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8화. 죽여 보라니까? (3)
신뢰란 참으로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진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신뢰만큼 서로에게 힘을 주는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관계에 있어 신뢰란 모래로 쌓아 올린 성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는데…….’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강호에서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이. 결코 신뢰해서는 안 되는 이. 그게 장일소라는 사실에 누가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잠시나마 그에 대한 경계를 풀어 버린 이유는 지독했던 전투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 때문이었다. 함께 싸운 전우라는 감정은 대개 순간적으로나마 모든 갈등을 극복하게 해 주곤 하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역시 장일소. 저 음산한 뱀만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사숙…….”
“……그래.”
백천이 무겁게 검을 뽑아 들었다.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오는 흑귀보의 병력은, 못해도 이백이 넘어 보인다. 장일소의 주위를 지키고 있는 홍견까지 합세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터.
이들이 흑귀보와 만인방에서 고르고 골라 단련시킨 이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고작 열 명 남짓한 화산의 제자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싸워야지.”
백천의 눈은 점차 차게 타올랐다. 절망적인 상황쯤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들이 거쳐 온 전장 중 절망적이지 않은 곳도 있었던가?
‘길만 열면 돼.’
이들과 꼭 맞서 싸워야 할 이유도 없다. 어떻게든 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 장강만 넘으면 된다. 물론 항주에서 장강까지의 거리는 지독하게 멀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부터다.
백천의 들끓는 시선이 장일소에게로 쏘아졌다. 실로 사납게 쏘아보는 그를 보더니 장일소가 키득키득 소리를 내어 웃었다.
“못된 아이구나. 사람을 그런 눈으로 쏘아보다니.”
사실 백천은 장일소를 노려보며 그 눈빛으로 도발하고 있지만, 신경이 온통 청명에게로 쏠려 있었다.
화산의 전력은 지금 거의 보존되어 있다. 선두에서 길을 뚫어 낸 남궁도위가 거의 탈진했고, 혜연 역시 내력을 크게 소모한 상태지만, 그래도 따라붙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청명이다. 백천은 그의 뒷모습을 흘끗 보았다.
‘걸음은 뗄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볼 때는 무리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만 해도 살아 있는 게 용한 수준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이 되어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청명이 놈의 특성을 생각하면, 아마 겉으로 보이는 외상보다 속으로 입은 내상이 훨씬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확신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청명은 무조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일소에게 돌진할 것이다. 그게 청명의 방식이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명이 날뛰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들만 살아남아, 시체가 되어 버린 청명을 보고 울부짖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이곳에서 청명의 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백천밖에 없다.
백천의 두 눈이 살기로 스산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리를 좁혀 오는 흑귀보의 정예들을 묘한 시선으로 보던 장일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우…… 적절한 포위망이군.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야.”
삐딱하게 미소를 머금은 그는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응? 만금대부.”
그 말에 백천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획 돌렸다. 장일소에게서 결코 시선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눈이 본능적으로 만금대부를 쫓고 말았다.
흑귀보 정예들 사이로, 비어 버린 한쪽 소매를 펄럭이며 만금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격전의 흔적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청명이나 장일소와는 달리, 그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일소의 시선을 받아 낸 만금대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연다. 무감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무릇…… 훌륭한 수하란 윗사람의 뜻을 미리 읽고 움직이는 법이지.”
“하핫.”
장일소가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마음에 들어 내는 소리인지, 못마땅하여 내는 소리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저놈들은 위험하다.”
만금대부의 시선이 장일소를 떠나 화산파에게 꽂혔다. 감정이랄 게 실리지 않은 시선 앞에,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련주 역시 느꼈겠지? 저놈들은 제 권력에 취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정파의 머저리들과는 다르다. 언젠가는 반드시 련의 발목을 잡겠지.”
“…….”
“더 늦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제거해야 한다. 범은 새끼일 때 잡아 죽여야지.”
그 말을 들은 장일소는 화산의 제자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건 청명이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저…….”
백천이 이를 질끈 악물었다. 그 말을 음미하듯 장일소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범은 새끼 때 잡아 죽여야 한다……. 그래, 옳은 말이지. 하지만…….”
만금대부를 바라보는 장일소의 얼굴에 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 지껄이기에는 조금 늦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백천이 이상함을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만금대부를 바라보는 장일소의 시선에도, 그런 장일소를 마주 보는 만금대부의 시선에도 같은 편을 바라볼 때 흔히 보이는 호의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건…… 오히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을 바라보는 짐승의 눈에 가까워 보였다.
‘설마?’
그 순간 장일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백천에게 확신을 주었다.
“고작 이놈들을 잡기 위해 이렇게 거창한 포위망을 펼쳤을 리는 없고. 그래서…… 만금대부.”
장일소의 두 눈에서 한없이 요사스럽고 살벌한 빛이 흘러나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혼을 얼어붙게 할 것처럼 섬뜩했다.
“이곳에서 네가 진정 사냥하려 하는 게 어느 쪽이지?”
