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화. 죽여 보라니까? (5)
파라라라락!
붉은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보기에는 그저 아름다운 광경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붉은 꽃잎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흡사 선계의 도원(桃園)처럼 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아는 이에게는 이보다 더 위협적인 광경이 없다.
무학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저 수없이 흩날리는 꽃잎이 하나하나 모두 살의를 담고 뿌려진 검기라는 사실에 기겁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무학을 깊이 아는 이들이라면 오히려 다른 부분에 집중할 게 분명했다.
만금대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산…….’
저만한 검기를 흩뿌리는 것도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저만한 검기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 검기를 뿌려 대는 이의 수가 무려 다섯에 달한다.
그 다섯이 모조리 예측할 수 없는 기괴망측한 검기를 미친 듯이 흩뿌리고 있는데,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으면서도 서로 부딪히거나 상충하는 일이 없다.
상식적으로야 응당 발출한 검기가 서로 부딪히며 충돌을 일으켜야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화산 제자들의 검기는 마치 한 사람이 날린 것처럼 완벽하게 합을 이루고 있다.
얼마나 지독스럽게 서로 호흡을 맞춰 왔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검기를 상대하는 이들 역시 만만치 않다.
“흐아아아압!”
목이 터져라 기합을 지른 흑귀보의 정예들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졌다.
카가가강!
서걱! 서걱!
검기와 도기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살이 섬뜩하게 베여 나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어차피 모든 검기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머리와 상체를 최대한 보호하되 그 외의 부분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적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제 살을 내어 주는 지독한 판단이었다.
일반적인 전장에서라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다. 하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고,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 멍청한 판단이 완벽한 판단으로 탈바꿈된다.
“크으으윽!”
사지를 파고드는 검기가 주는 고통에, 그들은 이를 악물었다.
“타핫!”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단순한 전법만으로 쏟아지는 검기를 돌파해 내는 데 성공했다. 화산의 검술은 화려하여 현혹되기 쉽지만,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은 약하다. 이런 맹점을 정확하게 노린 것이다.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망설임조차 없다?’
한두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본능으로든, 이성으로든 상대 검술의 약점을 순간적으로 파악해 내는 능력을 지닌 자가 한둘 정도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장에 투입되어 달려들던 이들이 서로 눈빛을 나눌 틈도 없이 모두가 같은 대처를 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저들은 이미 화산의 검술을 연구하고 파훼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게 분명하다.
이건 백천에게 있어, 그리고 화산에 제자들에게 있어 처음일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화산의 검술은 일반적인 정파의 검술과 궤를 달리한다. 정파에서는 요사스럽다 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는 환(幻)의 검리(劍理)를 최대한 활용한다. 그 덕에 화산의 검기를 처음 겪는 이들에게서 언제나 크나큰 당혹감을 이끌어 내곤 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이 순간 확실히 이해했다.
강호에서 화산은 더 이상 낯설고 신기한 문파가 아니다. 오히려 강호의 모든 이들이 경계하고 주목하는 문파다.
화산에 속한 모든 이가 함께 노력하여 입지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높아진 위치에는 당연히 그만한 위험 역시 따른다. 이제 화산을 경계하는 문파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검술을 분석하고, 파훼할 방법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화산이 강호에서 ‘강자’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인 동시에,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일이 더욱 험난할 것임을 보여 주는 징조와도 같았다.
“크아아앗!”
검기의 숲을 뚫어 낸 흑귀보의 정예들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화산의 제자들에게 돌진했다. 몸 곳곳이 베여 피를 뿌리면서도 그들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죽어라아아아앗!”
콰아아아아아!
드높은 기세와는 별개로, 그들이 휘둘러 오는 도격은 강력하기보다 오히려 쾌속했다.
‘큭!’
카강!
선두에 선 백천은 재빠르게 검을 올려 날아드는 도를 막아 냈다.
‘빨라!’
힘으로 찍어누르기 위함이 아니다. 우선은 빠르게 공방을 이어 가 상대를 잡아 두기 위한 도격이다. 화산의 검이 보이는 화려한 변화가 자신들을 위협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노림수가 확연히 보이는 일격이기도 했다.
저들이 선보이는 공격 하나하나에서 화산을 철저히 연구해 왔다는 점이 확연하게 엿보였다.
무겁게 짓눌러 오는 도의 힘을 버텨 내면서 백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일했어.’
화산은 사패련의 제일대적(第一大敵)이다.
백천 역시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때로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명확한 사실이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식의 사건이 되어 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타앗!”
백천은 강하게 검을 휘둘러 도를 튕겨 냈다.
동시에, 그의 귀 바로 옆으로 웅대한 권기를 담은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콰앙!
상체가 열린 적의 가슴으로 혜연의 권이 파고들었다. 피를 울컥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적을 추격하기 위해 발을 내디디려던 백천은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강력한 진각을 내밟았다.
‘지켜!’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평소처럼 적을 완전히 끝장 내는 게 아니다. 설령 적을 멀쩡히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 내는 것이다.
“흐아아압!”
연이어 이 파, 삼 파가 들이닥쳤다.
가열하게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에선 적을 몰아붙인다는 희열보다는 오히려 절대 거리를 주면 안 된다는 조급함마저 느껴졌다. 화산의 검수들이 제대로 검기를 뿌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보였다.
