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화. 누가 실수를 했다고? (1)
카가아앙!
유이설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나의 도를 막아 내는 순간, 또 다른 도가 날아들어 그녀의 검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기도 전에 또 하나의 도가 날아들었다.
카아앙!
선제적으로 날아든 도는 쾌속하게 맞부딪쳐 검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연이어 날아든 묵직한 도격은 그녀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죄는 것만 같았다.
이 연계 속에서는 화산 특유의 화려한 검초를 펼쳐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수의 차이가 두세 배만 되었어도 반격의 여지가 있겠지만, 열 배가 넘는 수의 차이는 극복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들은 그 수의 차이를 실로 노련하게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느려.’
파아아앗!
그녀의 검이 섬전처럼 뒤로 당겨졌다. 허공에 긴 궤적을 남기며 뽑아 올리듯 검을 당긴 유이설은 당긴 것보다 배는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벼락처럼 날아드는 검을 본 흑귀보의 정예가 두 눈을 부릅떴지만, 그의 입에서 채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유이설의 검이 그의 목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콰득!
습관적으로 그 목에 박힌 검을 아래로 내리누르며 반동으로 몸을 띄워 올리려던 유이설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들은 그녀가 저 안으로 뛰어들기만을 바라고 있다.
혼자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다. 그녀가 적들에게 둘러싸인 순간, 사형제들은 자신의 목숨 같은 건 조금도 돌보지 않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자신의 순간적인 판단 착오가 사형제들을 전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순간적으로 엄습했다.
흑귀보의 정예들은 제 동료의 죽음을 무시하고 재차 유이설의 빈 옆구리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쇄애애애액!
양 옆구리를 노리며 날아드는 도를 본 그녀는 적의 목에 박아 넣었던 검을 쾌속하게 회수했다. 그리고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당황할 것 없어.’
카아아앙!
날아들던 도가 그녀의 검과 충돌하며 빠르게 튕겨 나갔다.
화산의 검술은 분명 환(幻)과 변(變)을 중심으로 한다.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 속에 진짜와 가짜를 교묘히 섞어 상대를 현혹하는 검술이 바로 화산 검의 요체다.
하지만 그게 화산의 전부는 아니다.
파아아아앗!
다시 쾌속하게 뻗어진 유이설의 검이 물러나는 적의 어깨를 단숨에 꿰뚫었다.
콰드득!
분명 이들의 전략은 제법 훌륭하다. 유이설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그들의 검을 파훼해 오는 적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당혹감을 느낀 건 사실이고, 순간적으로 움츠러든 것 역시 사실이다. 장기인 발을 활용할 수도 없고, 수도 없이 휘둘러 온 매화검법의 검로 역시 함부로 그려 낼 수 없다. 불리하다는 단순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하지만 유이설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파앗!
제자리에서 진각을 밟은 그녀가 빛살처럼 검을 휘둘러 허공을 갈랐다. 더없이 군더더기 없는, 일체의 낭비를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검이다.
‘이미 몸이 알고 있어.’
분명 그들이 화산의 검술을 파훼하는 적(敵)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이미 너무도 손쉽게 그들의 검술을 파훼해 버리는 이와 수없이 격전을 치러 왔다. 깨지고 박살이 나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싸웠다.
그렇기에 이런 적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는 머리가 아닌 바로 몸에 새겨져 있다.
‘사질!’
본디 화산의 검은 집단과 집단이 맞붙는 전장에서는 더없이 강하지만, 검과 검이 얽혀드는 극단적인 난전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고집스러움을 넘어 집착적으로 강조해 온 기본. 그리고 일반적인 명문 정파라면 절대 시키지 않을 실전 같은 대련의 연속.
그 모든 것이 이 몸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
강철을 두드려 더 단단하게 만들듯이, 끊임없이 담금질한 육체가 머리보다 먼저 움직여 적을 주살해 간다.
카아아아아앙!
날아들던 도가 얇디얇은 검과 맞부딪히는 순간 어처구니없이 쉽게 튕겨 나갔다.
‘힘이, 내력이 전부가 아니야.’
머리로 알고 있다. 힘이란 그저 악을 쓴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힘을 줘야 할 때 강한 힘을 정확하게 부여하는 것. 그 시와 때를 알 수 있다면 동일한 힘으로도 수 배의 충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적절한 시와 때는 바로 그녀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주입된 모든 묘리가 그녀의 몸 안에서 체화되어 풀려 나간다.
서걱!
당황해 물러나는 이의 경동맥을 깔끔하게 끊어 냈다. 그리고 그녀는 달려들어 오는 또 다른 적을 차디찬 눈으로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이것 봐라?’
임소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수의 차이는 명백하다. 전력의 차이 역시 명백했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수를 준비했다. 이 커다란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요행에 가까운 수까지.
하지만 그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무용지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더 강해진다고?’
그런 게 말이 될 리가 없다. 이미 단련될 대로 단련된 이들이다. 초심자도 아닐진대 실전을 한 번 겪는다고 급격하게 실력이 늘 리는 없는 것이다.
이건 강해지는 게 아니라 적응하는 것이고, 적응한다기보다는 변화한다는 것에 가깝다. 상대에 따라 보법부터 검법, 호흡까지를 모조리 맞춰 나간다.
