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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72화 (1,073/1,567)

1072화. 누가 실수를 했다고? (2)

만금대부의 미간이 확연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판을 그리기까지, 그는 화산이라는 문파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강호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문파라면 화산이 얼마나 큰 변수인지 모를 수가 없으니까.

분석이 철저했던 만큼, 완벽한 덫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저들은 그 덫에 그대로 걸려들었다. 게다가 흑귀보의 전력을 보존했고, 포위에도 성공했으니 더는 변수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화산의 대응은 그가 생각했던 방향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가능한 일인가?’

그럴 리가.

인간은 누구나 변치 않는 성향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선택하는 이는 깊은 생각 끝에 옳은 결론을 내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논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성향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한 문파가 가진 성향 역시 한 사람이 가진 성향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아니, 오히려 수많은 이들이 모여 한 가지의 결론을 내야 하는 문파의 특성상, 그 성향은 더더욱 굳건하여 쉬이 변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화산은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 주던 성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역경이 닥쳐 오면 되레 그 역경을 향해 돌진해 버리던 곳이 화산이라는 문파다. 그건 과거 흑룡채에서도, 이번 매화도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발을 땅에 붙이고 선 자리에서 버티기 시작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을 터.

만금대부는 곧 어렵지 않게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녹림왕.’

임소병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만금대부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명백한 비웃음을.

뿌드득.

그의 이가 거칠게 악물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대의 노림수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완벽한 대처를 순간적으로 찾아낸다. 지금 저곳에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이라면 분명 저 임소병 정도겠지.

장일소의 만인방을 상대로도 자신의 행적을 최대한 감추며 기나긴 대치를 끌어냈던 이가 바로 임소병이다. 일신의 무위는 변수가 되기에 부족하지만, 그가 가진 병략만은 만금대부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임소병이 저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따른 대처를 세우지 못한 만금대부에게 있는가?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명문 정파란 협의를 지켜 낸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나 사파의 존재를 입에 담는 것조차 역겨워한다.

화산 역시 명문의 이름을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곳. 그런 이들이 평범한 사파인도 아니라 녹림왕이라는 사파 수괴의 지시를 듣는다고? 그게 가능할 리 없다.

애초에 강남으로 넘어오는 소수 정예의 조합에 사파 출신인 녹림왕을 끼워 넣는다는 것부터 제정신 박힌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린데, 설마 저 화산의 제자들이 임소병의 지시를 따른다니? 그런 사태를 누가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빌어먹을.’

만금대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와 이치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확실한 건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그의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괜찮다.’

여전히 승기는 그가 잡고 있다. 일이 조금 꼬인 건 사실이지만, 저들에게는 이 포위망을 돌파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이대로 천천히 소모전만 펼쳐도 결국에는 이겨 내지 못하고 말라 죽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또 다른 변수 하나가 지금 만금대부를 덮쳐 오고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그 변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화산의 포진 한 가운데에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청명이었다.

운기란 기본적으로 사소한 충격만으로도 입마(入魔)에 들 수 있는 위험한 행위다. 그렇기에 운기는 반드시 안전한 곳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저 미친 작자는 이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태연하게 운기를 해 대고 있다. 신경이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기다 해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 광인이라고밖에 칭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지금 그 광인의 행동이 다름 아닌 만금대부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

‘……얼마나 걸리지?’

완전한 회복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운공을 하는 이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터. 하지만 다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는 데는?

‘일각? 아니면 이각?’

계산이 서지 않는다.

죽일 듯한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던 만금대부가 움찔하고는 제 손을 펼쳐 보았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몰리고 있다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 되레?’

만금대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청명의 무력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완전한 회복이 어렵다는 전제가 붙는다고 해도, 그는 어쨌든 저 단자강을 쓰러뜨린 인물. 단자강이 얼마나 괴물 같은 이인지는 만금대부가 가장 잘 안다. 아직도 그에게 잃은 팔이 욱신거리니까.

그런 청명이 일부나마 힘을 되찾은 채 전장에 합류하게 된다면, 이 포위망으로 버텨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그 전에 끝내야 한다.’

만금대부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조금 더 뒤에서 상황을 관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완전히 공세로 전환하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만금대부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좀 더 몰아붙여라. 여유를 주지 말고!”

“예!”

만금대부는 축 늘어져 있던 손가락으로 저도 모르게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 움직임이 흡사 주판알을 움직이는 듯 보였다.

치열하게 맞붙은 전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의 임소병은 그런 만금대부의 움직임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며 주시하고 있었다.

“흐음.”

만금대부에게 꽂혀 있던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임소병에게로 옮겨 갔다.

부채를 펼친 채 주위를 둘러보는 임소병의 두 눈은 무서우리만큼 서늘하고 냉정했다.

‘녹림왕.’

