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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66화 (1,067/1,567)

1066화. 죽여 보라니까? (1)

마치 유리로 만든 가면이 쩌적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광경 같았다.

온화함으로 위장한 침착이 무너지고, 지독한 증오가 드러난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천살의 얼굴을 보며 청명은 아예 낄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그럴싸하게 잘 포장되어 순간 혹해 버릴 뻔했던 거짓말에 청명이 끝내 속아 넘어가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럴 놈이 아니지.’

그가 천살이라는 이가 어떤 이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청명이 기억하는 천살은 적은 물론이고 아군에게도 자비를 보이지 않는 이였다. 말 그대로 천살(天殺).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살의와 적의로 뭉쳐 있는 이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들, 그 근본이 바뀌지는 않았을 터. 그런데 그런 천살이 고작 그따위 이유로 이곳의 모두를 순순히 놓아주고 물러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하면서 그들을 살려 줘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고려한다면 모든 것은 쉽게 풀린다.

“왜?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나?”

청명이 이죽거렸다. 명백한 도발의 언사였지만 천살은 오히려 빠르게 침착을 되찾는 듯 보였다. 역시 백 년이라는 세월을 헛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명에겐 딱히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확인해야 할 건 모두 확인했으니까.

지금껏 청명을 괴롭히던 의문에 대한 해답.

천마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돌아오는 것인가?

‘나와 다르지 않은 거야.’

짐작은 할 수 있어도 확신할 수는 없었던 일.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지금 천살의 저 반응 속에 있다.

“돌아온다고?”

청명이 쿡쿡대며 웃었다.

“궁금한데? 그게 정말 뭘 알고 지껄이는 말인지. 아니면…….”

청명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천살을 여지없이 찔러 대었다.

“그냥 대책 없는 믿음에 불과한지 말이야.”

천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청명은 그 얼굴에서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신을 잃은 광신도가 가지는 허무를.

청명 역시 죽음에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청명이 자기 자신을 자각하기 전에도 분명 초삼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갔다는 점이다.

초삼이 어느 순간 청명이 되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점이다.

만약 천마가, 바로 그 천마조차 청명과 다르지 않은 과정을 겪는다면?

‘천마가…… 이름 없는 촌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지.’

혹여 그런 상태에서 마교의 습격을 받게 된다면? 그가 천마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마교도들이 그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

위기를 맞은 천마가 천마로서의 자신을 되찾아 청명처럼 깨어나게 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깨어나지 못한 채 이름 없는 필부로 그저 죽어 가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후자의 가능성이 없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단 것.

그리고…… 천살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들은 천마가 각성하기 전까지는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

저 포달랍궁이 달뢰라마의 환생을 찾아내기 위해 반선라마라는 직위를 육성한 것과는 달리, 이들은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교는 절대 중원을 공격할 수 없어.’

천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마교도는 절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그들이 죽여도 되는 이는 천마가 죽기 전에 이미 살아 있던 이들뿐이다.

하지만 지금 천하에 그런 이들이 몇이나 남아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교도들은 오히려 살생을 자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손으로 부활할 천마를 죽여 버리는, 마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상황을 초래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건 천마를 떠받드는 이들에게는 백 번, 아니 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대죄다. 그렇기에 다른 이도 아니고 바로 저 천살쯤 되는 이가 헐레벌떡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단자강이 벌이는 살육을 막기 위해서.

고작 단자강이라는 젊은 주교 하나를 막기 위해 이곳까지 행차하기에는 천살이라는 두 글자가 가지는 이름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다. 천살이 막으려 한 것은 단자강의 일탈이 아니라 바로 학살이라는 행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쿡쿡쿡쿡.”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 댔다.

“어려웠겠네.”

“…….”

“중원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말해야 하면서도, 그들을 결코 죽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니. 이런 우습지도 않은 일이 또 있을까?”

천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말하기 어려웠겠지. 천마가 어딘가의 필부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건, 천마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거니까. 완전하지 못한 이를 완전한 척 떠받들어야 하는 그 고충이 빌어먹게도 잘 이해가 가네.”

“닥치…….”

“가여워라. 너희에게 주어진 고행이 그저 기약 없는 기다림뿐인 줄로만 알았더니…….”

청명이 낄낄대며 웃어댔다.

“설마 제 신을 죽인 원수들을 눈앞에 두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서글픈 삶이라니.”

“이노오오오오옴!”

천살이 흉살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청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를 비웃었다.

다른 모두가 몰라도 청명만은 안다. 마교도들에게 있어 천마가 어떤 의미인지.

설령 청명을 죽이는 일이 천마에게 위해가 될 확률이 천만 분의 일을 넘어, 저 드넓은 사막을 가득 채운 모래알 중 하나를 골라 내는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저들은 감히 손을 쓸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난 신앙. 그게 마교가 가진 본질이다.

“화가 나나?”

그렇기에 청명은 비웃었다. 저 가여운 광신도들을, 천마를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가진 본질은 조금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저벅.

청명이 천살을 향해 다가갔다. 백천을 지나고 운검을 지나, 거침없이.

그리고 그 광경을 본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저, 저…….’

‘저 미친놈이!’

