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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69화 (1,070/1,567)

1069화. 죽여 보라니까? (4)

만금대부는 포위망을 좁혀 가는 제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천천히 그들을 넘어, 날을 세우고 있는 홍견과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역시나 장일소였다.

‘장일소, 설마 비겁하다 욕하진 않겠지.’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것은 사파의 생리. 그게 설사 적이든, 동료든 다를 건 없다. 등을 찌르는 이가 나쁜 게 아니라, 틈을 내어 준 이가 멍청한 것이다. 그게 사파의 방식이다.

장일소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이용하여 여기까지 왔다. 이곳에서 죽어 고혼이 된다 한들 만금대부를 원망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만금대부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 비어 펄럭이는 소맷자락이 보이자 두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가 이 팔을 잃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장일소의 밑에서 그의 발을 핥는 짓거리가 그리 유쾌하진 않지만, 얻을 것이 있다면야 마다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에게 자존심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싸구려로 팔아넘길 생각은 아니지만, 적당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팔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팔을 잃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수검을 쓰는 그에게 있어서 우수를 잃는다는 건 더는 과거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가 장일소의 입장이었다면, 힘을 잃은 만금대부를 어찌했을까? 무력의 태반을 상실하고, 흑귀보의 보주라는 지키지도 못할 직위만을 가진 그를 대체 어떻게 다뤘을까?

‘생각할 것도 없지.’

늙은 뱀처럼 접근하여, 자신만 따른다면 지금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속삭였을 것이다. 다른 방도가 없는 만금대부가 충성을 바치는 순간부터 천천히 느긋하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 갔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이용 가치가 없어진 만금대부를 적당히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다.

장일소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만금대부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죽든지, 아니면 장일소에게 넘어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을 날을 기다리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만금대부는 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용의 따윈 없었다. 손해뿐인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제삼의 길. 이 자리에서 장일소를 제거하여 모든 판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장일소의 죽음은 겨우 일통되었던 강남의 상황을 혼돈으로 몰아갈 것이고, 장일소라는 대적을 상대로 서서히 연합하던 강북의 상황 역시 혼란으로 밀어 넣을 테다.

상대적으로 약점을 가진 이가 살아남는 방법은 세상을 난세로 몰아가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이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다.’

천운에 가까운 기회였다.

만약 그들이 상대하던 마교도들이 단자강의 등장과 동시에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만금대부에게는 홍견과 화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당연히 만금대부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네 오판은 하나.”

서늘한 그의 눈빛이 다가오는 흑귀보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화산과 홍견에게로 향했다.

“나를 너무 쉽게 본 것이다. 장일소.”

그리고 그의 오판이 장일소라는 풍운아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졌다.

‘안 좋아.’

백천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저 병력이 모조리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상황이 좀 더 나을 것이다. 혼전 중에는 반드시 틈이 보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 저 선두에 선 일 열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들과 칼을 맞댈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명백히 느껴진다. 저건 죽이기 위한 포진이 아니다. 놓치지 않기 위한 포진이다.

일 열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피해가 늘어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쥐새끼 한 마리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쓰러지기 직전인 장일소와 청명에게는 과한 처사지만, 애초에 만금대부는 자신이 지휘하는 일에 있어서 조금의 변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아니면 저들의 존재가 만금대부를 이토록 신중하게 만들었든가.’

원인이야 무엇이건 간에, 어차피 결과는 같다.

백천이 슬쩍 한쪽 어깨를 내리며 무릎을 굽혔다.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어깨를 내리기가 무섭게 뒷열을 채우고 있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슬쩍 그의 어깨가 향한 쪽으로 조여 왔다.

‘……군인 같군.’

척 보아도 한두 번 맞춰 본 솜씨가 아니다. 아마도 이런 포위망을 전문적으로 훈련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사냥 연습을 하듯이.

백천은 본능적으로 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이 상황이 위기라는 걸 부정할 방법은 없다. 극히 냉정하게 보자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반쯤 발을 걸쳤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사숙. 제가 먼저 갈깝쇼?”

그리고 그건 사질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갈 듯 드릉드릉하는 조걸을 힐끔 보며 백천이 담담하게 물었다.

“겁나지 않느냐?”

“겁이요?”

조걸은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저 새끼들이 강해 봐야 아까 그 주교 놈들만 하겠습니까?”

“…….”

“그 사람 같지도 않은 주교 놈들한테도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인간들을 제 눈으로 직접 봤는데, 저런 놈들한테 겁을 먹으면 제가 너무 한심하잖습니까.”

백천이 씨익 웃었다.

“그래. 동감이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검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때 백천이 냉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건 그 둘로 충분하다. 이성을 잃지 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놈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길을 뚫는 거다.”

“예.”

모두가 안색을 굳혔다.

‘하나하나는 딱히 문제 될 게 없지만…….’

문제는 저 수와 저들이 포진한 모양새다. 겉으로 보기에야 그저 대충 주위를 에워싼 것처럼 보이지만, 기묘하고도 느릿한 움직임으로 보건대, 분명 진법의 일종임이 분명했다. 생각 없이 상대하다가는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적거려서 될 일도 아니야!’

