간의 머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그럼…….”

윤종이 놀란 얼굴로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녹림왕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말에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립니까, 사형?”

“아니…… 아까 돌아가는 상황이…… 분명 녹림왕께서 장일소와 보조를 맞춰 주는 것 같았잖느냐?”

“그러고 보니…….”

조걸과 윤종, 그리고 백천이 동시에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임소병이 입가를 살짝 씰룩인다 싶더니, 이내 부채를 쫙 펴 들고는 제 얼굴을 반쯤 가린다.

“후후후후.”

“…….”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장일소가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지략이라는 측면에서는 감히 저를 따라올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몰랐네.’

‘몰랐구나.’

‘허세는.’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지자 임소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장일소 놈이 뭔가 준비를 해뒀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천면수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저놈이 뭔가를 준비했다는 걸 짐작한 것만으로도 당연히 칭송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 조걸 도장? 윤종 도장?”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그는 누구에게 감탄해야 할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천면수사를 숨겨 둔 채 이 모든 상황을 끌어낸 장일소에게 감탄해야 할지, 장일소가 숨겨 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보조를 맞춰 낸 임소병에게 감탄해야 할지.

‘그래, 이 양반 녹림왕이었지.’

갑자기 확 실감이 났다. 항상 병약하고 푼수 같은 모습만 봐서 잊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 녹림을 이끌며 저 만인방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온 이인 것이다. 그가 아는 녹림과 만인방의 전력 차이를 생각한다면 임소병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이들의 지략인가?’

어쩐지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그런데 흑귀보는 왜 이걸 지켜보고만 있는 겁니까?”

남궁도위가 의아해하며 묻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리가 끝난 겁니다.”

“정리가 끝나요?”

“예.”

남궁도위는 아무래도 영 이해를 못 한 눈치였다. 임소병은 부채로 제 머리를 톡톡 쳤다. 역시 정파인 이들에게는 설명이 더 필요할 듯싶었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 봅시다. 화산이 무당이랑 싸웠는데, 장문인인 현종진인께서 무당 장문인인 허도진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여러분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무당 새끼들 그날로 다 뒈지는 거지.”

“절대 가만히 안 둔다!”

“무당산에 불을 질러 버리고 도망쳐 나오는 놈들마다 등을 칼로 쑤셔 죽일 테다!”

“…….”

“…….”

마지막으로 외쳤던 조걸은 순간 제게 쏠리는 시선을 감지하고 움찔했다.

“왜, 왜요? 제가 뭐 못 할 말이라도…….”

“……사람인가?”

“인성…….”

“이 정도면 청명이도 놀랐다.”

“아니! 마지막 말은 좀 심하잖습니까!”

마지막 말에는 매우 큰 억울함을 느낀 조걸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소병이 그에게 쏠린 시선을 거둬 가 주었다.

“예. 그게 정파의 사고방식이지요. 하지만 사파에서는 그런 식의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만한 충성심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건 사파가 가진 환경적인 문제기도 하다.

서로 체면을 차리는 정파와 달리, 사파는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분쟁 속에서 살아간다. 그때마다 한쪽이 완전히 몰살할 때까지 전쟁을 벌여 댄다면 사파 자체가 존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화산의 제자들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는 걸 직접 보는 건 천지 차이였다.

“그러니까 이거…….”

조걸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종남이랑 싸우다가 졌다고, 그날부터 종남의 제자가 된다는 그런 상황 아닙니까?”

“이 새끼야! 비유를 해도…….”

“어디 그런 막돼먹은 소리를 지껄여! 미쳤어?”

“토할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일이다. 화산이라는 문파에 소속감을 가진 그들에겐 천지가 뒤집혀도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들은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반발은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아무리 이익을 더 중히 여기는 사파라고는 하지만, 제 수장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걸 대체 어떻게 그냥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단 말인가?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만약 현종이 지금 같은 일을 당하고 있었다면, 이곳에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장일소를 죽이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이게 사파와 정파의 차이인가?”

생각 이상으로 간극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서로 속한 곳이 다른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성향과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섞일 수 없는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백천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그럼 조금 전의 장일소의 행동 역시?”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임소병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에겐 ‘승리한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더 강하다’입니다. 장일소가 제 존재감을 보여 주지 않고, 그저 계략만으로 승리했다면, 저리 쉽사리 복속을 얻어 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역시…….”

“간단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일이기도 하지요.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따를 만한 이라는 걸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하는 겁니다. 위험한 짓거리이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뭐…… 보다시피.”

그렇다는 건, 천면수사가 만금대부를 암습한 시점에 이미 장일소는 그다음 수를 그리고 있었을 거란 얘기다. 그 시점에 그에게 중요한 건 만금대부를 마무리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사라질 흑귀보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것이었을 테니까.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이제 적어도 사파에서는 정말로 장일소와 대적할 자가 없구나.’

장일소는 원래부터 사패련의 련주였다.

하지만 이번 장강 사태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장일소가 사패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흑귀보와 하오문, 두 곳은 저 장일소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장일소는 이미 장강에서 수로채를 먹어 치웠고, 지금 이 자리에서 흑귀보를 장악했다. 그리고 저 천면수사마저 장일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건 단 하나를 의미한다.

완전한 사파일통(邪派一通).

그 불가능해 보였던 위업이 마침내 이 순간 달성된 것이다. 어쩌면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백천이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을 떨던 바로 그때였다.

“어?”

감상을 깨트리는 조걸의 목소리가 백천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자, 잠시만요, 사숙. 그럼 지금 장일소가 사파를 일통한 거 아닙니까?”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뭔 뒷북을…….”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또 뭐?”

“그, 그렇다는 건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 장일소의 부하가 되었다는 뜻이잖습니까?”

“갑자기 무슨 뻔한 소리를…….”

말을 하려던 백천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조걸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점점 초점이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렸다. 천천히 이쪽으로 방향을 트는 흑귀보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질린 듯한 조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

“우리…… 지금 엿 된 거 아닙니까?”

날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흑귀보, 아니, 이젠 흑귀보가 아니라 그저 사패련이라고 불러야 할 이들이 보였다. 그 인의 장막 뒤에서 장일소가 화사하고 사특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백천의 입에서 절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아래로 내렸던 검을 슬며시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런 것 같은데?”

바뀐 사냥감이 누군지를 파악한 홍견 역시 모두 잔인한 미소를 내건 채 화산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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