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5화. 누가 실수를 했다고? (5)
“하하하하하하하핫!”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는 이와, 그 앞에 절망한 듯 고개를 숙인 이.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확실한 광경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결국 세상의 눈길은 승자가 끌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순간, 이곳에 있는 이들의 눈을 잡아끈 것은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장일소가 아니라, 그 앞에 어깨를 늘어뜨린 만금대부였다.
만금대부 공야월. 강남의 서쪽을 완벽하게 장악한 흑귀보의 보주. 신주오패의 수장 중 하나이자, 사파를 대표하는 검수.
한때 강호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이름이 무너진다. 그 이름에 어려 있던 영광과 두려움은 그저 빛바랜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강호는 애초에 그런 곳이니까.
만금대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더 이상 억울함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회한조차 거부한 그의 두 눈에 담긴 것은 그저 의문이었다.
“……처음부터.”
입이 열리며 잔뜩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물론.”
“……어떻게?”
장일소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건 너무 뻔한 질문이군.”
승자가 베푸는 아량이라기에는 너무도 차가웠고, 패자에 대한 동정이라기에도 너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네가 만금대부니까.”
“…….”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
대답이라 할 수도 없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만금대부는 그저 납득하고 말았다.
“……그래.”
만금대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겠지…….”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찌른다. 그건 사파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만금대부에게는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이토록 간단한 일이거늘…….
“……처음부터 판 함정이었나?”
“그럴 리가.”
장일소가 비웃음을 입가에 담는다.
“아무리 나라고 한들, 저 마교 놈들이 날뛰는 것까지 예상할 순 없지.”
“그때부터…….”
만금대부가 공허한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천면수사를 불렀지?”
그게 만금대부에게 남은 마지막 의문이었다.
설령 장일소가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 하더라도, 천면수사가 직접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혹 장일소가 숨겨 둔 만인방의 병력이 있지는 않을지 확인을 거듭했고, 혹시 장일소가 여력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지 돌다리를 두들기는 심정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하오문의 천면수사가 이곳에 도착해 있으리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일소에게 가장 비협조적이던 게 천면수사 아닌가.
장일소가 슬쩍 고개를 돌려 위충 모습의 천면수사를 바라보았다.
“저리 간절히 묻는데 대답 정도는 해 줘야겠지.”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련주.”
천면수사가 답했다. 과하진 않지만 확연한 예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는 장일소를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차디찬 눈으로 만금대부를 내려다보았다.
만금대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자가 위충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겉모습만으로는 여전히 구분해 낼 수가 없다. 저 서릿발 같은 눈빛이 아니었다면 위충이 배신했다고 믿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련주에게 비협조적이던 내가…… 왜 이곳에 있냐고?”
천면수사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만금대부. 너쯤 되는 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이 강호에는 영원한 건 없는 법이지. 그게 적이든 친구든.”
그는 껄껄 웃어 댔다.
“그리고 딱히 련주에게 협조할 마음이 없던 나를 이런 상황으로 내몬 것은 만금대부 바로 자네가 아닌가?”
“……나?”
“흑룡왕이나 자네나 팔을 잃지 않았나?”
“…….”
“그전까지 나는 그저 은인자중하고 있으면 될 일이었지. 하지만 자네들 두 사람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게 되어 버린 순간, 내 입장이 곤란해졌단 말일세.”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는 듯 천면수사가 혀를 찼다.
“사패련은 강남을 지배하는 네 문파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다른 두 곳이 힘을 잃는다면 련주의 시선이 누구에게로 향하겠는가? 그러니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이제부터 나를 가장 경계하게 될 련주에게 대적하든가…… 충성을 바치든가.”
천면수사가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와중에 련주께서 나를 직접 부르시고 친히 옆자리를 내어 주신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스스로 모자람을 알고 충성을 바칠 수밖에.”
“네 속에는…….”
내내 입술을 짓씹던 만금대부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네 속에는 정말 없었나? 장일소만 죽일 수 있다면 사패련의 정점에 설 수 있었을 텐데?”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설령 천면수사가 그럴 작정으로 이곳에 왔다고 해도, 장일소의 목숨은 분명 경각에 달해 있었다. 그가 천면수사였다면 장일소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 만금대부를 암습했을 것이다.
만금대부의 운명이야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바꿀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그리되었다면 장일소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는 일 정도는 가능했을 텐데.
“물론 내 안에도 있었지. 그 유혹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세.”
장일소가 바로 앞에 있음에도, 천면수사는 자신이 장일소의 목숨을 놓고 갈등했다는 말을 거리낌도 없이 해 댔다. 그리고 장일소 역시 그런 천면수사에게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 욕심이 자네보다 더 컸다면, 이해가 되나?”
