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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65화 (1,066/1,567)

1065화. 이렇게 하는 거지? (5)

생각이라는 게 점점 떠밀려 사라졌다.

겁을 집어먹거나 공포에 떠는 게 아니었다. 그저 천살이 뿜어내는 살기를 직면한 순간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겪고 극복해 왔던 모든 것들을 장난처럼 만들어 버리는 살기. 그 지독한 위압 앞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숨을 멈추었다.

의형살인(意形殺人).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강제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린 북해의 삭풍을 떠올리게 만드는 천살의 눈빛이 찬찬히 그곳에 남아 있는 모두를 훑었다.

지독한 악의를 가진 자가 더없이 예리한 칼을 목에 들이미는 것만 같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날이 단숨에 목을 파고들 것 같은 압박감. 그 앞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이들의 귀에 읊조리는 듯한 천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 그래. 화산이로군. 아직 잘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그 반응만으로도 새로이 등장한 이 주교가 화산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단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한의 결과는…… 누구라도 예상 가능했다.

단자강과 싸우느라 이미 걸레짝이 되어 버린 청명과 장일소로는 절대 저 주교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면 이곳의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남은 길은 그저 하나. 도주(逃走).

대적이 불가능한 적 앞에 의미 없이 대항하는 것보다는 등을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낫다. 그건 화산이 수도 없이 제자들에게 강조해 온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저 주교를 상대로 달아난다는 게?

생각조차 이어지지 않고,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저런 자를 피해 달아나란 말인가?

하나 바로 그때였다.

지독한 압박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명도, 백천도 심지어는 장일소도 아닌 누군가가.

저벅. 저벅.

바짝 굳은 이들의 사이를 지나 앞으로 걸어 나가는 사내의 등으로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 넓지 않은 등.

어색하게 비어 펄럭이는 한쪽 소매.

“사, 사숙…….”

백천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사숙인 운검이 홀로 움직여 나선 것이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운검 사숙!’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지독한 살기 앞에서 정신이 날아가 버리지 않게 버티는 것도 버거운데, 대체 어떻게 저리 움직일 수 있는 걸까?

백천은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운검을 보았다.

운검은 끝끝내 마지막 발걸음까지 옮겨 천살을 마주하고 섰다. 몸을 곧게 세우는 것도 힘들다는 듯 잠시 전신을 떤 그는 억눌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화산파.”

뒤에 선 이들은 운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잘게 떨리는 운검의 어깨와 목소리뿐. 빈말로도 아주 당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저 등을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홀로 천살과 마주 선 운검의 등은 되레 그 앞에 서 있는 천살보다 더욱 대단해 보였다. 적어도 화산 제자들의 눈에는 말이다.

“……일대제자 운검이라 합니다.”

천살은 말없이, 그저 차디찬 눈으로 운검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다른 이들을 짓누르던 지독한 압박감이 옅어졌다. 하지만 그 말인즉, 운검에게는 더 큰 압박이 실리기 시작했단 의미다.

하지만 운검은 끝끝내 말을 마저 이었다.

“……귀하께서는 화산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하……?”

천살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이들은 과거 화산과 마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이 질문은 너무도 상식에 어긋난 일이 아닌가?

그들은 조금 전까지 마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마교의 주교인 단자강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런데 이제 와 천살에게 용무를 묻다니.

“하하하하핫.”

천살은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용무라…….”

그러다 돌연 웃음기를 싹 지운 그가 차갑게 운검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쩔 셈인가?”

“…….”

“혹여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죽여 없애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네가 나를 막기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화산의 후예여?”

“…….”

“그 미약한 능력으로?”

천살이 강조라도 하듯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너는 화산의 이름은 이었을지는 모르지만, 화산의 힘은 하나도 잇지 못했구나. 적이지만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에 비하면 지금의 너는 벌레만도 못하다. 그럼에도 감히 내 앞에 서겠다는 것이냐?”

그 순간 천살에게서 뿜어진 가공할 살기가 운검에게 온전히 쏘아졌다.

“그 화산이라는 두 글자 말고는 아무것도 이어받지 못한 네가?”

“쿨럭!”

운검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살기가 그의 기운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살기만으로 내상을 입어 버린 운검은 검은 피를 몇 차례나 토하고서야 하나 남은 팔로 제 입가를 훔쳤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내상으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운검의 표정은 되레 처음보다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저 역시 제 주제를 아는 이. 그런 꿈은 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감히 내 앞에 섰느냐?”

