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4화. 죽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4)
콰드드득!
거무튀튀한 손이 등을 뚫고 나왔다. 피에 젖은 손이 아직 펄떡이는 심장을 움켜잡고 있었다.
“끄륵…….”
죽어 가는 이와 그 죽음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인식하고 공포의 질린 그 얼굴을, 나머지 하나가 매몰차게 비웃었다.
쾅!
이내 축 늘어져서 시신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을 걷어차 날려 버린 마교도는 손에 들린 심장을 쥐어 터뜨렸다.
“흐하하하하하핫! 이 더러운 불신자 놈들!”
공포란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혼자일 때보다 여럿일 때 좀 더 큰 용기를 낸다. 컴컴한 밤길을 홀로 걷는 것과 여럿이 걷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번 공포가 전염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혼자일 때보다 오히려 더 커다란 공포가 밀려오기 마련이다. 선두에서 시작된 공포가 흑귀보 전체로 퍼져 나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부족한 것은 무위가 아니라 마음가짐이었다.
백 년 전의 참상에서 이어진 독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마교와, 시간과 세월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 이들의 차이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천마재림 만마앙복.”
주문처럼 중얼대는 진언이 귀를 파고든다.
누군가가 죽어 가며 질러 대는 비명과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거기에 쉼 없이 쏟아지는 저주와 살을 저밀 듯 쏟아지는 살기까지.
누가 과연 그 앞에서 시종일관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흐으…… 으으…….”
“아, 안 돼. 이건…….”
무너진다.
긴 시간 쌓아 올렸던 무위도, 완벽하게 절제해 내던 이성도, 흑귀보라는 이름이 주는 자부심도, 모두 순식간에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은 그저 공포에 질린, 살고 싶은 인간들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겨우 소수의 돌발 행동에 불과했지만,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떠올리지 못하던 이들의 머릿속에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져 버린 것이다.
유혹에 이기지 못한 이들은 적 앞에서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그 이겨 내고 있는 이들조차 칼끝이 무뎌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굶주린 늑대들은 상대의 나약함을 인식하자 더욱 가열하게 눈앞의 양 떼를 몰아붙였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씹어 삼키기 위해서.
공포와 절망이 피로 젖은 대지에 내려앉았다.
“아, 안…….”
제 앞의 동료가 오체분시가 되는 꼴을 직면한 흑귀보 정예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싸워야 한다는 걸 알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마치 전신이 옭매이기라도 한 듯 움직이질 않았다.
“어…… 어으…….”
두 눈에서 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마교도가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려쳐 왔다.
‘죽…….’
그 순간.
파아아아아앙!
거센 파공음과 함께, 달려들던 마교도의 머리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다가올 죽음 앞에 체념하려던 흑귀보의 정예는 허공에 솟은 마교도의 머리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피를 뿌려 대는 머리, 얼핏 보이는 그 얼굴에는 여전히 저열한 쾌감이 가득했다.
아마 저 마교도는 죽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목숨을 건진 그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듯 말이다.
툭!
허공을 날았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 간 전장에서 벌어진, 겨우 하나의 죽음일 뿐이다.
작고 사소한 것.
하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
겨우 목숨을 건진 흑귀보 정예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간다. 그의 눈높이보다 조금 아래에, 조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검은 무복.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한 손에 들린, 흰빛을 띤 장검.
“화산…….”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그 신음과 같은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앞에 선 이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파앗!
땅을 박차고 나간 그가 검을 섬전처럼 휘둘렀다.
“카핫!”
또 다른 마교도가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날아드는 검을 막아 내고 단번에 목줄을 뜯어 버리겠다는 심산의 움직임.
하지만 팔과 검이 맞부딪치기 직전에 검이 빙글 회전하여 마교도의 팔을 흘려냈다. 그리고 이내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발톱처럼 목에 틀어박혔다.
패애애애애앵!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던 마교도의 몸뚱이가 저항조차 못 하고 잘려 나갔다.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남은 몸은 그 자리에 허물어진다.
전장이 얼어붙었다.
삽시간에 마교도 둘의 머리를 날려 버린 청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알려 주지, 애송이들아.”
청명이 다시 천천히 검을 들었다.
“마교를 상대할 때는…….”
파아아앗!
그의 검이 화려한 검기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붉은 검기는 환상처럼 일제히 흩날리며 마교도들을 뒤덮었다.
“큭!”
“이, 이게…….”
전면을 뒤덮는 꽃잎의 폭풍에, 마교도들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했다. 그들이 아무리 목숨을 내던지며 적에게 달려든다 해도 시야를 온통 가리며 날아드는 검기에 무턱대고 돌진할 순 없을 터.
“카아아아아앗!”
그들은 물러나며 양팔을 내저었다. 날아드는 매화검기를 쳐 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마기가 실린 손이 꽃잎에 닿는 순간, 애초에 그 모든 검기는 정말로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뭐?’
그리고.
콰득! 콰드득! 콰득!
그 찰나를 틈타 날아든 검기가 마교도들의 목을 빠르게 꿰뚫었다.
“커헉!”
시선을 내려도 목을 볼 순 없었다. 마교도가 볼 수 있었던 건, 목에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뿐이었다.
털썩! 털썩!
