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누가 실수를 했다고? (3)
“타아아아아압!”
조걸의 찌르기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허공을 갈랐다. 쾌속과 간결을 특징으로 삼는 그의 검은 이런 상황에서 화산의 누구보다도 빛났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조걸의 곁에 선 윤종이 시시때때로 고함을 쳤다.
“나가지 말라고, 인마!”
“아! 안다고요!”
조걸의 발이 움찔움찔할 때마다 윤종이 귀신같이 그 낌새를 알아채고는 목줄을 잡아채는 것이었다.
조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은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어디로 시선을 두어도 사방을 에워싼 적들이 보인다.
‘숨을 못 쉬겠어.’
수의 차이가 너무 크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끝이 없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내력의 소모를 최소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니 이렇게 싸우면서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대로 소모전을 반복한다면 결국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이쪽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 더…….’
“버티라고!”
“제길!”
조걸의 입에서 결국 쌍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설프게 상처를 입은 놈들이 다시 전열에 합류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숨통이라도 확실하게 끊어 놓을 수 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을 테지만, 제자리에서 받아치기만 하는 방식으로는 부상자의 합류를 막을 도리가 없다.
“도사가 참는 것도 못 하면 어쩌자는 거냐!”
“안다고요, 젠장! 하여튼 잔소리는!”
조걸이 이를 악물고 검을 떨쳤다. 발을 뻗을 수 없으니, 일 검 일 검을 더 정확하게 쓰는 방법밖에 없다.
조걸의 검기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걸 보며 윤종은 굳은 얼굴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버텨야 해.’
조걸이 왜 저리 구는지 모를 윤종이 아니다. 당장 앞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진데, 성질 급한 조걸이야 오죽하겠는가?
‘점점 늪에 빠져드는 것 같아.’
떼구름 같은 적을 돌파해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적을 상대로 버티는 건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싸움을 끝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력이 빠져나간다는 걸 이리 뼈저리게 실감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나이에 비해 괴이할 만큼 내력이 높은 화산의 제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멸했을지도 모른다.
쿵!
그때, 강렬한 진각 소리가 들려왔다.
파아아아아앗!
붉은빛을 띤 검기가 순식간에 허공을 수놓았다. 수십의 검영이 앞에서 달려드는 인원들은 물론이고, 그 좌우로 달려드는 이들마저 단번에 쓸어 내었다.
“크아아아아악!”
검기의 발출은 그저 빠르게 찌르는 것에 불과하니 치명상을 입히는 것까진 무리였다. 하지만 두려움 없이 달려들던 적들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건 가능했다.
윤종은 검기를 발출한 이를 보았다.
백천이 이를 악물고 또다시 검기를 뿜었다. 지쳐 가는 오검의 상태를 파악한 그가 무리해서라도 분위기를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오오오오오오오오!”
백천이 벌려 놓은 공간으로 황금빛 불광이 밀고 들어간다. 혜연은 백천을 지원하며 조그만 틈도 놓치지 않고 권기를 찔러 넣었다.
“후욱! 후욱! 후욱!”
언제나 고른 호흡을 유지하던 혜연의 입에서 거친 숨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 같던 유이설도, 언제나 쾌활을 잃지 않던 당소소의 검도 점점 무거워지고, 무뎌지고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면서 끝없이 밀려오는 적의 공세를 버텨 낸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백천 도장! 전위를 바꿉시다!”
등 뒤에서 전전긍긍하던 남궁도위가 소리쳤다. 하지만 백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 죽어 가는 양반이!’
그 패기야 높이 사 줄 만하지만, 남궁도위가 버텨 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평소의 그라면 모를까.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느라 내력을 모조리 소진해 버린 그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백천이 슬쩍 뒤를 돌아본 순간, 임소병과 눈이 마주쳤다. 그게 전부였지만, 다시 앞을 보며 외쳤다.
“버텨 내라!”
검을 떨치듯 휘두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믿는다!’
임소병을 믿는 게 아니다.
굳이 그 임소병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청명의 판단을 믿는 것이다. 놈이 아무 생각 없이 임소병을 끌고 왔을 리가 없으니까. 청명이 믿는 놈이라면 그들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였다.