“……그쪽 역시 위에 선 사람이니 이해하시겠지요.”

“음?”

운검이 힘겹게 웃었다.

“능력이 부족하다 한들, 뒤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이라면…… 하다못해 먼저 죽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운검이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그의 손은 이제 더는 떨리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그쪽이 보기에 제 능력은 벌레만도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 역시 벌레에 물려 죽기도 하는 법. 운이 좋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천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네 목숨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인가?”

“고작……?”

운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밝았지만, 피에 젖은 이가 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그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천살은 잠깐 말없이 흥미롭다는 듯 운검을 주시했다.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저자는 지금 그의 앞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라는 걸.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심혼을 깎아 가며 버티고 서 있다.

천살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이름만 물려받은 것은 아니구나.”

천살이 운검에게서 시선을 떼고 먼 하늘을 보았다. 오래전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이.

“백 년이 지났어도, 그 힘을 잃었다 해도, 화산은 화산이라…….”

천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사방을 난자해 버릴 것 같았던 지독한 살기 역시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잠시 흥분했군.”

모두가 의혹 어린 얼굴로 천살을 보았다. 천살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너희를 해하는 일은 없을 터이니.”

“…….”

“물론 오해는 하지 말거라. 교는 저열한 불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특히나 화산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는 이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 두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하나…….”

천살이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졌다. 그곳엔 단자강이었던 재가 흩어져 있었다.

“누구에게나 입장이라는 게 있지.”

“…….”

“화산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우는 건 내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의무이나, 배교자가 하려던 일을 이어받는 것은 한 사람의 교도로서 피해야 하는 일. 그러니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쿡쿡쿡쿡.”

그 순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살의 시선이 자연히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했다.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차림새의 사내가 참기가 어렵다는 듯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천살이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장일소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미안하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

“그런데 내가 좀 꼬인 인간이라서 말이야. 누가 내 목숨줄을 틀어쥐고 있는 듯이 굴면 웃음을 참기가 어렵거든.”

천살은 가늘어진 눈으로 장일소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중원도 많이 변했군.”

“…….”

“그래, 그럴 만한 시간이지. 이미 백 년이 흘렀으니, 우리를 잊기에도 충분했겠지.”

천살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대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땅이지만, 그는 이곳을 잠식했던 죽음의 기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도시가 사라졌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이 사라졌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너희가 본 것은 교가 가진 힘의 편린에 불과하다.”

“…….”

“알게 될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중원의 불신자들이여.”

그 순간 천살의 얼굴에 이루 말로 다 표현 못 할 엄숙함이 피어났다.

“곧 그분께서 돌아오실 것이다.”

모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입에서 나온 ‘그분’의 누구를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이가 이곳에 있겠는가. 마교에 몸을 담은 이들, 그중에서도 주교라 불리는 이를 저토록 경건하게 만들 존재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니까.

“그때, 너희는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를.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천살이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너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즐겨 두거라. 얼마 남지 않았을 테지만.”

천살이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그런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귓가로 파고든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게 아니겠지.”

발을 멈춘 천살이 몸을 그대로 둔 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한 젊은 화산의 검수가 보였다.

청명이 나직이 말했다.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일 수 없는 거지. 그렇지 않아?”

“…….”

“이거 어쩌지?”

이죽거리는 듯한 음성이 천살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혹시 모르잖아. 네가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날뛴 놈들이 죽여 없앤 이곳의 사람들 중에…… 그 잘난 천마 새끼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이…….”

우드드드득!

천살이 이를 갈아붙였다. 순간 두 눈에 핏발이 돋아 올랐다. 마공을 끌어 올려 혈광을 내뿜었기 때문이 아니다. 순수하게 분기탱천하여 두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간 것이다.

“하하하하하핫!”

그 모습을 본 청명이 광인처럼 웃어 댔다.

“화가 나나?”

“……너, 이놈…….”

“그럼 어쩔 건가? 죽이기라도 하려고?”

천살이 뿜어내는 대단한 분노는 분명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금 전과 달리 그들에 대한 적의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못 할걸?”

청명이 삐딱하게 조소했다.

“내가.”

“이이…….”

“천마일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노오오오오옴!”

사무치는 원한과 지독한 악의, 악취 풍기는 원망이 모두 뒤엉킨 절규가 쏟아졌다. 천살의 눈꼬리를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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