백천이 결심을 굳히고 검을 꽉 쥐며 비틀었다.

‘좋아! 우선 내가 먼저 달려들어 길을 연다!’

백천이 다리에 내력을 불어넣으며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오호?”

“헉!”

뜬금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들뜬 목소리에 백천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야, 이거 재밌군요.”

“예?”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펼쳐 들고는 살랑살랑 부쳐 대고 있었다. 백천이 황당한 눈으로 보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잠시만,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는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며 포위망을 펼친 이들을 세세히 훑기 시작했다. 그 두 눈이 흡사 맹금 같았다.

“팔괘(八卦), 역리(逆理). 거기에 기환(奇幻)……. 아니 삼재(三才)도 섞여 있나…….”

백천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그 순간 임소병이 펼쳐 든 부채를 단번에 확 접더니 제 손 위로 내리쳤다.

“쯧쯧쯧. 어울리지도 않는 고급스러운 진법이군요. 사파 놈들 주제에.”

“예?”

“자, 자. 보십시오, 도장.”

임소병이 흑귀보를 향해 턱짓했다.

“앞에 선 놈들이 아니라 뒤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놈들이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일직선으로 파고들면 앞쪽에 있는 놈들은 방어를 굳히며 뒤로 물러나고, 뒤쪽에 있는 놈들이 파고든 이를 좌우에서 둘러쌀 겁니다. 적어도 오방(五方)에서 연격이 들어오겠죠.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백천이 멍하니 되묻자 임소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화산파 놈이 이런 쉬운 것도 못 알아 처먹지?’라고 말하는 듯한 경멸의 눈빛에, 백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누가 가르쳐 줘야 알지…….’

화산에서 배운 거라고는 ‘전투가 일어나면 대가리부터 쳐라’와, ‘사람은 그리 쉽게 뒈지지 않으니 일단 들이대라’밖에 없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달려들면 합공당해 뒈진다고요.”

“아아.”

애초에 그렇게 간명하게 말했어야지. 백천이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만금대부가 화산과 만인방을 꽤 연구한 모양입니다. 화산이나 만인방이나 각각 정사를 대표하는 멧돼지 같은 문파라서 싸움이 붙으면 일단 생각 없이 들이받고 보는 곳 아닙니까?”

“……아니, 말씀이 좀…….”

물론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긴 하지만…… 그걸 산적 두목 입에서 듣는 이쪽 입장도 생각을 좀 해 주셔야…….

“다급하게 포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해 온 겁니다. 이쪽에서 조급함을 못 이겨 달려들게 되면 달려드는 족족 둘러싸서 모가지를 쓱싹쓱싹 잘라 버리고, 배때기에 칼을 푹푹 쑤셔 박겠죠. 후후후후. 물론 저걸 보고도 무작정 달려들고 보는 멍청한 놈이 있겠냐마는…….”

달려들기 직전에 우연히 멈춘 한 사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괜스레 목이 시리고 배가 쑤셔 오는 기분이다.

“과연 만금대부. 흑룡왕 따위와는 다르군요. 확실히 병법이 뭔지 이해하고 있는 자입니다. 화산이나 만인방에게는 최악의 적일지도 모르겠군요. 후후후후.”

임소병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어쩐지…… 이제야 제 전공을 만나 잔뜩 신이 난 사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이 양반도 정말 제정신 아니네.’

왜 화산 주변에는 이런 인간들만 모이는 걸까?

“하지만!”

탁!

그때 임소병이 제 부채로 손바닥을 다시 한번 내리쳤다.

“그건 내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백천을 슬쩍 앞으로 밀었다.

“사방에서 덮쳐 오면 일단 그 자리에서 버티십시오. 놈들이 틈을 보여도 절대 뛰쳐나가면 안 됩니다. 누구 하나라도 돌출되어 나가는 순간, 놈들은 등을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튀어나온 이를 둘러쌀 겁니다. 그걸 구하러 하나둘 빨려들어 가면 모조리 몰살당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백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윤종아!”

“예, 사숙!”

“조걸 새끼 목줄 채워라!”

“예!”

“아니, 왜 저를…….”

“닥치고 내 옆에 붙어!”

“……눼.”

백천이 슬쩍 임소병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버틴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겁니까? 시간을 끌수록 수가 적은 우리가 불리할 텐데?”

“물론 그렇죠. 그렇지만…….”

임소병이 어딘가를 슬쩍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때 다시 말씀드리죠.”

“…….”

“자, 옵니다. 말은 나중에! 일단은 최대한 그 자리에서 버티십시오.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화산이니까?”

그 순간 가장 앞에서 그들을 조여 오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자세를 낮추며 화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 그런…….”

백천의 입에 씨익 커다란 웃음이 걸렸다.

“당연한 말씀을!”

파아아앗!

백천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주위를 지키던 화산의 제자들이 동시에 검을 떨쳤다. 그들이 피워 낸 붉디붉은 매화가 달려드는 흑귀보의 정예들 앞으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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