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화. 나도 미친놈이었군. (2)
대풍루(大風樓).
분명 휘황찬란하단 말이 어울리도록 화려했을 항주 중심가의 이 주루는 이제 반쯤 부서져 흉물스러운 뼈대를 내보이고 있었다.
불과 한 주 전만 해도 기녀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 허세를 떨어 대는 취객의 목소리로 부산스러웠지만, 지금은 을씨년스러운 적막만이 가득하다.
용케도 아직 무너지지 않는 주루의 가장 높은 층, 그곳의 창가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쪼르르륵.
붉은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투명한 액체가 잔으로 쏟아졌다. 주향이 향긋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탁.
병을 내려놓은 단자강은 새하얀 잔을 가득 채운 술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술이 느긋하게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은은하게 감도는 주향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단자강은 가만 술잔을 내려놓았다.
“후…….”
이내 한숨이 흘러나온다. 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 그 반대다.
주향이 코끝은 물론이고 전신을 물들이는 느낌이다. 이 술을 마셔 본 이라면, 술이란 단순히 마시고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본연의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 이 술을 마셔 본 이라면 말이다.
“……우리에겐…….”
단자강이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반쯤 기운 달이 보인다.
“그럴 기회가 없었지.”
그 사실이 단자강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진정 그의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교도들이 이런 술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이런 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이는 거의 없다. 아쉬움이란 있던 것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절실히 밀려오곤 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교도들은 서글퍼할 자유조차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이 순간에도 교의 숱한 교도들은 술이라 부르기도 저급한 싸구려 화주만을 유일한 술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 저급한 술 한 병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이 이곳에서 이 술을 맛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저 벽면과 창고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수많은 고급주의 향연을 보면 대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하하…….”
그들이 즐기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누려 온 중원의 불신자들을 더 처절하게 증오할지도 모른다.
“하하하핫.”
어쩌면 그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교의 지도부를 원망할지도 모르지.
“하하……. 하하핫…….”
그리고 어쩌면…….
잠깐 멈칫한 단자강이 고개를 느리게 내저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불경한 생각이 파고들었다.
무심한 손길이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몇 번 같은 행위를 반복한 단자강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도시는 사람과 불빛으로 눈 부실 만큼 빛이 났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어둠과 삭막함뿐이다.
마치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처럼 말이다.
이제야……. 그래, 이제야 이곳을 살던 이들과 교도들이 평등해진 것이다. 하지만…….
비참한 처지를 공유하는 것이 평등이라면, 그건 교도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는가?
더 많은 이들이 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안도감? 아니면 저 높은 삶을 누리는 이들을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들인다는 질 낮은 쾌감?
“하하핫.”
그저 우습다.
아마 세상은 곧 모두 이곳과 같아지리라. 휘황찬란한 불빛은 사라지고, 기름진 옥토는 피로 물들고, 사람들의 웃음이 흘러넘치던 거리에는 죽음과 적막만이 들어차리라.
그리고 남는 것은 그저…….
“천마재림 만마앙복…….”
단자강이 눈을 감았다.
그래. 남는 것은 교도가 아니라 그저 그 가르침뿐이다. 천마가 돌아오고, 세상의 모든 마가 그에게 복종한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들의 진언이자,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이 지켜 나가야 할 유일한 진리.
하지만 단자강은 묻고 싶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던지지 않고서 견딜 수가 없는 서글픈 의문이 그를 자꾸만 아프게 찔러 왔다.
“천마시여…….”
그의 신심은 흐려졌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 모든 모순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도 천마에 대한 그의 신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질문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비천한 자가 감히 천마께 묻나이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이 더러운 세상은 천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영광된 마도천하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그를 위한 성전(盛典). 또한, 그를 위한 성전(聖戰)이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는?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돌아올 천마를 맞이하여, 이 세상을 정화하고 마도천하를 열고 나면 교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도 그 뒤의 일을 말해 주지 않는다. 누구도 그다음 세상을 논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천마께서 내린 첫 번째 명조차 완수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그 뒤의 일을 생각할 자격이 없으니까.
단자강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두 눈에 허무가 깃들었다.
“……무엇이 있습니까, 천마시여. 무엇이…….”
우린 무엇을 위해 이 긴 시간을 감내한 것입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게 오직 천마 하나만을 위한 영광됨이라 하여도 우리는 그 길을 기꺼이 웃으며 걸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당신의 자비는 조금도 우리에게 향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하…….”
우습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습기만 하다.
탁탁탁탁.
그때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조금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자강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방문객을 맞았다.
“주교시여.”
