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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45화 (1,046/1,567)

1045화. 죽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5)

질긴 고무가 검을 움켜잡는 듯한 느낌. 그 감각을 뚫어 내고 나서야 느껴지는 둔탁한 뼈의 감촉. 뜨겁다 못해 화상을 입힐 듯 열기를 뿜어내는 피. 그리고 목이 잘려 나가며 흘러나오는, 공기 새는 소리가 섞인 단말마.

그 모든 것이 기억 속의 감각을 끄집어냈다.

‘아직이야.’

콰득!

청명의 검이 마교도의 목을 순식간에 반쯤 으스러뜨렸다.

‘아직!’

청명은 검을 더 빠르게 휘둘러 반쯤 베인 목을 다시 베었다.

카가가각!

‘아니야!’

이를 질끈 깨문 채 몸을 회전시킨다. 검 끝이 환상과도 같은 원을 그려 냈다.

서―걱!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없다. 완벽하게 휘둘러진 검이 마교도의 목과 들어 올린 팔을 동시에 완전히 베어 냈다. 감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충족감이 손끝에 머물렀다.

청명은 반사적으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손끝에 머무른 감각을 즐기는 듯,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손끝에 그 감각이 머물렀다는 사실 자체를 경멸하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문 그의 두 눈에 핏발이 돋아 올랐다.

쿠웅!

진각을 밟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더 강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단전 깊숙한 곳에서 내력이 폭포처럼 솟구쳤다.

공들여 정제하고 또 정제한, 천하에서 가장 순수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달아 그의 몸을 타고 검으로 밀려 들어갔다.

과거 매화검존이던 시절에 그를 채웠던 막대한 내력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것없는 내력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양은 부족해도 내력의 질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위이이이이잉!

내력이 검을 타고 맹렬하게 회전한다. 섬전처럼 뻗어진 검이 마기를 두른 팔과 맞부딪혔다.

쩌억!

벤다는 감각조차 없다.

청명의 기운이 마기를 분쇄한다. 마기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팔 따위는 썩은 나무토막만도 못하다. 청명의 검이 스치고 지나가자 마교도의 팔이 쩌억 갈라지며 끈적한 피를 흩뿌렸다.

서걱!

하지만 청명은 마교도가 채 놀랄 틈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다시 검을 휘둘러 마교도의 목을 일격에 쳐 날렸다.

촤아아악!

잘린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청명의 얼굴을 뒤덮었다. 쏟아지는 피비린내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청명의 두 눈만은 얼음장처럼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죽여 버려!”

“모조리 쓸어 내라! 저 개 같은 광신도 놈들!”

겁을 집어먹어 몸이 굳었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기세를 있는 대로 끌어 올리며 청명을 따라 돌진했다.

그들은 사파. 정파보다 더욱 힘을 숭상하고 강자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이들이다.

지금 그들의 앞에 믿고 따를 강자가 나타났다.

정파인가 사파인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저 마교의 무리 앞에 정사의 구분은 무의미하니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지옥 같았던 상황을 반전시켜 줄 절대 강자가 앞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계산과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들은 본능으로 승기를 파악하곤 한다. 그런 그들이 청명의 등에서 빛나는 승기를 발견했다.

“몰아붙여!”

“오오오오오오오오!”

냉철한 흑귀보의 정예들이 목이 터져라 기합을 내지르며 하나의 파도가 되어 마교도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 저주받을 놈들이……!”

마교도들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까뒤집었다.

감히 저 더러운 불신자들이 교도에게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높은 신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교에 대한 저항은 저 위대하신 분에 대한 저항과도 같다.

저항하는 이는 말살하고 그 영혼마저 불태운다.

그것이 가장 우선되는 교리가 아니던가?

“저 더러운 불신자들을 모조리 쳐 죽여라!”

마교도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흑귀보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카강!

병장기가 부러져 허공에 솟구치고 사람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여전히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지만 분명 이전과는 달랐다. 공포에 젖어 일방적으로 밀리던 흑귀보가 이젠 밀리더라도 악착같이 달라붙고 있었다.

“목! 목이다! 목을 노려!”

“머리를 부숴 버리면 된다! 머리!”

흑귀보 정예들은 집요하게 마교도의 머리를 노렸다.

광신에 몸을 내맡기고 가열하게 흑귀보를 몰아붙이던 마교도들도 제 머리로 날아드는 공격만은 좌시할 수 없는지 처음으로 날아드는 검을 막아 내고 피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리멸렬했던 분위기가 바뀌는 데는.

“이 개 같은 마교 놈들!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흑귀보가 악을 써 대며 마교도들을 공격했다.

“크카하하핫!”

마교도들이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눈앞에 있는 이를 후려쳤다. 날아든 칼이 상완에 박혔지만, 마교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길게 자라난 마기의 손톱으로 얼굴을 흑귀보 정예의 얼굴을 노렸다.

흑귀보의 정예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는 그 순간.

쇄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백색 검이 마교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저열한 쾌감에 젖은 표정 그대로, 마교도의 머리는 허공을 몇 바퀴 돌다 땅에 툭 떨어졌다.

“어…….”

겨우 목숨을 구한 흑귀보 정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을 살폈다. 허물어지는 마교도의 몸뚱이 너머를.

검을 빙글 돌려 회수한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방심하지 마, 머저리 놈아.”

“……예? 아……. 예!”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두 눈을 부릅뜬 흑귀보가 그 뒤를 맹렬하게 뒤따랐다.