도가 백천의 머리를 향해 맹렬히 떨어졌다. 동시에 다리로도 어디선가 발출된 도기가 날아들었다.
동시에 펼쳐진 이 공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단숨에 백천을 쪼개 죽이겠다는 게 아니다. 백천의 하체에 작은 생채기라도 하나 쌓아 두겠다는 것이다.
설령 자신들의 몸이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천에게 상처를 누적시키고 천천히 갉아먹겠다는 수작에 가까웠다.
이는 화산의 제자들이 절대적인 강자를 상대로 달려들던 방식 그대로였다.
이를 악문 백천은 재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이들에게 연이어 삼 검을 내질렀다.
파아아아앗!
머리로 쏘아지는 도가 채 닿기도 전에, 다리로 날아드는 검기가 뻗어 나오기 전에, 백천의 섬전 같은 검기가 달려드는 적을 꿰뚫었다.
콰드드득!
하지만 그때, 미처 힘을 다 상실하지 않은 도가 백천의 볼을 길게 긋고 지나갔다. 순간 번지는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백천이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이들과 궤가 다르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그 사실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던 모양으로, 긴장 섞인 대답을 우렁차게 돌려주었다.
처음이었다.
약자로서 도전하는 입장이 아니라, 강자로서 도전받는 입장에 서는 것은. 더 많은 수와 더 강대한 세를 가진 이들이 짓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악하듯 달려드는 모습을 직면하는 것은.
생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전투의 양상에, 화산의 제자들이 조금씩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화산…….”
차가운 눈으로 전황을 지켜보던 만금대부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역시 저놈들은 너무 위험하다.’
그가 알던 어떤 정파 놈들과도 그 궤를 달리한다.
아직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젊은 무인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과도하게 높은 무위를 지녔으며 실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 역시 그렇다.
흑귀보의 정예들이 공격해 들어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그가 지켜봐 온 화산과 그들의 과거 행적을 통해 분석해 낸 정보에 기반한 것이다. 게다가 최근 매화도에서 보여 준 모습까지 감안한, 화산 무학의 파훼 방식이었다.
원래는 좀 더 대규모의 인원으로 화산 전체를 둘러싸는 것을 가정하여 세워 둔 계획이지만, 지금처럼 소수를 상대로도 분명 통할 만한 전법이다.
멋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의 전략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화산의 발목을 잡아 두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화산 놈들의 대처가 기민했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노림수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을 수정해 나간다. 저 어린놈들이.
‘따뜻한 온실에서 자라나 찬 바람만 스치면 시들어 버리는 다른 정파의 화초 같은 놈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
그저 만금대부의 개인적 시선이며 사견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할 일도 아니다. 이미 화산은 수도 없이 자신을 증명했다. 길게 갈 것도 없이 매화도에서 보여 준 놈들의 활약만으로도 더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만약 저들이 이대로 막힘 없이 성장하게 된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화산이라는 문파를 막을 수 없게 되겠지.’
그렇기에 죽여야 한다. 이 자리는 당장 그의 목에 닿아 있는 장일소라는 칼날을 제거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그의 심장에 틀어박힐 화산이라는 화살을 꺾어 버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대체 어떻게 저런 놈들이 나타났을까?
완숙하고 정교한 검술과 농익은 실전 경험이라는 건 사실 양립이 불가능하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목숨을 건 실전을 겪어야 하는데, 그런 이들은 채 실력을 쌓기도 죽어 나간다. 그렇다고 무학이 완전히 무르익을 때까지 실전을 피하다 보면 나중에는 실전이 뭔지도 모르는 무학만 강한 멍청이가 되어 버린다.
강호는 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 왔다. 사파는 실전으로 내몰아 살아남는 놈들을 키워 내는 쪽을, 정파는 실전을 기피하고 검이 완숙해지기를 기다리는 쪽을.
그렇기에 정파는 오래도록 무학을 익힌 강자 층이 두터운 반면, 사파는 일개 소모품에 불과한 말단 무사들이 정파보다 더 강한 것이다.
하지만 저 화산 놈들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저들은 정파의 명문들이 가진 검의 정교함과 사파의 말단 무사들이 가지고 있는 날 선 실전성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다.
정사지간(正邪之間)이라는 말은 본디 정파와 사파 어느 쪽에도 엮이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저놈들을 보고 있자면 그 정사지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화산에서는 대체 어떻게 저런 놈들을 만들어 낸 거지?’
마치 정과 사의 무학에 모두 통달한 절대적인 무신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제자들을 육성한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에 그런 절대적인 이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 절대적인 이가 망해 버린 화산에 있을 리도 없다.
‘아니, 생각할 이유가 없지.’
어차피 저놈들은 오늘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만금대부는 차가운 눈으로 홍견에게 둘러싸인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범 새끼는 키우는 게 아니지, 장일소.’
결국 장일소의 또 다른 패착도 이것이다. 그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범을 키우는 이들이 결국 그 범에 물려 죽는 것을 보고도, 자신만은 다르다고 여기며 범 새끼를 줍는 우매한 사람처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조이라고 해. 피해는 아무리 커도 좋다. 대신 단 한 놈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예!”
살짝 눈살을 찌푸린 만금대부가 천천히 전장을 향해 더 다가섰다.
오른쪽에 매인 검의 손잡이에, 익숙지 않은 좌수를 잠시 올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그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