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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59화 (1,060/1,567)

1059화. 네 목소리 같은 건 닿지 않아. (4)

대지가 비명을 질러 대고, 하늘이 뒤흔들렸다.

연이어 날아드는 충격에, 마교도들은 물론이고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튕겨나가고 뒤로 밀려났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감안한다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처, 청명…….”

백천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저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살아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차마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론 앞에, 백천의 이성이 아득하게 날아갔다.

“사숙! 저기!”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의 고개가 격하게 돌아갔다.

손을 뻗은 건 조걸이었다. 그리고 그 끝이 가리킨 건…… 한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반쯤 주저앉은 청명이었다.

“아…….”

순간 전신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무슨 내력이…….”

백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무인의 강함을 논하는 요소는 보통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의 무학을 얼마나 완벽하게 익혀 냈는가. 다른 하나는 내력이 얼마나 강한가.

청명의 지론대로라면 여기에 운용이나 임기응변, 정신력 같은 요소가 추가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무인의 강함을 정하는 척도가 된다.

둘 중 어느 한쪽이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앞서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무학과 내력의 조화다. 적어도 백천은 그렇게 믿어 왔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고 나니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내력에서 뿜어지는 파괴력은 무학에 대한 백천의 상식을 산산조각 내었다.

‘이, 이래서…….’

마교도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주교가 얼마나 강한지. 어떤 내력을 숨기고 있는지.

그렇기에 자신들의 주교가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 사숙…….”

당소소의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말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저 괴물을?”

백천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청명을 믿는다는 말을 대책 없이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 건 믿음이 아니라 방종에 지나지 않을 테니.

대신 백천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잘 들어라, 소소야.”

“…….”

“저놈은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사, 사숙.”

“만약에……. 만약에 정말 청명이 놈도, 장일소마저도 저놈을 어찌하지 못한다 싶을 때는…… 여기에 있는 모두가 달려들어 저놈만은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

실로 냉혹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틀린 구석이 조금도 없다. 어차피 저 두 사람이 패배하는 순간, 이곳에 남겨질 이들은 뒤가 없다. 이 마교도들이 그들을 순순히 보내 줄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그 죽음의 가치라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지?’

백천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고민했다.

정말 여기서 시간을 더 끄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지금 우리가 청명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같이…….

백천이 조바심에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옷 소매를 꽉 잡았다.

“……사매?”

유이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기다려요, 사형.”

“…….”

“사질은 아직 싸우고 있으니까.”

그 말에, 백천의 시선이 다시 청명에게로 향했다.

이 먼 거리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자세를 낮춘 청명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형형한 빛이.

“……그래.”

백천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린다. 놈이 죽고 나서 복수를 할 생각은 없어.”

“그때는 제가 먼저 뛰어나갈 거예요.”

유이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백천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핏발 선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아…….’

“후욱……. 후욱…….”

청명의 턱을 타고 피 섞인 땀이 흘러내렸다. 전신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프고, 또 지독하게도 무거웠다. 몸에 남은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청명은 슬쩍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발이 반쯤 짓뭉개져 있다.

마기가 날아드는 순간 허공으로 검을 던지고, 그 반동에 몸을 실어 빠져나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오른쪽 발이 마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오른쪽이라 다행인가?’

우수검을 쓰는 이에게 왼쪽 발은 검격을 위한 체중을 실어 주는 곳. 왼쪽 발이 상하면 검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른발 역시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왼발보다는 낫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검에 실을 힘이 아니었다. 발을 당했다는 건 기동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가 지금까지 단자강을 몰아붙일 수 있게 했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를 잃은 것이다.

왜? 왜 이런 결과가 나왔지?

콰득!

검을 땅에 박아 넣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오만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단자강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너, 흡정마공(吸精魔功)도 익혔나?”

그 말에 단자강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아무래도 교에 대해 꽤 박식한 모양이로군.”

“……마교도 다된 모양이야. 너 같은 애송이 놈에게 흡정마공까지 내어 주다니.”

청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실수는 아니다. 그저 생각하지 못한 것일 뿐.

지금의 마교는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마교였다면, 저런 신입이나 다름없을 어린 주교에게 흡정마공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공 중에서도 가장 불완전하고 위험한 흡정마공은 타인의 내력을 빨아들여 제 내력을 늘리지만, 사용하는 이의 정신마저 혼돈으로 몰아간다.

흡정마공으로 인해 심마에 든 이는 교와 신앙에 미친 마인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광인이 되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짐승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힘과 광신만을 추구하는 마교에서조차 쉽사리 익히게 허가하지 않는 마공이다. 하지만…….

‘멍청했어.’

생각했어야 한다. 지금의 마교는 과거와 다르단 사실을.

백 년 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제멋대로 내력을 빨아들이다 흡정마공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마교도들끼리만 무리 지어 살고 있을 지금의 마교에는 흡정을 할 대상이 오직 하나뿐이다.

“……살모사 같은 새끼가, 이제는 제 교도들마저 먹어 치웠구나.”

흡정을 할 대상이 같은 마공을 익힌 마교도라면, 그 부작용도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다 해서 흡정마공의 부작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었을 터.

그걸 놓쳤기에 청명마저도 저 주교의 내력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단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모든 예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제 상식에서 벗어난 일은 예상하지 않는다. 청명을 상대하는 이들이 곧잘 저지르던 짓을, 지금 청명이 저 주교를 상대로 저지르고 만 것이다.