“…….”
“이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장일소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로 나겠지.”
“…….”
“아닌가?”
만금대부는 가타부타 말없이 무심한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면 좋은 기회야. 그래, 정말 좋은 기회지. 얼마 안 되는 이들을 이끌고 온 내가 이렇게 완전히 지쳤으니까.”
“…….”
“하지만…… 설마 천하의 만금대부가 이렇게나 멍청한 짓거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자랑하던 주판이 마교 놈들의 손에 모조리 박살 나기라도 한 모양이지? 내가 사라지게 되면 내 자리를 너 따위가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진심으로?”
“자리?”
가만 듣고 있던 만금대부가 싸늘한 어조로 반박했다.
“패군답지 않군.”
“…….”
“자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사패련 따위야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곳. 네가 없어지면 강남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그 말은 완벽한 쐐기와도 같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만금대부가 준비한 포위망은 화산의 제자들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다름 아닌 장일소였던 것.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장일소가 싸늘한 눈으로 만금대부를 보며 느리게 말했다.
“사패련이 사라진 강남을, 저 정파 놈들이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나?”
“착각하는 건 너다, 장일소.”
만금대부는 이제 더 이상 장일소를 련주라 부르지 않았다.
“착각?”
“저들이 증오하는 건 사패련이 아니야. 바로 너와 만인방이지.”
“…….”
“이 순간에도 서로 권력을 탐하느라 정신없는 놈들이 굳이 네가 없는 강남에 힘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 것 같은가? 네가 있어서 저들이 강남을 치지 않는 게 아니다. 네가 있어서 저들이 강남으로 향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지.”
그건 꽤 아픈 지적이었다. 장일소조차도 이 말에는 반박할 수 없는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만금대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지?”
“흐음?”
만금대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설령 장일소 네가 있는 사패련이 천하를 지배하는 날이 온다 해도, 거기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은데?”
“…….”
“그렇지 않나?”
만금대부의 추측을 들으며 장일소는 슬쩍 기괴한 미소를 흘렸다. 만금대부 역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섬뜩한 기세를 흘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솥에 들어가는 법이지. 사냥개가 살아날 방법은 하나뿐이야.”
만금대부의 목소리가 황량해진 땅에 차갑게 퍼져 나갔다.
“주인이 의심하기 전에 그 손을 물고 달아나거나…… 주인의 목을 먼저 물어뜯어 버리는 거지.”
“…….”
“어떻게 생각하지, 장일소?”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장일소에게로 쏠렸다. 장일소는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동작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짧게 혀를 찼다.
“쯧.”
이내 그의 기다란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적어도 소림이 물러날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알았는데…….”
“너는 적을 우습게 보지 않지. 하지만…… 더는 나를 적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 패착이었다.”
만금대부가 살기 어린 눈으로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나를 네 개로 만들고 싶었다면 목줄을 제대로 채웠어야지. 설마 이 내가 지금껏 길들여 온 개새끼들과 같을 거라 생각했나?”
“……뼈아픈 소리로군.”
“강호에서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늦지. 오판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그게 사파의 법도다.”
만금대부가 장일소와 홍련, 그리고 화산을 향해 턱짓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련주는…….”
“생포할 필요 없다. 죽여라. 후환을 남기지 마라.”
“복명!”
진득한 살기를 피우며, 흑귀보의 정예들이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포위를 좁혔다. 실로 신중한 접근이었다. 조금의 방심도 없는 그 자세가 오히려 더 큰 압박감을 주었다.
“쯧.”
장일소는 짧게 혀를 차고는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별수 없이 힘을 합쳐야겠는데?”
그러자 청명이 무심한 눈으로 그를 일별했다.
“그렇게 잘난 듯이 지껄여 대더니, 제 수하 하나 간수 못 하는 군. 멍청한 새끼.”
“……사람이 구덩이에 빠지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겠니. 재밌다고 침을 뱉고 밟아 댈 게 아니라 말이야. 하여튼 정말 성격 나쁘다니까.”
사파에게 성격 나쁘단 소리를 들은 청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검을 움켜잡았다.
허세를 떨긴 했지만, 지금은 진짜 위기다. 그나 장일소나 지금은 서 있는 게 고작이므로.
하지만, 청명의 시선은 화산 제자들의 등으로 향했다. 그들은 물 샐 틈도 없이 청명을 지키며 앞을 에워싸고 있었다.
과거 당보가 그랬듯, 이들 역시 지금 이곳에서 그를 지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뿐만 아니라 그가 싸울 때마다.
어느새 전보다 많이 커진 그 등을 보던 청명은 만금대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가슴속에 울컥 차올랐던 것을 억지로 구석에 밀어 두고,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역시 사파 새끼라 그런지, 여전히 모르는 모양이네. 그럼 알게 해 줘야지.”
청명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화산을 적으로 돌린 놈치고 무사한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걸.”
그 순간 화산의 제자들이 든 검에서 일제히 검기가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