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4화. 누가 실수를 했다고? (4)
우드드득!
옆구리로 파고든 손이 더욱 깊이 밀려들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참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고통에 만금대부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비명을 질렀다. 하나 지금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옆구리를 파고든 천면수사의 손도, 그 손에서 흘러나와 전신을 헤집고 있는 내력도 아니었다.
바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그 자체였다.
‘어…떻게……?’
왜 천면수사가 이곳에 있는가? 대체 어떻게?
“쯧쯧쯧.”
만금대부의 옆구리에 손을 박아 넣은 위충, 아니 천면수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래도 주판알을 잘못 튕긴 모양이군, 만금대부.”
“끄윽…….”
만금대부의 몸이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벌벌 떨렸다. 그러자 위충 모습의 천면수사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너는 대단한 검수야.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 말에는 만금대부에 대한 인정과 조롱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만금대부는 분명 좌수로 검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측에서 자신을 노려 오는 천면수사의 존재를 느낀 순간, 만금대부는 저도 모르게 존재하지 않는 우수를 움직여 검을 뽑아 휘두르려 하고 말았다.
우수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평생을 단련해 온 그의 육체가 가장 위험한 순간, 가장 손에 익은 행위를 반복해 버린 것이다.
“쿨럭…….”
천면수사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 사실을 노리고 공격했음에도 만금대부의 오른쪽 어깨가 움찔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확실히 사파제일검의 명성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파제일검의 꼴이 꽤 처량하게 되었군.”
천면수사가 조롱하듯 손목을 장난스레 뒤틀었다.
우드드득.
“끄아아아아악!”
동시에 만금대부의 입에서 어찌할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 대부!”
“이 개자식이!”
등 뒤에서 벌어진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 화산과 만인방을 몰아붙이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싸움을 제쳐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담아 낼 수 있는 모든 살기를 담아 천면수사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안 되지. 안 돼.”
하지만 천면수사는 그 쏟아지는 살기 속에서도 여유롭게 만금대부의 옆구리에 박힌 손을 뒤흔들었다.
“끄……. 끄으으윽…….”
만금대부의 안색은 이제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입에선 피가래가 끓어올랐다.
“너희 보주의 심장이 터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
능글대는 천면수사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똑똑히 파고들었다. 떨리는 시선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는 만금대부에게로 향했다.
“푸, 풀지……. 아아아아아아악!”
만금대부가 하려던 말은 이내 처절한 비명에 뒤덮여 버렸다. 흑귀보 무사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만금대부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적도가 옆구리에 살수를 박아 넣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로 구해 낸단 말인가? 더구나 만금대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도 아니고, 하오문의 수장인 천면수사다.
차라리 범의 아가리에 물려 있는 토끼를 구해 나오는 게 더 쉬울 상황이 아닌가?
아니면, 저 천면수사의 말대로 포위망을 풀고 물러난다?
그런다 해서 만금대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저 천면수사가 정말 만금대부를 순순히 놓아주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흑귀보의 정예들은 갈팡질팡하며 고뇌했다. 그때 귓가에 뱀이 위협하는 듯 음산한 목소리가 스쳤다.
“뭘 고민하지?”
만금대부와 천면수사에게 꽂혀 있던 이들의 시선이 순간 뒤로 획 돌아갔다. 누가 뭐라 해도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이에게로.
“의리란 건…….”
장일소. 흑귀보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모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지키는 거란다.”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너희 눈엔 저자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지?”
그 말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못한 자. 그게 지금 만금대부의 처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처지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이곳에서 장일소를 죽인다 한들, 만금대부를 잃은 그들이 분노한 만인방과 하오문의 공세를 버텨 낼 가능성은 없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단다.”
저벅.
장일소가 태연하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여기에서 멈춘다면 너희에게 죄를 묻지는 않을 거란다. 오히려 너희는 사패련의 이름 아래서 지금까지 누리던 것 그 이상을 얻게 되겠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지금 장일소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천하의 패군이라 해도 저 정도로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는 삼류 무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흑귀보의 정예들에게 태연하게 제 몸을 들이미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감히 장일소를 향해 도를 날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발.
또 한 발.
장일소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흑귀보를 향해 다가왔다.
힘을 잃은 건 장일소였으나, 이제 오히려 압력을 받는 쪽은 흑귀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진 다가오는 장일소를 향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었는데, 지금은 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는 상황.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침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선 장일소가 귀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지금 당장 내 목을 잘라 버리면 되는 거란다.”
저벅.