“교의 미친놈들이 몸이 제대로 달은 모양인데? 그래도 예전에는 같은 교도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왜? 천마 새끼가 죽고 나니 그대로 썩어 문드러질 게 두렵기라도 했나?”

“…….”

“대답해 봐라. 같은 교도를 먹어 치우는 기분은 어땠지? 절규하는 이들의 기운을 빨아들일 때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나 했나?”

단자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땠냐고?’

저놈은 전혀 모른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교에 대한 지식은 있는 모양이지만, 교에 대한 이해는 조금도 없다.

‘알 수 없겠지.’

그에게 기쁘게 내력을 바치며 죽어 가던 이들의 얼굴을. 천마께서 강림하실 때, 그 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환희에 젖어 죽어 가던 이들을.

버티지 못한 건 오히려…….

단자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가엾구나, 중원인이여.”

“……뭐?”

“짐승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을 수 있는 순간까지 참아 낸다.”

“…….”

“그렇지 못하면 버림받고 또다시 표적이 되기 때문이지. 대체 너는 무엇을 겪었기에 그 꼴이 되었음에도 한순간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으드득.

청명이 이를 갈아붙였다.

“멋대로 지껄여 대기는.”

청명의 목소리는 흡사 폐부를 찔린 이의 신음처럼 들렸다.

짧게 몇 차례 호흡해 다시 진정한 청명은 단자강을 향해 걸었다. 상처 입은 발이 질질 끌렸다.

“애송이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

“왜, 벌써 이긴 것 같아?”

청명이 귀기 어린 미소를 흘렸다.

“하나 알려 주지, 멍청한 놈아. 전장에는 승패 같은 게 없어. 죽느냐 죽이느냐만 있을 뿐이다.”

이깟 상처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이보다 몇 배는 더 심한 상처를 입고도 그는 싸웠고, 상대를 기어이 죽여 왔다. 이제 와 새삼스럽지도 않다. 발 한쪽 뭉개졌다고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단자강은 그저 차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는 강림을 기다렸다.”

“…….”

“그 긴 세월 동안.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언젠가는 그분이 우리의 신심에 대답하실 날이 올 거란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그저 기다렸지.”

잠시 말을 멈춘 단자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기다림이 힘겨운 게 아니다. 진정으로 힘겨운 건, 한마디 대답조차 듣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이들의 목숨. 그 무게다.”

“쿡…….”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의 어깨가 순간 들썩였다.

단자강의 두 눈이 순간 어둡게 번뜩였다. 저 웃음이 그를 도발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스운가?”

질문을 던졌지만, 청명은 도통 진정이 되질 않는 모양으로 한참을 더 웃다 끅끅대며 입을 막았다.

“아아, 미안.”

여전히 웃음기가 걷히질 않아 피에 젖은 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구름 위에서 고기 낚겠다고 낚시하는 인간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의미인가?”

“다 틀렸다는 소리야.”

청명이 검을 움켜잡았다.

“너는 절대 보답받지 못해.”

“…….”

“설사 천마가 강림하더라도 말이야. 네 목소리 같은 건 닿지 않아. 적어도 놈에게는.”

단자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명은 단자강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가엾구나.”

“……너…….”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모시고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 네 신은 너를 돌보지 않아. 너희의 절규 따위는 너희의 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으드드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단자강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알고 있다. 저 작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걸. 교에 대해, 천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는 말에 흔들릴 이유 따윈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지금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

지금 청명이 한 말이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역린을 찔려 날뛰는 용처럼 그의 내부를 타고 흐르는 기운이 제멋대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 더러운 불신자 놈이…….”

“그래. 너희의 눈에 나는 불신자에 불과하겠지. 더럽고 추악할 테고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너도 하나는 알아 둬야지.”

청명이 낄낄대며 웃었다.

“네가 그리 추악하게 여기는 불신자나, 목숨을 걸고 천마의 발바닥을 핥아 대는 너희나…… 천마라는 정신 나간 놈의 눈에는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걸.”

“이…….”

단자강의 두 눈에서 혈광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잘도! 잘도! 그따위 말을! 잘도!”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해지는데?”

청명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 눈물까지 훔쳤다.

“천마가 뭔지도 모르는 너 같은 놈이 그 두 눈으로 천마를 보게 되었을 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네놈은 그냥 믿는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머저리 새끼일 뿐이야.”

“노오오오오오옴!”

단자강의 분노에 호응하며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폭포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단자강은 아예 눈을 까뒤집고 날뛰었다.

“죽인다! 죽이겠다! 그 망령된 입을 짓이긴 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짓뭉개 버리겠다! 감히 교를 모욕하고, 천마를 모독한 네놈의 영혼마저도 절대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할 테면 해 봐, 이 등신 새……!”

청명 역시 거칠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들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엉망으로 찢긴 붉은 장포를 걸친 사내, 장일소였다.

“오손도손한 친목 도모 중에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너는 아직 더 쉬어야 한단다.”

“……뭔?”

“저 개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이젠 지겹거든. 딱 한순간, 틈을 만들어 줄 테니 놓치면 안 된다?”

슬쩍 미소를 흘린 장일소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까라락 반지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으며 쇄도해 오는 단자강을 향해 마주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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