목이 꿰뚫린 마교도가, 그리고 이마에 선명한 매화문양의 검인(劍印)을 새긴 마교도가……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내렸다.
극도의 환검(幻劍). 실체와 환상의 경계가 극도로 좁은 검술이다.
상대를 속이고 농락하는 검술이기에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비하당하고, 사파에 가깝다고 평가절하당해 왔던 화산의 검술은 힘으로 적을 찍어누르는 마교도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맹독과 같았다.
“목을 노려.”
청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분명 광기 어린 마교도의 것과는 다르지만, 또 어떤 면에선 닮은 섬뜩한 미소였다.
“아니면 머리를 부숴 버리든가.”
저벅.
청명이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지독한 살기와 분노, 기이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열기가 그의 두 눈에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무언가가 마교도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콰앙!
이윽고 커다란 폭음과 함께 마교도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뭣?’
날아들었던 금색의 물체는 빠르게 회전하여 날아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착!
가볍게 손을 뻗어 팔찌를 받아 든 장일소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와 목이라……. 그런 정보가 있으면 진즉에 말씀해 주셨어야지. 하여튼 성격이 나쁘다니까.”
청명은 장일소의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절망으로 완전히 컴컴하던 흑귀보 정예들의 눈이 다시 제 빛을 되찾아 갔다.
머리와 목.
물론 노리기 쉬운 부위는 아니다. 어떤 이라 해도 머리와 목만은 철저하게 보호하니까. 하지만 상대를 쓰러뜨릴 방법이 없는 것과, 어려워도 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이…….”
그러나 마교도들의 입장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같은 교도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본 탓에, 그들의 얼굴에 더 지독한 증오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그들의 눈빛을 보며 청명이 웃었다.
“그래. 나는 그 눈빛이 좋아.”
“…….”
“그 눈빛이…….”
청명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공포로 물들 때가 제일 즐겁거든.”
콰앙!
기괴할 만큼 환하게 웃으며 청명이 앞으로 쇄도했다. 검이 강렬한 붉은 검기를 머금었다.
한때 저들의 목을 베어 내며 완성된 검이 지금 다시 저들의 목을 노리고 있다.
“죽여라아아아아앗!”
마교도들 역시 발작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역시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누구인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천마재림! 만마…….”
“닥쳐!”
청명은 날아드는 팔을 일격에 베어 날리고는 진언을 외쳐 대는 마교도의 입에 검을 쑤셔 넣었다.
그 일격으로 단번에 경추가 끊어진 마교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입 안에서 빙글 회전한 검이 쳐올려지며 마교도의 머리를 두 쪽으로 갈랐다.
파앗!
검이 채 뽑혀 나오기도 전에 청명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단 한 걸음으로 일 장 가까이 전진한 그는 당황한 마교도들 사이로 파고들어 땅을 강하게 내밟았다.
전진과 진각에서 얻은 힘을 남김없이 전환하여 검에 실은 청명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들어 마교도의 허리에 휘둘렀다.
콰가가각! 콰가가각!
자른다기보다는 끊는다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질긴 고무 같은 마교도의 육체가 밀고 들어오는 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끊겨 나갔다.
파아아아아앙!
이윽고 허리가 통째로 잘린 마교도의 상체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허물어지는 하체를 걷어차서 치운 청명은 그 자리에서 몸을 회전하며 사방으로 매화검기를 흩뿌렸다.
하늘을 가린 어둠. 짙게 물든 대지.
온통 검은 무복으로 전신을 감싼 이들.
그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가지를 뻗었다. 마치 흘러내린 피를 양분 삼아 자라기라도 한 듯 더없이 붉은빛으로.
사라라락!
흩뿌려진 매화잎들은 돌풍이라도 맞은 듯 맹렬히 회전하며 마교도들을 휩쓸었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실로 연약해 보이는 꽃잎이지만, 그 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단단한 검기와 도기들을 숱하게 막아 내고 무력화했던 마교도들의 몸뚱이를 너무도 수월하게 꿰뚫고 들어간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마교도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몸은 결코 쉽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신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리고도 쉬이 죽을 수 없었다. 그건 다시 말해 그 모든 상처가 주는 고통을 지독할 만큼 생생하게 모조리 느껴야 한다는 의미다.
검기가 살을 헤집고, 힘줄을 끊어 내고, 뼈를 갈아 댄다. 생생한 고통이 마교도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마침내 희게 질리도록 했다.
청명의 주위를 둘러싼 마교도들의 몸에선 연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피가 청명이 만들어 낸 매화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쏟아지는 혈우(血雨).
그 속에서 청명은 유일하게 피에 젖지 않은 하얀 이를 드러냈다.
뜨끈한 피비린내가 숨 막힐 정도로 코를 찔렀다. 그 냄새가 청명을 다시금 적응하게 했다. 낯설던 감각도 급속도로 되돌아와 검을 잡은 그의 손끝에 머물렀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이 감각만은 여전히 그의 손끝에 남아 있다.
“……나를 잊지 말았어야지.”
고개를 든 청명이 악귀처럼 웃어 댔다.
“안 그래?”
청명이 기괴한 웃음을 머금으며 땅을 박찬다.
사냥당하는 이와 사냥하는 자.
그 입장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