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화. 나도 미친놈이었군. (5)
이성을 잃은 집법사자들이 상처 입은 범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청명 역시 한 줄기의 유성이 되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노오오오오오옴!”
눈을 까뒤집은 적일이 세검을 내리쳤다. 그의 검 끝에선 시커먼 마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끼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적일의 검이 원한에 찬 귀신처럼 울부짖었다. 듣는 것만으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영혼이 떨리는 듯한 끔찍한 귀곡성이었다. 마치 적일이 품고 있는 원한만큼 그의 검이 대신 울어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상대하는 청명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동요조차 없었다. 조금 전까지 느물대며 던지던 말은 모두 거짓인 것처럼 감정 하나 띠지 않은 채 날아드는 적일의 검을 맞받았다.
콰아아아아아앙!
검끼리 허공에서 맞부딪히니 폭음이 터지며 검은 마기와 붉은 검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그그극! 그그그그그극!
검과 검이 서로 밀어 낸다. 상대의 목을 향해 겨눠진 검은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금방이라도 목을 그어 버릴 듯 뱀처럼 요동쳤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앗!”
적일이 살기를 뿜어내며 청명의 검을 밀어붙였다. 그 순간 청명이 밀려오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검을 기울이며 적일의 세검을 흘려냈다.
카가가각!
세검이 암향매화검의 날을 타고 스치며 붉은 불똥을 튀겼다.
세검이 검 끝에 닿는 순간, 손목을 뒤틀어 검을 아주 튕겨 버린 청명이 가공할 속도로 암향매화검을 휘둘렀다. 서로 어깨와 어깨가 닿을 것 같은 짧은 거리. 그 거리 안에서 수십으로 분열한 검영이 적일의 전신에 쏟아졌다.
콰득! 콰득!
몸으로 날아든 검은 여지없이 적일의 몸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적일의 몸은 강철도 쉽사리 꿰뚫는 암향매화검의 검격을 피륙의 상처 정도로 막아 내었다.
“소용없다!”
적일이 좌수를 치켜올렸다. 마기가 그의 손을 뒤덮으며 끔찍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손끝에서 길게 돋아난 마기가 마치 짐승이나 악마의 손톱을 연상케 했다.
콰아아아!
적일의 손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청명에게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청명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좌수를 들었다.
그의 손끝이 분열하듯 흔들리더니 이내 수십 개의 장영이 피어올라 적일과 그의 사이에 붉은 벽을 세웠다.
화산이 천하에 자랑하는 수공, 매화산수(梅花散手) 중 홍화구벽(紅花究壁)의 초식. 완벽한 장영의 벽을 길게 자라난 적일의 손톱이 할퀴어 댔다.
“큭!”
적일의 두 눈에 일순 당혹감이 어렸다.
단숨에 벽을 뚫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 벽을 깊이 할퀸 순간 단단한 느낌이 아니라 아니라 한없이 물컹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그의 손을 감싼 것이다.
긁으면 긁는 대로 밀려나던 기운은 그의 손이 지나가기 무섭게 언제 밀려났냐는 듯 다시 제자리를 채웠다.
마기에 어린 날카로움마저 감싸 안는 극한의 유공(柔功)이었다.
당혹을 숨기지 못한 집법사자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던 기운의 벽이 돌연 뚫리며 검이 날아들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뭣?’
순식간에 목 한가운데를 꿰뚫을 듯한 공격에 적일은 기겁하여 몸을 틀었다.
서걱!
검 날이 그의 오른쪽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시뻘건 검상이 가로 새겨졌다.
“큭!”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오래 신음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목을 베고 지나간 검이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서더니 그대로 방향을 바꿔 맹렬한 기세로 적일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적일은 순간 입을 쩍 벌리며 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마기를 휘감은 손과 붉은 검기를 머금은 검이 충돌했다. 적일은 곧장 오른손으로 세검을 광포하게 내질렀다. 청명의 몸이 금방이라도 꿰뚫릴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이 살짝 끌어당긴 검을 섬전처럼 적일의 목을 향해 질렀다. 서로 검을 마주 찌르게 된 것이다.
청명이 노리는 곳은 적일의 목, 적일이 노리는 곳은 청명의 가슴.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적일은 이를 악물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세…….’
그리고 그 순간 보았다. 청명의 얼굴에 스친 악귀 같은 미소를.
순간적으로 적일의 머릿속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이 스쳐 지나갔다.
교도는 결코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교도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목을 내어 주며 상대의 가슴을 꿰뚫는 선택은 선뜻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인간으로서 가진 생존본능이 찰나 간 불신자에 대한 증오를 뛰어넘었다.
적일은 반사적으로 검을 뒤틀며 쇄도하는 청명의 검을 쳐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파라라라락!
나비가 맹렬하게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명의 검이 산산이 흩어졌다. 마치 적일이 끝까지 검을 뻗지 못하고 그의 검을 노릴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세차게 휘둘러진 적일의 검이 암향매화검이 존재했던 공간을 허무하게 가르고 지났고, 동시에 수천 송이 매화 잎으로 화한 청명의 검기가 적일의 전신을 꿰뚫었다.
카각! 카각!
적일은 뒤늦게 발작처럼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수천으로 화해 춤을 추듯 날아드는 검기를 모조리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몸 곳곳에 붉은 상처가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일이 경악한 건 이 화려한 검술 때문이 아니었다. 청명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악이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대체……?’
청명이 뿜어내는 살기는 지독하다 못해 전신이 저릴 지경이었다.