계단을 올라온 적일(赤一)이 단자강을 배알하자마자 그 자리에 부복했다.
“외곽에 불신자들의 군세가 침입하여 교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보고하던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 수는 물경 오백 이상입니다.”
단자강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더러운 불신자들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떨었을 텐데 말이다.
“오백이라…….”
그는 오히려 느슨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노리는 것은 내 목인가.”
“더없이 불경한 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군.”
단자강의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아무리 항주 외곽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이들이 접근했는데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 그의 정신이 그만큼 산만하다는 뜻이리라.
“내 목이라…….”
달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지독한 허무가 안개처럼 끼어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 소식을 듣자마자 뛰쳐나가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찌하는 게 좋겠느냐?”
그 물음에 적일이 바로 입을 열었다.
“현재 놈들은 외곽을 순찰하던 일반 교도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구의 신심 높은 마군(魔軍)들이 지금 놈들을 단죄하러 이동 중이니 굳이 주교께서 직접 나서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단자강이 다시 술병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잔에 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르륵.
붉은 기운 도는 술이 가득 차올랐다.
그 느긋한 손길에 적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교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 보고를 마쳤음에도 단자강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감히.”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자강에게서 뿜어져 나온 흉흉한 기세가 공기는 물론이고, 이 주루마저 뒤흔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그 기세에 일순 숨이 콱 막힌 적일은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주, 주교시여. 노기를 거두어 주십…….”
“적일.”
“예! 주교시여.”
단자강의 입에서 살기 어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감히 천마께 대항하려는 자들이다. 그 살을 씹고, 뼈를 갈아 저들의 죄를 물어라. 불신의 대가를 무엇으로 치러야 하는지, 이 삿된 세상이 똑똑히 알게 하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쿵!
적일이 바닥에 제 머리를 짓찧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바람처럼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의 기척이 멀어지자 단자강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아미타불!”
웅혼한 불호가 울리고, 황금빛 불광이 전방에 퍼졌다.
쿠우우우웅!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달려들던 마교도들은 권력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등이 땅에 닿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더니 괴성을 내지르며 또다시 달려들었다.
“큭!”
혜연의 입에서 처음으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계속 달려!”
하지만 멈춰 서서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청명의 목소리가 연신 그들을 재촉했으니까.
청명과 그가 이끌고 온 화산의 정예.
장일소와 그를 뒤따르는 홍견.
처음 청명과 장일소가 전장을 흑귀보에 맡기고 항주로 진입한다고 했을 때는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 의미를 이해했다.
‘빌어먹을!’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달려드는 마교도들은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항주 외곽에서 상대했던 건 극히 일부, 그것도 단순한 정찰병에 불과했던 것이다.
안으로 진입할수록 더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마교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들이 뿜어내는 마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파앗!
땅을 힘껏 박차고 나간 백천은 선두에서 달려드는 마교도들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전개했다.
솟구친 붉은 검기가 수십의 잔영을 만들며 흩어지더니, 이내 마교도들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카아아아아악!”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마교도들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길게 자라난 손톱을 악착같이 휘둘러 왔다.
“으아앗!”
백천의 뒤를 받치던 조걸이 황급히 뛰어들어 그 공격을 막아 내려던 찰나.
파아아앙!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금빛 유성 같은 것이 백천의 전방에 있던 마교도들의 머리를 순식간에 부숴 버렸다.
“조심해야지, 아가야.”
다정한 목소리가 진득하게 울렸다. 백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장일소!”
“흥분은 좋지 않으니 미리부터 힘 빼지 말렴. 너희는 아직 해 줘야 할 게 많으니까.”
“큭!”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저 장일소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더없이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
파아아앗!
날아든 청명의 검이 장일소에게 달려들던 마교도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 냈다.
“여유 부리지 마, 멍청한 놈아!”
“……친절하시기도 하지.”
장일소가 삐딱하게 웃었다. 이 와중에도 청명의 두 눈은 사방을 빠르게 훑었다.
‘어디지?’
그의 감각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교의 행동 방식 같은 건 예상할 수가 없다. 하나하나가 너무도 다르니까. 그러니 이 넓은 항주에서 놈이 있을 만한 곳을 짐작해 찾아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 숨 막히는 마기 속에서 가장 짙은 마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과거보다 몇 배는 더 민감해진 그의 감각이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잠시 후 청명의 고개가 위쪽으로 획 들렸다.
드높이 솟아 있던 전각들이 모조리 무너진 항주. 지평선이 드러나도록 평평해진 그 땅에서 유일하게 삐죽이 솟은 누각 하나!
“이거…….”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친절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지?”
청명의 두 눈에서 흉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