실로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무학이란 틀이다. 곧 규격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검을 처음 배우는 이는 우선 정확한 검로를 그려 내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끊임없는 반복 수련은 자신의 틀을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 무학을 오래 수련한 이일수록 그 틀은 단단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한번 만들어 놓은 틀을 자유자재로 바꾼다는 건 사실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그 불가능한 것을 해내고 있다. 더없이 단단해 보였던 이들의 틀이 부드럽게 뒤틀리며 적에게 걸맞은 틀로 바뀌어 간다.
‘세상 누가 이런 걸 본 적 있을까?’
마교도의 존재와 주교의 힘은 거대한 충격이었지만, 이 광경 역시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다. 이 변화에 담긴 것이 뭔지를 이해하는 이라면 더욱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삼 년 동안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 괴물 같은 청명이 단련시켰으니 당연히 강해져야 한다. 저만한 고수가 이런 애송이들을 일일이 지도하는 일 따위 강호에서 벌어질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은 임소병의 상식을 벗어났다.
‘대체 뭘 만든 거요, 도장……?’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어떤 전장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검이라니. 그건 곧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 검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약점이 없다는 것이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죽는 경우는 절대 나오지 않겠지.’
눈앞의 광경을 보던 임소병이 결국 큭큭대며 웃었다.
“……지독한 사람이네.”
저 검에서 느껴진다. 이들에게 검을 전수한 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저 화산의 검을 더 강하게 단련하는 것에만 몰두했다면, 처음 화산의 검을 파훼당한 순간, 분명 누구 하나는 죽어 나갔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검을 익혔기에 막아 내고 버텨 낼 수 있다. 이들의 성향 자체는 상대를 몰아치고 쓰러뜨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지만, 검은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말이 쉽지. 그런 검을 익히게 만들려면 대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공포가 느껴질 정도의 거대한 집념이 느껴진다.
가르치는 이도, 익히는 이도 수없이 사선을 넘었을 게 분명하다. 그 집념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뒤에 선 임소병의 눈에는 너무도 확연하게 보였다.
“욕심이 너무 과하신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임소병이 다시 눈을 빛냈다. 어쨌거나 그의 입장에서는 손에 쥔 패가 늘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자.’
중앙의 청명을 중심으로, 백천을 비롯한 오검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청명과 오검 사이에 운검과 혜연, 당소소와 남궁도위, 그리고 임소병이 위치해 앞을 지키는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안쪽에 선 이들의 무위가 들쭉날쭉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그들은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를 들고 선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조금만 더 몰아붙여 볼까?”
휘이이익!
그가 가볍게 부채를 휘둘렀다. 부채 끝에서 뿜어져 나간 선기(煽氣)가 윤종의 등을 타 넘어 전면에서 달려드는 이들을 순간적으로 밀어 냈다.
“간격을 조금 더 벌려서 싸울 자리를 만들죠!”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검이 앞으로 한 발 치고 나간다.
덕분에 한 번에 상대해야 할 적의 수는 늘어났지만, 그들의 발 역시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죽어라아아아아!”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흑귀보의 정예들을 향해 조걸이 자신의 장기인 폭풍 같은 연격을 쏟아부었다.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수십의 검기가 달려드는 이를 연이어 꿰뚫었다.
순간적으로 앞쪽의 공간이 텅 비었지만, 조걸은 평소처럼 달려 나가는 대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파아아앗!
그리고 윤종을 향해 달려드는 적을 향해 지체 없이 검을 날렸다.
갑자기 옆에서 날아온 검에 당황한 흑귀보의 정예가 빠르게 움직이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반응보다 조걸의 검이 배는 더 빨랐다.
푸욱!
“끄륵…….”
목 옆을 파고 들어간 검이 반대쪽으로 뚫고 나왔다. 피거품을 문 흑귀보의 정예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고맙다는 말은 됐수다.”
“네 할 일이나 해, 이 멍청아!”
“……도와줘도 욕이야.”
잠시 만들어 낸 틈을 적을 주살하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사용했다. 조걸답지 않게 말이다.
임소병의 눈빛이 점점 더 예리해졌다.
어쩌면 매화도는 이들이 활약하기에는 너무도 좁은 전장이었을지 모른다. 하기야 한낱 수적 따위가 무슨 수로 이들의 실력을 모조리 끌어냈겠는가?
“아주 괴물들을 만들어 내셨어.”
임소병의 눈이 전장을 훑었다. 여전히 상황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몇몇이 죽어 나갔다고 해 봐야 개미 떼 같은 적들에게는 조족지혈에 불과한 수다.
임소병의 시선이 저 너머에 있는 만금대부에게로 향했다.
‘초조해져서 달려들면 죽는 지옥을 만들어 오셨다고?’
임소병이 부채를 꽉 움켜잡았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은데?”
먼저 움직이는 자가 진다. 그의 생각에 이건 전략 싸움이라기보다는 배짱 싸움에 가까웠다. 임소병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야지.’
청명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얼핏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모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저건 단순히 쉬는 게 아니라 입공(入功)을 하는 것이다.
선 채로 운기를 하여 최대한 빠르게 다시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몸 상태를 갖추려 하는 것이다.
도기가 날아들고 암기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선 채로 운기조식을 한다?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어떤 공격을 해 오더라도 그를 둘러싼 이들이 반드시 막아 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
“미친놈일세.”
나직이 웃은 임소병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만금대부에게로 향했다.
아마 만금대부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터. 청명이 운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심적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자, 누가 더 배짱이 두둑한지 한번 보자고.”
진득한 미소를 흘린 임소병이 여유만만한 얼굴로 만금대부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