적일을 비롯한 교도들은 마인이다. 척박한 대지에 유폐된 짐승들이다. 무학을 익히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증오에 익숙하고, 살기에 익숙하고, 악의에 익숙하다. 세상 그 어떤 이들보다 더.
그런데 지금 저 정파 애송이가 뿜어내는 살기는 그런 적일조차 몸을 굳히게 했다.
사람을 피로 빚어낸다고 해도 이런 지독한 살기와 악의를 뿜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거늘, 어찌 이 거짓된 세상에서 평화만 누리며 살아온 정파 놈이 이런 기세를 내뿜는단 말인가.
“이, 이노……!”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그의 몸 단 한 부분조차 남겨 두지 않겠다는 듯 검기가 끝도 없이 밀려와 전신을 난자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고통.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적일의 의식은 끊기지 않았다. 적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저 서늘한 눈 때문이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매화 검기 너머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청명의 차가운 눈이 그의 이성을 아교처럼 붙들어 놓았다.
알 수 있었다. 정말 찰나, 한순간만 정신을 놓아도 저놈의 검은 그의 목을 여지없이 갈라 버릴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선명한 감정이 뿌리를 내렸다. 부정하려 해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 공포였다.
‘주교 앞에서 느낄 만한 공포를 내가 이 중원 놈에게서 느끼고 있다는 건가? 이 내가?’
적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 이어진 교전 동안 달려온 두 명의 집법사자가 도달했다. 적일을 지나친 그들은 곧장 청명에게 달려들며 마기 덧씌운 팔을 휘둘렀다.
“죽어라아아앗!”
적일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멈……!”
멈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청명의 움직임이 배는 더 빨랐다.
쿵!
땅을 내밟은 청명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손을 향해 오히려 돌진했다. 가속한 그의 머리 바로 위를 시커먼 손이 스쳐 지남과 동시에 청명의 몸이 집법사자의 가슴팍 쪽으로 완전히 파고들었다.
쿠우우웅!
청명의 어깨가 인정사정없이 집법사자의 가슴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회전력이 가미된 어깨에 받힌 순간 집법사자의 가슴 한중간이 움푹 파였다. 입에서 폭포수와 같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하지만 청명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받혔던 집법사자의 몸이 튕겨 나가기도 전에 청명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했다. 암향매화검이 날아가는 집법사자를 쾌속히 그었다.
파아아아앗!
가슴이 쩌억 갈라졌다. 근육을 자르다 못해, 뼈까지 드러나 보이도록 심각한 상처였다. 집법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이……!”
교우(敎友)가 순식간에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또 한 명의 집법사자는 두 눈에 혈광을 줄기줄기 내뿜었다. 청명을 향해 양손을 그어 대는 모습이 광기 그 자체였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귀곡성을 발하는 마기가 대기를 가르고 청명에게로 향했다. 엉망진창으로 그어진 수십 줄기의 검은 선은 청명을 금방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도 남을 듯했다.
그 순간 청명이 쏟아지는 마기 한중간에 검을 쑤셔 박았다.
파라라락! 파라라라락!
미약하게 떨리던 청명의 검 끝이 점점 진동을 더해 가더니 이내 커다란 물결이 되어 날아드는 마기를 좌우로 밀어 냈다. 이내 마기의 그물 사이로 커다란 공간이 생겨났다.
‘뭣?’
집법사자가 경악할 틈도 없었다. 청명은 곧장 그 열어 낸 공간으로 날아들었다. 기겁한 집법사자가 잽싸게 몸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그 순간 청명의 손에서 가공할 찌르기가 발출되었다.
파아아앗!
희끗희끗한 무언가를 두 눈이 포착한 순간, 청명의 검은 이미 목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하지만 집법사자 역시 만만한 이는 아니었다. 그 순간 몸을 빠르게 틀며 청명의 찌르기를 피한 것이다.
사각.
청명의 검기는 집법사자의 목 피부를 아주 얇게 저미고 스쳤다. 그 짧은 순간에도 섬뜩해질 만큼 놀라운 예기였다. 집법사자는 전율하며 다시 몸을 뒤로 날리려 했다.
쇄애애액!
하지만 검을 질렀던 청명이 빠르게 팔을 접으며 자신이 찔렀던 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그는 섬전이라는 말도 무색한 속도로 손을 뻗어 집법사자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콰드득!
손가락 끝으로 꿰뚫어 버릴 듯 강하게 머리를 잡아챈 청명은 집법사자를 그대로 끌어당겼다.
집법사자의 두 눈에 청명의 잔혹한 웃음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자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를 이해한 집법사자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피어났다.
“아, 안…….”
콰각!
청명 쪽으로 당겨진 집법사자의 목에 조금 전 그가 피해 냈던 검날이 닿았다. 청명은 그대로 몸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사아아아아아아악!
실로 경쾌하고도 섬뜩한 소리가 퍼졌다.
텅!
땅에 처박히듯 쓰러진 집법사자의 목에선 피가 주룩주룩 뿜어져 나왔다.
적일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목이 잘린 집법사자의 몸에서 뿜어진 피가 그의 옷자락을 뜨겁게 적셔 대고 있었다.
이윽고 홀린 듯 고개를 들자 또렷하게 보였다.
잘라 낸 머리를 좌수에 든 채 검을 늘어뜨린 청명의 모습이.
툭.
청명은 쥐고 있던 머리를 적일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벌써 그런 얼굴이면 곤란해.”
“…….”
“이제 시작이니까.”
그의 눈에 실린 광기는 마교도보다도 더 지독했다. 적일을 향해 다시 달려드는 청명은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