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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62화 (1,063/1,567)

1062화. 이렇게 하는 거지? (2)

콰아아아아아아!

머리 위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사방을 검게 물들이며 덮쳐 오는 마기는 마치 강림하는 지옥과도 같았다.

멸망의 선고이자, 종말의 현신. 그 짙은 절망 속에서 노을에 물든 검이 움직였다.빛살처럼, 또는 환상처럼. 그리고 과거의 어느 한 때처럼.

검은 그저 검일 뿐이다. 금속으로 된 차가운 날붙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검수에게 검이란 그저 무감정한 날붙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 끝에는 검을 쓰는 이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어쩌면 숭고함. 어쩌면 자신감.

그리고 아마…… 그때 이 검, 아니 비도의 끝에 머물렀던 건…….

‘뻗어라.’

발끝을 타고 오른 진기가 손끝을 넘어 검으로 모여들었다.

검과 육신이 순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 같은 일체감. 과할 정도로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만들어 낸 선명함.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커다란 충족감.

그 모든 것을 담아 낸 검이 그저 나아간다.

‘단 한 번!’

검을 잡은 청명의 두 눈이 지독한 살기를 뿜었다. 검은 재차 휘두를 수 있다. 허공을 가른다 해도 다시 휘두르면 되고, 또 한 번 찔러 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비도(飛刀)는 그저 일격필살이다.

손끝을 떠난 비도는 그것으로 끝이다. 기회는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압박감 속에서, 청명의 검은 하나의 선을 그어 냈다. 마치 허공을 나는 검을 제외하면 모든 게 멈춰 버린 듯도 했다.

선이란 본디 잇는 것. 닿지 않아야 할 것들의 사이를 그어 하나로 잇는다.

청명의 검이 그어 낸 선이 잇는 것은 지금 그가 서 있는 현재와 색이 바래 버린 오래전의 과거였다.

찰나를 쪼개고 또 쪼갠 시간의 틈새. 유례없을 정도로 가속하는 사고. 상대적으로 지독하게 느려진 세상 속에서 청명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부족해!’

이게 아니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니야!’

그가 기억하는 당보의 비도는 결코 이런 어중이떠중이 같은 일격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발출에 영혼마저 싣는 듯한 비도. 새벽의 유성처럼 찰나의 순간을 가르고 사라지지만, 그렇기에 그 어느 것보다도 찬란했던 것이 당보의 비도다.

그러니 더 빨라야 한다. 더 정확해야 하고, 더욱 강력해야 한다! 더욱! 더욱더!

바로 그때, 청명의 귓가에 환상 같은 목소리가 스쳤다.

- 도사 형님은 항상 너무 급한 게 탈이요.

과거 어느 날, 당보가 그에게 장난처럼 건넸던 말.

- 담아 내고 싶은 거야 수도 없이 많지요. 하지만 모두 담으면 그저 무거워질 뿐입니다. 도사 형님의 그 두 어깨처럼 말이죠. 잔뜩 짓눌린 어깨로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 제대로 비도를 던지고 싶다면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겁니다. 비도 끝은 그저 가벼워야 하니까. 담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비운다. 그게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아니겠습니까? 물론 뭐, 그걸 도사 형님 같은 말코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와 섞여 나오던 웃음소리마저 귀를 간질인다. 정말 지금 이 순간, 과거의 어느 한때가 이어진 것처럼.

- 언젠가 그게 가능해진다면…….

청명을 옭아맨 모든 것이 끊어진다. 남는 것은 그저 손끝에 닿은 검의 감각. 그 감각이 청명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비도(物)와 청명(我)이 하나가 되고(一體).

검(劍)과 육신(身)이 이어진다(合一).

- 모르지요. 도사 형님의 검이 정말 저 천마에게까지 닿을지도.

청명이 어둠으로 물든 세상을 가르며 나아간다. 비수의 끝이 향하는 것은 그 어둠의 근원. 그리고 그 일격은 청명이 쏜 화산의 검이자 먼 과거에서 당보가 날린 비도다.

이어질 리 없는 것을 이어 낸 청명은 마(魔)를 멸(滅)할 비수(滅魔匕)로 화해 마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은 분명 과거와 이어져 있다.

혼연(渾然)을 이루고 무아(無我)를 넘어, 마침내 자연(自然)에 이른 검이 본디 그래야 했던 것처럼 세상을 가른다.

그리고 그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장일소와 청명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의 정지한 것과 다름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장일소가 지어내는, 요사스러운 미소가.

장일소가 팔을 위로 치켜올렸다. 머리 위를 덮쳐 오는 거대한 어둠에 대항하기엔 너무도 미약하고 무력해 보이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장일소의 전신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아아아악!

마지막 내력 한 줌까지 뽑아낸 혼신의 일격이 쏟아져 내리는 마기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허공에서 푸른 불길과 검은 마기가 충돌했다. 압도적인 위용으로 쏟아지는 마기를 막아 내기에는 너무도 미약한 불꽃이다.

하지만 한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그 불꽃은 분명 무너지는 태산 같은 마기를 똑똑히 밀어 냈다. 결코 깨지지 않을 듯 굳건한 철벽에, 미세하지만 선명한 틈이 열렸다. 아니, 장일소가 비집어 열어 낸 것이다.

마주쳤던 시선이 어긋나며 청명의 몸이 장일소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장일소의 손이 완벽히 무방비한 청명의 등에 가 닿았다.

