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2화. 죽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2)
시체로 뒤덮인 대지를 달려서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은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을 검은 무복으로 완전히 감싸고, 음울한 기운을 뿌리며 달려오는 그 모습을 평범한 무인이 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단순한 무인들이 아니다.
화산의 제자, 만인방의 홍견, 흑귀보의 정예. 적어도 전투에 대한 경험만으로는 천하의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만했다.
전투와 살인에 능숙하며, 제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칼이 날아드는 것에 익숙한 이들. 그 어떤 적을 맞상대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잃지 않는, 단련된 명검과도 같은 이들.
그러니 이런 광경에도 분명 흔들리지 않아야 하건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전투에 익숙한 모두가 보인 반응은 분명 ‘동요’였다.
강남의 밤을 공포로 물들였던 흑귀보의 정예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장일소의 명령이라면 지옥의 불구덩이조차 마다하지 않고 뛰어든다는 홍견조차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의 얼굴에 명백한 껄끄러움과 은은한 두려움이 서렸다.
천하를 절반을 제 손에 틀어쥔 사패련,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 그런 이들이 고작 일백에 불과한 적을 상대로 움츠러든다?
사패련을 천하에서 가장 증오하는 이라고 해도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으…….”
누군가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 목에 칼이 박히는 순간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을 이들이 그저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어지는 입을 막지 못한다. 단련의 수준과는 무관한,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마교를 상대해 본 적 있는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질린 얼굴로 제 검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숙…….”
“……그래.”
뒷말을 듣지 않고도 백천은 대답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르다.”
흡사 진득한 늪에 빠져 온몸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저들이 흘리는 기세가, 저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리고 저들의 존재 자체가 숨통을 점차 옥죄는 것만 같았다.
예전과는 명백히 달랐다.
그 혹한의 땅, 북해에서 마주한 마교도 역시 백천을 두려움에 빠트렸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감각은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백천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았던가.
저들이 주는 느낌은…… 사람 같지 않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마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는 광경을 눈앞에서 본다면 기분이 이럴까?
비단 기세나 무위의 고강함 여부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저들의 존재 자체가 살아 있는 이들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이게 진짜 마교구나.’
백천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생각했다.
어째서 청명이 북해의 주교를 두고 반편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는지, 어째서 그 북해의 주교를 따르는 잔혹한 마교도들을 두고 어설프다고 힐난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말하고 있다. 저들은 그가 알던 마교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다고.
콰득! 콰드득!
달려오는 마교도들이 바닥에 흩어진 시체를 밟을 때마다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몸을 떨었다. 그 섬뜩한 소음에 담긴 숱한 의미가 그들의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다가온다기보단 덮쳐 오는 모양새로 검붉은 대지를 거칠게 질주하던 검은 무리가 이내 시커먼 마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화산의 제자들을 비롯한 모두가 이를 악무는 순간, 달려오던 마교도들의 속도가 난데없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두의 두 눈에 의문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달려오던 이들이 어째서 저기에 멈춰 선다는 말인가?
대부분은 그 광경에서 의혹을 느꼈다.
하지만 이곳의 몇몇은 그 광경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흥미롭다는 듯 마교를 바라보는 장일소의 손에서 반지가 마찰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지금 그가 이끌고 온 이들은 홍견. 만인방에서도 고르고 고른 이들을 철저하게 단련시켜 만든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 홍견조차도 저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기괴하군.’
장일소가 보기에 저건 상식에서 벗어난 광경이었다.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대호들이 먹이를 앞에 두고 정렬해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살의에 먹혀 버린 이들은 통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살의라는 것은 이성 바깥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어이없게도 저들은 끔찍한 살의와 증오를 뿜어내면서도 완벽할 정도로 통제에 따르고 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광신이라…….’
그 두 글자에 담긴 모든 것이 저들에게 녹아 있는 것만 같다.
검은 무복 차림에 눈 바로 아래까지 검은 복면으로 가린 마교도들의 수는 겨우 일백. 하지만 그 백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저벅. 저벅.
딱히 구분이 없어 보이는 마교도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중앙으로 나선 이는 굳은 얼굴로 경계하는 화산과 사패련을 좌에서 우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제 얼굴을 가린 복면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더러운 불신자 놈들…….”
그의 눈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 짙은 혐오와 경멸이 어려 있었다. 섬뜩한 그 눈빛에 눌린 이들은 입술을 슬쩍 짓깨물었다.
“천마께서는 너희 같은 불신자들에게 살아 숨 쉴 자격을 주지 않으셨다.”
사내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또한 그분께서는 더없이 자비로우신 분.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이들에게조차 그 자비는 공평하리니.”
그 목소리는 성스러운 진언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 경건했다.
“지금이라도 죄를 깨닫고 천마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된 이는 앞으로 나서라. 그분께서 너희의 죄를 사하실 것이다.”