“카하아아아앗!”
화산의 제자들이 흔들어 놓은 곳으로 시뻘건 사냥개들이 달려들어 덮쳤다.
“홍견?”
놀란 백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황급히 장일소 쪽을 바라보니, 싸우면서도 이쪽으로 시선을 둔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수가 넘는 홍견을 이쪽에 붙이느라 제 목숨이 위태위태해 보이는 상황이건만,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났다.
‘선물 고맙다. 망할 놈!’
짓씹듯 속으로만 툭 뱉은 백천은 다시 전장에 집중했다.
“이 악물고 청명이 놈을 지켜라!”
그의 검이 환상처럼 허공을 갈라 냈다.
“이…….”
만금대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쏠려 버린 흑귀보의 옆구리로 홍견이 파고든다. 그가 짠 진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원래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 없었다. 저 한가운데에 만금대부가 있었을 테고, 그는 결코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만금대부라 해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잔뜩 흥분해 머리에 피가 몰려 버렸으니 뒤에서 외쳐 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지독하게 반복해 온 수련 덕분에 아직은 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게 무너지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그는 똑똑히 보았다.
“장일소!”
장일소가 마치 유혹하듯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말이다. 흥분해 버린 흑귀보의 두 눈에 그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천하의 장일소가 힘을 잃은 채 제 앞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인데, 누가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인방의 방주이자 사패련의 련주인 패군 장일소의 명줄을 제 손으로 끊어 놓을 수 있을, 다시없는 기회인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포진이 지금 이 순간 그의 손을 떠나 제멋대로 틀어지고 뒤흔들리고 있었다.
‘이 멍청한 놈들!’
그저 시키는 대로 제 역할만 차분하게 해 낸다면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거늘, 왜 저리 멍청하게 날뛴단 말인가?
‘안 돼.’
분명 지금 장일소는 제 목숨을 스스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만금대부의 포위망에 확실한 균열을 만들어 낸다. 당장은 저 균열을 돌파해 낼 힘이 없겠지만…….
만금대부의 시선이 획 돌아 화산 쪽으로 향했다.
‘저놈이 운기를 마친다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뻔하지 않은가?
만약 이곳에서 저놈들을 놓치는 일이 벌어진다면 만금대부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만큼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남은 이들을 모조리 투입해라.”
“계획과는…….”
“어서!”
“예!”
앞에 서 있던 예비대들이 모조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비장의 한 수로 남겨 둔 이들이니만큼, 지금 저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균열을 막을 수…….
‘아니, 부족해…….’
까드드득.
만금대부가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들만으로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저곳은 본디 만금대부가 있어야 할 자리니까.
‘어떻게 하지?’
머릿속으로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도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가 뛰어드는 게 나은가.’
만금대부가 뛰어든다면 포위망을 안정시키는 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의 무력은 반 이상 소실되었지만, 그의 지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우선은 조금 위험하더라도…….’
유혹을 이기지 못한 만금대부가 막 발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잠깐.’
그의 발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장일소는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장일소는 지금 포위망을 뒤흔들고 있다. 자신의 목숨까지 미끼로 써 가며 말이다.
왜? 저 화산 놈이 깨어나면 그에게 의지해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 장일소라는 이가 이런 상황에, 정말 타인에게 의지해 제 목숨을 맡기는 이였던가?
“하……. 하핫.”
만금대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알 것 같다. 장일소가 왜 저런 짓거리를 해 댔는지.
그는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죽음의 외줄을 타고 있는 장일소를 보았다.
“목적은…… 처음부터 나였군. 장일소.”
만금대부는 계획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가장 혐오하는 자. 장일소는, 안배한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만금대부가 직접 나설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장일소가 만든 명확한 균열은 애초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균열 자체가 만금대부를 끌어당기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만약 만금대부가 한쪽 팔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머뭇거릴 것도 없이 당장 저 균열을 향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무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에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이 순간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은 단자강이었다. 단자강이 끊어 낸 만금대부의 팔이 그의 목숨을 구해 낸 것이다.
“……좋은 수였어, 장일소.”
만금대부의 눈이 급속도로 냉정을 되찾았다.