청명의 귓가에 결코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스치는 듯했다.

“가라.”

파아아아아앗!

그의 등을 밀어 내는 장일소의 힘마저 더해 쏘아진 검이 한계를 넘어 이적(異蹟)에 이른다.

그 순간, 솟구친 마기에 자신을 내맡기며 혼탁하게 흐려져 있던 단자강의 두 눈에 선명한 빛이 돌아왔다.

‘노을?’

환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완벽하게 마에 물들어 있던 단자강의 이성마저 되돌릴 정도로 경이로웠다.

단자강이 만들어 낸, 빛 한 점 보이지 않을 듯한 세상에 희미한 붉은 빛이 피어났다. 그 미약하기 짝이 없는 붉은빛은 깊고 깊은 어둠을 뚫으며 점점 더 번져 갔다.

마치 긴 밤의 끝에 이르러 동쪽 하늘에서부터 노을이 번져 가듯.

그건 곧 여명(黎明). 새벽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그 광경 속에서, 붉은 노을을 가르며 백색 검이 날아들었다.

‘이건?’

단자강이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섬뜩한 죽음의 감각이었다. 어둠을 불사르며 날아드는 여명과도 같은 검이 단자강의 모든 것을 부수며 그의 목을 향해 아득히 파고들었다.

콰드득!

세상이 완전히 멎어 버린 것 같은 그 순간,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똑똑히 보았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절망적인 강자, 단자강이라는 주교의 목을 꿰뚫고 들어간 암향매화검이 그의 목덜미를 뚫고 삐죽이 솟아 나오는 광경을.

모두가 숨을 멈췄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 지워진 듯도 했다.

여전히 그들을 휘감은 기파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음에도 모두가 그 정적을 확실하게 느꼈다. 짧디짧기에 더욱 강렬한 고요를.

또옥.

단자강의 목을 꿰뚫고 나온 백색 검신 끝에서 한 방울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둑히 가라앉은 청명의 무심한 눈빛과 들끓는 단자강의 눈빛이 지척에서 서로 얽혀 들었다.

역류한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며, 단자강은 소리 없이 무언갈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은 알아듣지 못해도 청명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진언을.

“……앙복.”

단자강이 들어 올린 팔을 강하게 떨치듯 내리그었다.

아직 채 흩어지지 않은 마기의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흡사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

모두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누가 질러 대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거대한 비명과 함께, 가공할 마기가 대지와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지에 틀어박힌 마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기세로 약동했다. 그리고 이내 세상을 거대한 마기의 폭풍으로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폭풍에 휩쓸린 화산의 제자들은 태풍을 맞은 가랑잎처럼 손 쓸 방도도 없이 튕겨 날아갔다.

화산의 제자들뿐 아니라, 넋을 잃은 얼굴로 이 지독한 격전을 지켜보던 마교도들까지도 그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추풍낙엽처럼 휩쓸렸다.

튕겨 날아가 땅에 처박히기를 몇 차례나 반복한 화산의 제자들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연이어 터져 나온 천붕지음이 고막을 터뜨려 댈 것처럼 모두를 덮쳐 왔다. 세상이 일제히 무너지는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콰앙! 콰아아아앙! 콰앙!

그 거대한 충격이 거칠게 대지를 휩쓸고 난 뒤.

기어코 정적이 찾아왔다.

꿈틀.

대지가 거칠게 파이며 날렸던 토사에 뒤섞여 엉망이 된 백천이 몸을 떨었다. 손가락 끝이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끄으…….”

신음을 뱉어 낸 그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격하게 고개를 들었다.

“처, 청명…….”

두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발의 중심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 여파에 휩쓸린 그마저도 속이 온통 뒤집혀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데?

“아, 안 돼……. 안…….”

우드득!

백천은 손에 잡힌 돌덩어리를 으깨며 몸에 힘을 주었다. 거의 땅을 파내고 긁다시피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처, 청명아! 청명아아아아아아아!”

청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결말을 뇌리에 떠올려 버린 백천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청명아! 이 새끼야아아아아아!”

“사형!”

그 순간 유이설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기!”

백천이 황급히 그녀가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마치 천신이 잡아 뜯어 낸 것처럼 거대하게 파여 버린 대지. 그 한중간에 붉고 검은 두 개의 점이 보였다.

“처, 청명아!”

“련주님!”

백천과 호가명의 입에서 동시에 고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쓰러져 있는 청명과 장일소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성한 곳 하나 없이 엉망으로 망가진 채 토사에 반쯤 묻혀 있던 청명의 입술이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으…….”

쩍쩍 금이 간 듯한 입술이 열리는 순간, 기껏 들러붙었던 상처가 다시 갈라지며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으…….”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마찬가지로 땅에 반쯤 묻힌 채 고개를 꺾고 있는 장일소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명은 한참이나 고생한 끝에 다 쉬어 버린 목소리를 짜냈다.

“……어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이.”

그 순간 죽은 듯 고개를 꺾고 있던 장일소의 입에서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살아 있냐?”

그러자 장일소의 입에서 힘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절대 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맥없는 목소리였다.

“……아마…… 죽은 것 같은데……?”

“그래……?”

청명은 너무도 힘겹게 몸을 돌렸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뒤집어 누우니 하늘이 보였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다.

“그거…….”

길었던 밤이 끝나고, 마침내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쿡쿡대는 청명의 웃음소리가 고요하게 내려앉은 아침의 세상에 천천히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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