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죽여 보라니까? (2)
조걸은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았다.
“……아니.”
미친놈인 줄이야 당연히 알았다. 저 새끼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화산의 제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미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설마 저 정도까지 미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나는 그래도…….’
그동안은 저 새끼가 미친 짓을 할 때는 뒤로 다 계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저렇게까지 대책이 없을 줄이야…….
“……미친놈이.”
윤종이 한 말이었다.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으면 말 다 한 거다. 그들의 앞에서 펼쳐졌던 상황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주저앉은 백천과 그 옆에 탈진한 고양이처럼 아주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 버린 유이설이 증명하고 있었다.
‘차라리 범의 아가리에 대가리를 들이밀고 먹어 보라고 외치는 쪽이 상식적이겠다!’
그 순간 당소소가 혼이 나간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 또라이가……. 뒈지려면 혼자 뒈지지, 왜 우리까지…….”
조걸이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위아래가 없는 화산이라지만 그래도 사형에게 또라이라는 발언은 조금……. 윤종이 들었으니 화를 낼 수도 있…….
“내 말이!”
아니네. 거, 사형 화 많이 나셨구나.
그리고 그 청명이 미친 짓에 탈진해 버린 건 화산의 제자들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탈진한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새어 나온 곳을 일제히 돌아갔다.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면 고개를 돌릴 힘조차 못 냈겠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장일소의 반응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차마 화산의 제자들처럼 주저앉을 수는 없었는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장일소의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이 어렸다.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청명에게 꽂혀 있었다.
“나는 내가 강호에서 제일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
“더한 놈이 있었네.”
그 말을 들은 화산의 제자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설마 그들이 저 장일소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이야.
평소보다 조금 더 희어 보이는 장일소의 낯빛이 조금 전의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 걸 보여 주는 듯했다.
그에 반해 다가온 청명의 얼굴은 모든 게 남의 일이라는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되레 백천과 그 무리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참나, 누가 보면 뭐 대단한 거 한 줄 알겠네. 뭘 했다고 주저앉아 있어!”
“야, 이…….”
“시주……. 시주, 제발 저기 멀리 가서 뒈지십시오. 제발…….”
소리칠 힘도 남지 않은 화산의 제자들은 그저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욕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백천이 사숙이랍시고 가장 먼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물었다.
“대체…….”
“응?”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저놈은 왜 저리 순순히 돌아간 거야?”
대화하는 걸 대충 듣기는 했지만, 사전지식이 없으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청명의 시선이 장일소에게 슬쩍 닿았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 의미를 이해한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장일소가 섭섭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같이 싸운 전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따돌리면 내 가슴이 아프지 않겠니?”
부드럽다 못해 친근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청명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너 같은 새끼랑 전우라는 말을 쓸 순간은 영원히 안 와.”
“매정한 답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 네가 하는 짓들을 보고 있으니 그게 나한테도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장일소가 살짝 묘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맞지.”
“……솔직히 이쪽이 미안하지.”
“죄송합니다.”
“뭐, 이 새끼들아?”
장일소의 말에 동조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저놈들이 기다리는 천마라는 놈은…….”
툭 튀어나온 천마라는 말에 모두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장일소는 여전히 청명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몸에서 부활하는 모양이로군?”
청명이 차가운 눈으로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저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 눈빛을 받았다.
“그리고 마교 놈들은 그 부활한 이가 스스로 천마임을 자각하기 전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러니…… 감히 누구도 죽이지 못하는 거고?”
청명은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침묵보다 확연한 대답이 또 있겠는가? 장일소의 눈이 묘한 빛을 머금었다.
“그렇다는 건…… 그 천마라는 놈이 이미 부활해서 자신이 천마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이 중원에서?”
청명의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그러자 장일소가 나직이 쿡쿡 웃었다.
“그런 눈으로 노려보면 내가 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말이야.”
장일소를 향해 치가 떨린다는 듯 살짝 이를 갈아붙인 청명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놈도 아닌 장일소고, 그 두 눈으로 직접 상황을 모두 보았으니 무슨 말을 해도 혹하진 않으리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청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부활해 있을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건지. 그게 아니면 이미 자신이 천마임을 자각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지.”
“…….”
“누구도 알 수 없어서 문제인 거야.”
대충 이해했다는 듯 장일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이라…….”
잠시 되뇌어 본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잘도 믿어 대는구나. 저 미친 광신도들이나, 그 광신도들보다 더 맛이 간 너나.”
청명은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시켜야 할 이유도 없고,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 역시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장일소처럼 이 모든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을 테니까.
장일소의 시선이 천살이 존재했던 자리와 단자강의 흔적이 남은 땅을 훑었다.
“그런데…… 그 말을 그저 광인의 헛소리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저 미친놈들이 평범한 미친놈들이 아니란 말이지.”
천살의 힘은 장일소 역시 똑똑히 느꼈다.