저런 상황에서도 이런 함정을 팔 수 있다는 게 장일소의 대단한 면 중 하나이나, 이는 다시 말해 장일소에게도 제 목숨을 미끼로 거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단 뜻이다.
‘내가 이겼다, 장일소.’
만금대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위충.”
“예.”
“남아 있는 호위들까지 모두 투입해라.”
“보주님?”
“괜찮다. 기껏해야 발악일 뿐이야.”
만금대부가 제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의 망설임은 어디에도 없다.
“설사 저놈이 운기를 마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틈만 내어 주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있다. 투입해라!”
“……예!”
위충의 지시에 따라 만금대부의 주위를 지키던 호위들까지 모조리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파아아아앗!
선두로 뛰어든 흑귀보 최고 전력들이 힘겹게 버티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을 단번에 밀어붙이고, 날뛰고 있던 홍견을 먹어 치울 듯 공격해 댔다.
요동치던 전열이 순간적으로 제 색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지독한 놈들.”
만금대부가 고개를 내저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임소병이나 장일소나 같은 것을 노렸던 게 분명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미리 짐작했을 리도 없던 놈들이 상황이 벌어지자마자 미리 짠 것처럼 서로에게 호응하며 전략을 펼쳐 낸 것이다.
만약 만금대부의 배짱이 조금만 더 부족했더라면, 장일소가 준비해 둔 마지막 한 수가 만금대부의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금대부는 더는 장일소의 그 한 수가 무엇이었을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비장의 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장일소의 죽음과 함께 영원한 의문으로 남아 버리는 게 최선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못하게 만드는군.”
어쨌거나 이 싸움에서는 만금대부가 이겼다. 설사 그게 온전한 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단자강이 준 선물 덕이라 할지라도, 운 역시 실력인 것이 강호의 생리 아니겠는가?
“큭!”
“이, 이놈들이!”
분전하던 화산의 제자들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다시 냉정을 찾은 흑귀보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들을 조이고 밀어붙였다.
날뛰던 홍견이 곳곳에서 피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안정되기 시작한 전열을 보며 만금대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제 남은 건 추한 꼴을 보이며 죽어 갈 이들을 감상하는 것뿐이다.
“결국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기는 거지. 그렇지 않나, 장일소?”
이 순간 만금대부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장일소의 표정이었다. 제 목숨까지 내던진 마지막 도박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장일소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하지만…….
그 순간 만금대부는 보았다.
금방이라도 목을 딸 듯 조여 오는 흑귀보에게 둘러싸인 채로도, 오로지 만금대부만 바라보고 있는 장일소의 시선을. 그가 머금은…… 섬뜩한 미소를.
“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만금대부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의문 어린 눈으로 께름칙하게 장일소를 보던 만금대부는 이를 악물었다.
“위충!”
“예!”
“가서 장일소의 목을 끊고 와라!”
“……장일소를 말입니까?”
“그래! 네 손으로 직접 끝내라!”
“하오나, 보주님.”
“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방을 주시하던 만금대부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안일한 소리를…….
움찔.
그 순간 만금대부가 어깨가 들썩이도록 크게 흠칫했다.
“너?”
뭔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콰드드드득!
그 전에 옆구리로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차가운 비수가 살을 뚫고 들어와 폐를 찢는 고통.
“커억…….”
숨이 막히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리는 듯한 통증에 만금대부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무슨…….
덜덜 떨리는 고개를 힘겹게 꾸역꾸역 돌리자 마침내 보였다. 옆구리에 제 손을 박아 넣은 채 서늘하게 웃고 있는 위충의 모습이 말이다.
“너…….”
처음 떠올린 건 ‘배신’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떠오를 때보다 빠르게 지워졌다. 위충이 배신할 이였다면, 만금대부가 그를 주위에 두었겠는가?
“너…… 위충이 아니…구나…….”
위충이 아니면서도 만금대부가 의심조차 하지 않을 만큼 완벽히 그의 모습으로 화할 수 있는 이.
세상에 그런 존재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천면…….”
만금대부의 입에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역류했다.
“천면…수…사…….”
위충. 아니, 하오문의 문주, 천면수사가 답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만금대부.”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