하지만 누구도 차마 그런 그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청명과 천살. 그 거대한 두 존재의 대립에 끼어든다는 건 지금의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쪽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는지, 청명은 그저 태연하게 걸어갔다.

저벅.

그리고 마침내 천살의 앞에 섰다. 아니, 그냥 앞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자라다. 서로 닿을 듯한 거리에서, 청명은 천살을 코앞에 두고 마주 보며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그럼 죽여 봐.”

“으…….”

“죽여 보라고.”

천살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극도로 치솟은 분노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백 번도 더 청명의 머리를 으깨 죽였을 터. 하지만 천살의 손은 끝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이자는 천살(天殺).

본능적으로 피와 죽음을 탐한다는 천살성의 운명을 타고난 자. 그에게 있어서 살인을 참아 낸다는 것은 사람이 타는 목마름을 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천살은 무려 백 년이 넘는 시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 긴긴 갈증을 참아 낸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지독한 신앙. 아니, 이쯤 되면 경이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신앙이었다.

“왜?”

하지만 청명에게 그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청명은 천살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마치 수행하는 불자를 유혹하는 마라(魔羅)처럼.

“죽여 보라니까?”

“…….”

“낄낄낄낄.”

이미 엉망이 된 청명이 자신의 살기에 혹 죽기라도 할까 봐 천살은 차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살기조차 마음껏 내뿜을 수 없었다. 청명은 그런 그를 가열하게 비웃었다.

“왜? 못 하겠어?”

천살의 손이 들썩댔다.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일순간 격하게 움직였다가도 제자리를 되찾기를 반복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꼬리를 타고 피눈물이 흘렀다.

“이 더러운…… 더러운 불신자 놈이…….”

“그래. 나는 더러운 불신자라니까?”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너는 그 파리 새끼만도 못한 불신자 하나 쳐죽이지 못하는 병신이고.”

청명의 비웃음이 천살의 두 눈에 틀어박혔다.

“아닌가?”

천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청명을 노려본다. 그의 달아오른 입술 사이를 붉은 피가 비집고 나왔다. 입술을 깨물어 나는 피가 아니나 지독한 노화를 참지 못하고 역류한 기운에 내상마저 입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청명이 손을 뻗어 천살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잘 들어. 이 병신 새끼야.”

천살의 머리를 제 앞으로 확 끌어당긴 청명이 그와 눈을 마주친 채 으르렁대듯 윽박질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새끼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주둥아리 털어 대지 말고 썩 꺼져. 너희 마교 새끼들이랑 같은 곳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쏠리니까.”

“끄…윽…….”

말을 마친 청명은 끌어당겼던 천살을 확 떠밀었다.

천살은 이번에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노기와 증오, 굴욕으로 뒤범벅된 얼굴이 볼만했다. 천살이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는…… 너는 반드시…….”

지독한 저주가 흘러나왔다.

“너는 반드시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강림하시는 날에, 내 친히 이 손으로 네놈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찢어 죽이겠다. 아니! 네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야 말겠다! 반드시! 반드시!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네놈과 화산에게 처절한 고통을 안겨 주겠다! 반드시!”

“…….”

“세상 어디로 도망쳐도 반드시 네놈을 찾아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어 주겠다! 기억하라, 화산의 제자여! 너는 교의 분노가 얼마나 짙고 깊은지를 뼛속 깊이 알게 될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원독이 청명에게 생생히 전해졌다. 하지만 청명은 지옥에서 뿜어져 나온 듯한 독설을 듣고도 그저 차게 비웃을 뿐이었다.

“아아, 그래?”

천살을 보는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거야 네 마음이지. 그런데 하나 오해하는 게 있네.”

“…….”

“굳이 힘들게 찾을 필요 없어. 혹시라도 천마 새끼가 돌아와서 너희가 다시 중원 땅을 밟는 날이 온다면.”

청명의 입에서 차가운 선언이 흘러나왔다.

“너희는 가장 먼저 나와 화산을 마주해야 할 테니까.”

증오에 찬 천살의 눈과 서늘한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거칠게 얽혀 들었다.

“그러니 이제 꺼져, 멍청한 새끼야. 사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땅에서 벌벌 떨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천마나 기다리며 죽어 가. 그게 너희의 신앙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명은 대꾸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감히 등을 보이는 청명을 보면서도 천살을 손 한 번 시원하게 뻗지 못했다. 그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덜덜 떨어 댈 뿐이었다.

“……네 이름은?”

뇌를 터뜨려 버릴 것 같은 지독한 증오 속에서 천살이 겨우 짜낸 질문이었다. 청명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묘한 웃음을 흘렸다.

“청명.”

“……청명?”

“왜? 이상한가?”

“…….”

“멍청한 네게는 좋은 일이지. 결코 잊을 일은 없을 테니까.”

천살이 차디찬 눈으로 청명의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교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

지옥의 악귀 같은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던 천살의 모습이 이윽고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마침내 천살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진 걸 느낀 화산의 제자들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털썩.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 백천은 이쪽을 향해 태연히 걸어오는 청명을 보며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저…… 저 미친 또라이 새끼…….”

누구도 그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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