단자강만 해도 그가 이전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강자다. 그런데 천살은 그 단자강조차 일거에 짓밟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명백히 말해 지금 이 시점에서 천살에 대적할 만한 이는 강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힘과 내가 본 마교도들의 힘이 합쳐진다면?’
중원 정복이라는 거창한 일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적어도 지금의 장일소가 꾸고 있는 꿈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천살도, 마교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이가 어딘지 알 수도 없는 변방에서 제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오직 신앙을 이유로 말이다.
장일소이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장일소이기에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강자는 자의식 덩어리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난 이라고 해도, 그 재능을 체화하여 현실적인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세상을 뒤덮을 무위를 손에 넣은 강자는 범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자기애의 화신이 되기 마련이다.
천살 정도 되는 강자라면 그 비대한 자의식이 중원 전역으로 흘러넘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그는 그 힘을 바탕으로 천마를 극복하려 들기는커녕, 언제든 손쉽게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내던진 채 그저 천마의 재림만 기다리고 있다.
주인 떠난 집을 지키는 충견처럼 말이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하다. 아니, 가능해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한 상황은 오직 하나뿐.
장일소가 귀기 어린 눈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그 천마라는 놈은…….”
음산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 괴물 같은 놈마저도 주인 없는 집을 지키는 개새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거로군.”
강호를 살아가는 이라면 천마라는 두 글자를 들어 보지 못할 수가 없다. 그 이름은 강대함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집약체.
하지만 지금껏 천마에 대해 들어 왔던 그 어떤 표현보다, 장일소가 내뱉은 한 문장이 더 강렬했다.
“충성을 넘어 굴종……. 아니, 굴종을 넘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을 정도라.”
장일소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장일소도 누군가를 저토록 완벽하게 복속시켜 본 적은 없다. 그가 죽은 뒤 부활한단 말을 남긴다고 해서 홍견이 그를 백 년이나 기다릴 수 있겠는가?
저 살인에 미친 놈들이 불법에 매진하는 고승처럼 변방에 처박혀 기나긴 인내의 삶을 참아 낸다고?
‘어림도 없지.’
그런데 홍견도 아니라 천살 정도 되는 이를 그렇게 만들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것인가?
모두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과 싸운 것은 단자강이고,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천살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천마의 거대한 그림자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짓눌러 오는 것만 같았다.
장일소의 눈이 묘한 호선을 그렸다.
“그런 놈이 이곳 어딘가에 제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라…….”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농담치고는 과한 이야기로군.”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항주를 침공한 마교를 몰아냈고, 심지어 그들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주교의 죽음으로 이끌었다. 전과를 따진다면 이 이상을 바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이들의 얼굴에선 업적에 대한 기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마교가 가진 힘을 실감하고 천마의 힘을 짐작하게 된 이들에게 남은 건, 형용할 길이 없는 중압감뿐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겠지. 그건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니니까.”
가볍게 한숨 쉰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나중 일보다는…….”
더없이 환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눈을 본 순간 화산의 제자들은 돌연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우선 우리 일부터 해결을 해야 하지 않겠니?”
장일소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묘하게 어려 있던 친근함이 사라졌고, 이내 살기가 그 자리를 메꾸었다. 백천과 일행의 얼굴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굳어졌다.
‘설마……?’
‘이런 순간에?’
모두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언제고 장일소가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애초에 소수만 이끌고 강남으로 들어온 이유도 저 장일소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급박하다.
장일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견이 장일소의 주변으로 조용히, 하지만 신속하게 모여들었다. 동시에 화산의 제자들 역시 청명을 중심으로 장일소와 대치했다.
장일소의 요사스런 눈빛과 청명의 서늘한 눈빛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어차피 청명과 장일소는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건 홍견과 화산의 싸움이다. 저 홍견이 더없이 강하다고는 하나, 화산의 전력 역시 만만치는 않다.
‘몸을 빼내는 것 정도는…….’
백천이 슬쩍 운검과 시선을 교환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장일소가 그런 그의 의도가 빤히 보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백천이라고 했었나?”
“……네놈.”
“그렇게 계산이 느리면…… 강북에서는 몰라도 강남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다.”
“뭔 개소리를…….”
백천을 대신해 언성을 높이려던 조걸이 순간 누군가의 손에 틀어막히기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보고 만 것이다. 주위에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윤종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 흑귀보…….”
항주의 초입에 두고 왔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어느새 그들을 둘러싼 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홍견뿐이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흑귀보까지 합세한다면?
‘빌어먹을…….’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암울한 빛이 어렸다. 그 면면들을 재미있다는 듯 보던 장일소가 소리 내어 웃었다.
“궁금하지 않니?”
장일소의 얼굴에 화려한 미소가 내걸렸다. 색 옅은 두 눈에 잔혹한 빛이 일렁였다.
“집채만 한 대호와 싸우는 것과…… 굶주린 승냥이 떼에 둘러싸이는 것, 둘 중 뭐가 더 끔찍할지 말이야.”
“이 개자식…….”
조걸의 두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