장일소의 눈빛이 일순 스산해진다.

사패련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 장일소가 가장 경계하던 이는 흑룡왕도, 만금대부도, 천면수사도 아니라 바로 녹림왕 임소병이었다.

녹림이 강하기 때문에? 임소병이 뛰어나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을 먹어 치우는 게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는 녹림왕은 차와 포 없이 장기를 두는 기사(棋士)와도 같았다. 녹림은 머릿수만 많을 뿐, 절대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반쪽짜리 문파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녹림은 그 머릿수조차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곳이다. 천하의 산에 흩어져 있는 녹림도들을 한곳에 모으고, 그 병력이 소모하는 것들을 보급하며 전열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덩치는 크지만 제대로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주력이라 부를 수 있는 전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 이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또 있겠는가?

하지만 임소병은 그런 녹림을 이끌어 만인방의 공세를 버텨 냈다.

긴 전선을 유지하면서도 직접적인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주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이점으로 삼아 자신의 존재와 녹채의 행적을 최대한 숨겨서 노릴 곳을 애초에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무색한 짓거리를 끝없이 반복하며 녹림의 피해를 최소화해 온 이가 임소병이다.

그럴수록 장일소의 생각은 더 굳건해졌다. 녹림을 가장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말이다. 저 임소병의 손에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패가 쥐여지기 전에.

그런데…….

‘설마 저놈이 사파가 아닌 곳에서 그 패를 얻어 올 줄이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으나, 저 임소병이 신나 보이는 것이 장일소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항상 그 수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수만을 두어 오던 이가, 처음으로 그 반대 되는 입장에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흐음.”

장일소가 묘한 시선으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임소병의 대응과 화산의 포진을 한 눈에 담은 장일소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드러난 이가 맹수의 이처럼 위협적이었다.

“잘도 사람 속을 읽어 대는군. 여전히 말이야.”

나지막이 중얼거린 장일소가 곁에 선 호가명에게 말했다.

“가명아.”

“예, 련주님.”

“계획을 바꿔야겠다.”

호가명이 의문 어린 눈으로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장단을 좀 맞춰 줘야겠구나.”

장일소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요사스런 미소를 본 호가명의 시선이 순간 화산 쪽으로 향했다.

“뭐……. 저건 따라 할 수 없겠지만.”

홍견을 물어뜯는 이들. 지금 화산의 제자들처럼 자리를 지키다가는 제힘을 낼 수 없다. 저건 화산이니까 가능한 일.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 해도 홍견의 힘을 완전히 끌어낼 방법은 있다.

“물어뜯는 놈들을 조금 바꿔야겠다. 화산을 노리는 놈들부터 처리해라.”

“그럼 련주님께서 위험해지십니다.”

“쯧.”

장일소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가 호가명을 무척이나 신뢰하면서도 전권을 맡기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다.

“만금대부쯤 되는 월척을 잡으려면 내 목숨 정도는 미끼로 내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장일소의 표정을 슬쩍 바라본 호가명이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알겠습니다, 련주님.”

호가명이 지시를 내리기가 무섭게 홍견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섬뜩할 정도로 빠르고 완벽한 반응이었다.

장일소의 두 눈이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자, 만금대부…….”

장일소가 키득대며 웃었다.

‘네가 이 상황을 계산할 수 있을까?’

그 잘난 주판알을 튕겨서 이곳을 지배할 수 있을까?

사람을 숫자로만 보는 이.

숫자가 가진 허상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이길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라도 마다하지 않는 이.

그리고…….

호가명의 시선이 운기를 하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한다.

‘제자리에서 눈을 감은 것만으로 그 모든 이들을 쥐고 흔들어 버리는 미친놈까지.’

만금대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강호를 지배하는 괴물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드는 지옥도였다.

만약 이 상황을 감당해 낸다면, 장일소와 청명, 그리고 임소병이라는 대어를 줄줄이 낚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 결과야 뻔하다.

만금대부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 가고 있다. 그에 반해 장일소의 얼굴엔 점점 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네겐 아마 처음이겠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이가 제 목숨을 통째로 거는 도박 같은 걸 해 본 적 있을 리가 없다.

장일소가 발을 내디뎌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흑귀보의 정예들을 향해 몇 걸음 더 나아갔다. 마치 달려드는 사냥꾼들을 유혹하듯이.

“자, 너희가 원하는 목이 여기에 있단다. 어서 오려무나.”

목을 훤히 내놓고 다가오는 장일소의 모습에, 흑귀보 정예들의 두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장일소의 목을 벤 이’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손에 넣을 기회가 바로 그들의 코앞에 있다.

흑귀보 정예들은 눈을 까뒤집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 명백한 균열을 목도한 장일소가 귀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옳지, 그래야지.”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요사스런 빛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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