“흐음…….”

장일소가 흥미롭다는 듯 제 턱을 매만졌다.

그의 두 눈엔 묘한 즐거움과 묘한 불쾌감이 동시에 스멀스멀 피어났다. 거기에 경계심까지 뒤섞이니 눈빛이 요사스레 빛났다.

“확실히 재미있다니까.”

아무리 사파가 강자를 따른다지만, 그렇다 해서 강자에게 무작정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흑귀보는 보주에 대한 충성심이 확실하게 자리한 곳. 더 강한 존재가 있다고 해도 쉽사리 제 마음을 바꿀 리 없다.

하지만 지금 저 흑귀보 정예들은 명백하게 화산검협을 뒤따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장악력이로군.’

장일소를 더 어이없게 하는 것은, 이곳에 만금대부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팔이 잘렸다고는 하지만, 만금대부는 만금대부. 제 상관이 뻔히 존재하는 곳에서 정파 놈이 하는 말을 의심 없이 뒤따른다?

‘감당이 안 되는군.’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아무리 봐도 화산검협 저놈은 있을 곳을 잘못 찾았다. 정파가 아니라 사파에 둥지를 틀었더라면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장일소에게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겠지.

“하지만 음……. 이래서야 내 체면이 영 말이 아니네.”

장일소가 흥얼거리듯 말하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를 발견한 마교도 하나가 두 눈에서 붉은 광망을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순간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쇄애애애액!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마수(魔手). 장일소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 얼굴을 노려 오는 마수를 가볍게 옆으로 밀어 냈다.

투웅!

“카학!”

발작처럼 연이어 휘두르는 다른 마수마저 가뿐히 튕겨 낸 장일소의 손이 별안간 마교도의 목을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콰득!

마치 잘 단장한 여인의 것 같은 장일소의 손끝이 마교도의 목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커헉!”

마교도의 입이 쩍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의가 꺾이지 않은 모양으로, 마교도는 발악하며 손을 휘둘렀다.

“흐음…….”

마치 어린애의 장난을 받아 주듯 툭 그 손을 쳐낸 장일소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목을 공격하는 정도로는 적당하지 않군……. 목젖을 찢어도 멀쩡하다면, 흐음…….”

콰득! 콰드드득!

마교도의 목에 박혀든 장일소의 손이 살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끄으……. 끄으아악…….”

고통을 모르는 것 같던 마교도도 이 끔찍한 격통에는 견딜 수 없었는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사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른 것이겠으나, 이미 기도(氣道)가 반쯤 뚫려 마음껏 비명을 내지를 수 없을 터였다.

“이거겠지.”

우둑!

목뼈에 닿은 장일소의 손이 사정없이 마교도의 목뼈를 부수고 으스러뜨렸다. 마교도는 학질에라도 걸린 듯 벌벌 떨다 이내 혀를 빼물고 고개를 꺾으며 죽어 갔다.

“흐음.”

장일소가 마교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오물을 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시신을 툭 내던지고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

“머리, 아니면 경추로군. 까다로워. 게다가…….”

장일소의 흰 낯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본디 그가 손톱을 가져다 댄 순간 목이 잘렸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저 목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굳이 저 목을 파고들어 헤집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내 내력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만금대부가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이해되었다. 이런 조무래기조차 그의 내력에 저항한다면, 그 주교라는 놈이 어떤 조화를 부려 댈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거 꽤…….”

장일소의 시선이 날뛰고 있는 청명의 등으로 향했다. 마침 단숨에 마교도의 목을 쳐서 날리는 청명을 보며, 장일소가 삐딱하게 웃었다.

“불공평하잖니.”

아무래도 저놈들 데리고 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쯧.”

하지만 그는 이내 청명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앞에서 끌고 나가는 건 좋지만, 저래서야 힘만 빼지 않는가?

아무래도 저 화산검협은 자신이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원래 저런 인간이든가.

‘물론 후자겠지.’

저놈이 멍청하길 바라느니, 폭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를 테니까.

“취향은 존중하지만, 지금 너는 내 말이니 너무 제멋대로 날뛰는 건 곤란하단다.”

장일소가 비릿하게 웃고는 슬쩍 뒤를 돌아본다.

“다들 들었겠지?”

대답 대신 나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홍견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결코 멋모르고 날뛰는 미친개가 아니다. 오히려 더없이 절제된 방식으로 장일소의 적을 공격하고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 사냥개였다.

“노려야 할 것은 경추, 아니면 머리란다. 거길 부수면 평범한 사람과 그리 다를 것도 없어.”

청명이 있는 쪽을 응시하는 장일소의 눈빛이 스산했다.

“구경만 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손님만 싸우게 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이래 봬도 나는 제법 군자에 가까우니까. 그러니…….”

장일소가 앞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가서 물어.”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일소의 뒤를 지키던 홍견이 붉은 빛살이 되어 돌진했다.

백홍포를 휘날리며 앞으로 달리는 홍견을 보며 장일소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궁금하군.”

그의 두 눈에 요사스런 빛이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이놈들도 이 정도인데, 대체…… 그 주교라는 놈은 어떤 괴물일지 말이야.”

그의 두 눈이 전장을 넘어 반쯤 무너진 항주로 향했다. 저 도시의 깊은 곳에서 더없이 음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오싹하다니까.”

까라라락.

반지들이 서로 거칠게 마찰했다.

손끝으로 제 입술을 천천히 쓸어 본 장일소가 이윽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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