“흐으음?”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당연히 장일소였다. 그의 눈살이 영 불쾌한 듯 잔뜩 찌푸려졌다.
“죄를 사해?”
“…….”
“누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까라라락?
장일소의 반지들이 거친 금속음을 토했다.
“누가 감히 내 죄를 사한다는 거지? 네까짓 게? 아니면…….”
잠시 말을 멈춘 장일소의 붉은 입술에 고혹적인 미소가 어렸다.
“너희가 믿는 그 천마인지 뭔지 하는, 백 년 전에 뒈져 버린 놈이?”
“이…… 이!”
조금 전까지 차분하게 말하던 마교도의 눈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살기가 들어찼다.
“입을 찢고, 그 살을 갈라 개 먹이로 주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감히 그 더러운 주둥아리로 그분을 망령되이 일컫다니!”
하지만 장일소는 그 어마어마한 살기를 직면하고도 태연자약했다.
“아아. 물론 내 입이 뭐 그리 깨끗하지는 않지. 그건 나도 안단다.”
태연히 손을 내저은 그는 이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살아 있지. 그렇지 않니? 더럽게 살아남은 자가 깨끗하게 뒈진 놈보다는 낫단다. 너희가 모시는 천마라는 놈도 아마 지옥에서 나를 부러워할걸?”
“노오오오오옴!”
마교도는 이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까지 벌벌 떨어 댔다.
“감히…….”
그는 아래로 끌어 내렸던 복면으로 다시 얼굴을 뒤덮었다. 마치 이곳에 있는 이들과 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이.
“이 더러운 불신자 놈들,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교의 앞에 얼굴을 들이민 거로도 모자라 위대하신 그분을 모욕해?”
마교도의 눈은 점점 광기로 번들거렸다.
사파의 숱한 광인과 악인을 겪어 온 홍견도 이 눈빛 앞에선 섬뜩함을 느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하기 어려울 만큼 괴이하고 이질적인 광기 때문이었다.
“……죽이리라!”
마교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죽이리라! 죽이리라! 더러운 불신자들의 흔적을 이 세상에서 지워 내리라. 그 살을 찢고, 그 뼈를 갈고, 그 힘줄을 뽑아내고, 그 피를 뿌리리라!”
각오를 다지는 것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웠고, 저주라기보단 차라리 기도문에 가까웠다.
마치 피라도 토할 듯한 그 외침이 끝나자, 뒤에 도열해 있던 마교의 군세가 자욱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내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해 주리라! 감히 천마를 모욕한 저 더러운 불신자 놈들에게 교의 분노가 얼마나…….”
하지만 이내 차디찬 목소리가 그 기도문 같은 것을 끊어 냈다.
“거, 새끼 진짜 더럽게 말 많네.”
마교도가 느리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이를 노려보았다. 살기가 일렁거렸다.
청명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좌우로 꺾어 대며 다시 말했다.
“사파 새끼 말에 동조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슬쩍 장일소를 돌아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목 잘려 뒈진 새끼보다야 화장한 미친놈이 낫지?”
“너…….”
“그러니까.”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암매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한없이 날카로운 검끝이 마교도를 향해 겨누어졌다.
“적당히 지껄이고 덤벼. 언제부터 마교 새끼들이 주둥아리로 싸워 댔는지 모르겠군.”
마교도는 말없이 청명을 노려보았다.
짧은 침묵.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은 광기에 차 저주를 퍼부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섬뜩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다스려 낸 마교도가 마침내 입을 뗐다. 스산한 목소리가 퍼졌다.
“너는…… 이 중에서도 특히 고통스레 죽게 될 거다.”
“아아, 그거…….”
청명이 삐딱하게 피식 웃었다.
“꽤 자주 듣던 말이네.”
“…….”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쿠우우웅!
청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교도가 바닥을 내리밟았다. 단단한 땅이 진흙처럼 뭉개지며 파였다.
“……이곳에 있는 불신자들을!”
그의 입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모조리 쳐 죽여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마교도들의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신앙이란 목줄로 가까스로 통제되던 마교도들이 저를 속박하는 목줄을 뜯어냈다.
조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일사불란함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붉은 혈광을 뿜어내며 앞으로 내달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야수와도 같은 괴성이 울렸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달려들고 있음에도 분을 이기지 못한 마교도들은 앞서 달리는 이를 움켜잡아 끌어당기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들기 위해 안달이었다. 동료의 목을 물어뜯기라도 할 듯 포효했다.
“사숙!”
“그래, 온다!”
그 정신 나가 버릴 것 같은 광경을 응시하던 백천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내 뒤로 와라! 절대 옆에 있는 사형제와 떨어지지 마!”
“예!”
백천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마디를 마침내 내뱉었다.
“마교의 천적이 화산임을 저 짐승들에게 똑똑히 보여 줘라!”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훗날, 항주마화(杭州魔禍)라 지칭될 거대한 격전이 그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