장일소의 바로 앞에 선 이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알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곧장 장일소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손을 차마 뻗지 못했다.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비틀리듯 말려 올라갔다. 새하얀 얼굴이 피로 얼룩져 있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찌할 테지?”
장일소의 존재감에 눌려 버린 흑귀보의 정예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어쩌면 그건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사파인의 본능적인 습성일지도 모른다.
장일소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온화하게 웃었다. 기특하다고 칭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옳지. 착한 아이구나.”
“…….”
저벅. 저벅.
장일소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를 에워싸고 있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좌우로 점차 물러났다. 장일소의 앞에 만금대부에게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이…….’
화산 일행은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 물러서는 흑귀보의 정예들과 장일소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장일소는 조금 전까지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던 이들의 한가운데를 태연히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패군이라지만, 저게 정말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그의 느릿한 걸음은 결코 멈추는 일이 없었다.
그가 향하는 걸음 앞에 선 이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분분히 물러섰고, 누구 하나 감히 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아니, 달려들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자에게 굴복하며, 복종한다. 그것이 사파의 습성.
그리고 이 순간 흑귀보의 정예들은 똑똑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수도 없이 논해 온 강함이 그저 일신의 무력이나 세상을 뒤흔드는 귀계(鬼計)만은 아님을.
강함이란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호가명과 홍견이 재빠르게 장일소의 뒤로 따라붙었다.
장일소 하나의 존재감도 감당하지 못하던 흑귀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설 수 있을 리 없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이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지듯 길을 활짝 열었다.
장일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검은 장막처럼 앞을 막아서고 있던 흑귀보가 열어 낸 길. 그 길의 끝에서 옆구리를 꿰뚫린 만금대부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빛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까? 불신? 체념? 아니면 증오?
아니, 어쩌면 그 모두일지도 모른다.
기세에 눌려 버린 흑귀보를 지나쳐 황량하기 짝이 없는 대지를 밟으며 걸어간 장일소가 마침내 만금대부의 앞에 도달했다.
그 순간 천면수사가 만금대부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제 손을 거칠게 뽑아내었다.
“크흑!”
만금대부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옆구리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땅에 머리를 박은 만금대부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연신 떨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만금대부를 떨게 하는 게 고통이 아님을.
그를 지배하고 있는 건 짙은 모멸감. 그리고 어쩌면…….
장일소를 올려다보는 만금대부의 턱이 떨렸다. 핏발 선 그의 두 눈과 장일소의 서늘한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맞닥뜨렸다.
그 순간 만금대부의 뇌리를 지배한 생각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천하에서 누군가를 이리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이 이상 잘 어울릴 사람이 또 있겠는가 하는.
“흐음.”
그 순간 장일소의 입가에서 탄식 같은 비음이 새어 나왔다.
무표정하게 만금대부를 내려다보던 장일소가 입술 끝을 삐딱하게 끌어 올리며 물었다.
“누가…… 실수를 했다고?”
만금대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퍼드득 경련했다.
“아니지. 만금대부. 아, 공야월이라고 할까?”
장일소의 비릿한 미소가 만금대부의 두 눈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실수를 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란다.”
장일소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땅에 처박힐 듯한 상체를 하나 남은 팔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는 만금대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자…… 장일…….”
“대답해 보렴, 공야월. 네가 내 목을 물어뜯으러 올 거란 사실을 정말 내가 모른다 믿었니? 응?”
만금대부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질수록 장일소의 얼굴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점차 짙어졌다. 그 표정은 흡사…… 마치 인간을 고문하며 즐거워하는 지옥의 마귀가 지을 듯이 보였다.
장일소가 커다란 손을 뻗어 만금대부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우드드득.
금방이라도 쥐어 터뜨릴 듯 손아귀에 힘을 점차 더하며, 장일소는 만금대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나 알려 주지, 만금대부.”
“…….”
“나는 말이야.”
실로 부드럽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너 같은 놈은 절대 믿지 않아.”
“으…….”
“너는 타인을 모두 파악하고, 모든 것을 다 계산한다고 여겼겠지. 그런데 공야월……. 어쩌지? 네가 한 계산에 정작 ‘너’는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타인이 너를 어찌 생각하는지 말이야.”
“장일…소…….”
장일소가 마귀처럼 웃어 댔다.
“그 잘난 주판이 박살 난 것 같지 않니? 응, 공야월?”
결국 비통에 찬 만금대부가 소리 높여 절규하기 시작했다.
“장일소오오오오오오오!”
“하하하하…….”
그러자 결국 장일소가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핫!”
비명과도 같은 만금대부의 절규와 장일소의 광소가 적막으로 가득한 대지에 처참하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