만금대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천면수사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강남땅에서 우리끼리 아웅다웅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이미 보고 말았거든, 이 척박한 땅이 아니라, 저 기름진 땅 역시 그림의 떡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건 네 것이 될 수 없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천면수사가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나는 궁벽한 외지의 지배자로 남느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노리겠네. 딱히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선택이지.”
그의 시선이 다시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하오문은 태생부터가 가장 위에 설 만한 곳이 아니지. 정보란 이용해 주는 이가 있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이니.”
“……큭큭.”
가만 듣고 있던 만금대부가 자조하듯 웃었다. 천면수사야 그저 제 입장을 말하는 것뿐이겠지만, 만금대부의 귀에는 그 모든 말들이 그가 걸맞지 않은 욕심을 부리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질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천면수사가 빙긋 웃으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지.”
“……이유?”
“반드시 누구 한 사람을 위에 모셔야 한다면…… 그게 자네는 아니어야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
“어쩌면 그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군.”
만금대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면수사가 왜 장일소에게 붙었는지 그 진짜 이유야 알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다. 누군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만금대부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저 장일소는 해냈다. 그게 승부를 가른 가장 결정적인 차이였다.
천면수사를 바라보던 만금대부의 시선이 장일소에게로 옮겨 갔다.
“화산도 알고 있었나?”
“그럴 리가.”
“그럼…….”
만금대부의 눈에 다시 의문이 어렸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럼 마치 서로 짠 듯 움직였던 그 대처는 무엇이었느냐고, 어떻게 서로 대화 한 번 하지 않고 그럴 수 있었느냐고.
하지만 이어진 말은 만금대부의 그 모든 의문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군, 공야월.”
장일소가 한껏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부터가…… 네가 이 판에 낄 자격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란다. 사람은 개가 하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지만, 개는 사람이 하는 생각을 알지 못하는 법이니까. 알겠니?”
그 말이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만금대부의 폐부를 찔렀다. 만금대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긍지 높은 패배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장일소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부심마저 앗아 갔다.
“그런가……. 애초에…… 내게는 자격이 없었군.”
모든 것을 체념한 만금대부는 마지막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흑귀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수족처럼 키워 낸 이들이건만, 지금은 누구도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오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이건 지금껏 그가 수없이 봐 온 광경이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까지는 당연하게도 장일소의 자리에 서 있었던 만금대부가 이제는 그동안 그가 죽여 온 이들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뿐.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 그저 그것뿐이다.
“……죽여라.”
“…….”
“패자의 목숨을 끊는 건 승자의 권리겠지. 패배를 인정한다. 죽여라, 장일소.”
만금대부가 눈을 감았다. 장일소가 천천히 몸을 숙이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만금대부는 장일소를 죽음 직전까지 몰았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그의 칼날은 장일소의 심장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패했지만, 어쨌든 그는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순간 모든 미련을 버렸다. 제 손에 들어왔던 것이 흘러나감에도 악을 써 대지 않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훌륭하군.”
장일소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만금대부야.”
그리고 만금대부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그 손길에 만금대부가 작게 움찔했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군. 공야월 네가 지금껏 봐 온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 말에, 만금대부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제 앞에 있는 장일소와 시선을 맞추었다. 묘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을 본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실낱같은 기대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래서…….”
순간, 장일소의 얼굴이 잔인하게 뒤틀린다.
“마음에 안 들어.”
장일소의 손이 만금대부의 얼굴을 덥석 움켜잡았다. 머리뼈를 뚫고 들어간 손가락에서 북해의 칼바람처럼 시린 경기가 뿜어졌다.
“끄……. 끄아아아아악!”
급작스레 파고드는 기운에 만금대부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장일소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래……. 이래야지. 이게 죽음이라는 거다, 공야월. 목숨을 건 도박에서 패했으면 더럽고 비참하게 죽어야지. 고상한 척 주둥이를 털어 대면 안 되지. 응?”
“끄……. 끄르륵……. 끄륵…….”
만금대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축 늘어진 손발이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는 그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왜? 잠시 희망이라도 품으셨나?”
“끄르르륵…….”
“똑똑히 알아야지, 공야월. 우리 같은 놈들에게 좋은 죽음 같은 건 없어. 살아서 마귀가 되든가, 더럽고 비참하게 죽든가. 둘 중 하나뿐이지.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
장일소의 눈에 흉포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퍼석!
끝내 만금대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머리를 잃은 시체가 맥없이 엎어졌다. 그 비참한 시신을 보며 누가 흑귀보의 보주이자 신주오패의 수장으로 천하를 횡행했던 만금대부를 떠올리겠는가?
장일소가 제 손을 적신 붉은 피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사람이 흘리는 피는 다 같은 거란다. 너도, 나도 말이야.”
손을 털어 낸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싸늘히 식어 가는 만금대부의 시신 위로 차가운 강남의 바람이 쓸쓸히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