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0화. 너희도 알게 될 거야. (5)
파아아앗!
저무는 해와 함께 백천이 쇄도했다.
땅을 찰 때마다 그의 몸은 삼 장이 넘는 거리를 비호처럼 날았다. 섬전이라는 말이 절로 연상되는 속도.
하지만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모두 그와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으니까.
백천이 슬쩍 옆을 보았다.
운검이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딱히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내심 안도한 백천이 이번엔 뒤쪽을 돌아보았다. 다들 뒤처지지 않고 따라붙고 있었다.
오검이야 이런 고속 이동을 흔히 해 보았으니 별걱정이 되진 않는다. 그가 걱정하는 건 다름 아닌 남궁도위와 임소병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병약해 보이는 임소병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궁도위 역시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붙는다.
‘대단하군.’
화산은 워낙 기초를 중요시하는 문파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저 청명이 놈이 기초만이 아니라 문파의 기동력이라는 측면도 신경 써 왔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각설하고, 임소병도 남궁도위도 기초부터 쌓아 온 화산의 속도에 크게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이들의 내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다.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군.’
백천의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겨우 이 정도의 경공으로 힘들 그가 아니다. 평소였다면 이보다 반 배 더 빠른 속도를 유지했어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천이 지금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주변에 포진한 붉은 홍의 차림의 살기등등한 무사들.
정파의 정제된 기세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거친 야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들이 마치 화산의 일행을 포위하듯 둘러싼 채 함께 달리고 있다.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들에게 딱히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부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과 칼을 맞대고 싸웠던 사이니까.
‘만인방…….’
만인방 특유의 백홍포(白紅袍)를 입은 정예들.
‘홍견(紅犬).’
처음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아마 분명 그럴싸한 이름이었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강호는 이들을 홍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붉은 개.
오직 주인만을 위해 충성하는 장일소의 개.
장일소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추종하는 이에 대한 비하가 섞인 멸칭(蔑稱)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오히려 그 이름을 기꺼워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들을 홍견이라 지칭하며 장일소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과시했다.
그렇기에 강호는 이들을 개라 부르면서도 두려워했다.
상징적인 백홍포를 걸친 채, 언제나 장일소의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고, 수족으로서 장일소의 적을 짓밟는 이들.
그 홍견이 지금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다.
때때로 정제되지 않은 기세가 날아들 때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정파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다. 날 선 야성이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인방은 이렇게나 강한가?’
전력을 다해 달리는 건 아니라지만, 지금 화산의 일행들은 경공이라면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라 자부한다.
그런데 만인방에선 이 속도에 따라붙는 홍견의 수가 무려 백이 넘는다.
만인방의 적사대를 상대한 경험과, 화산을 습격한 무리를 물리쳤던 경험 덕분에 내심 언제든 만인방 하나 정도는 상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감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백천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긴.’
이러니 만인방이 사패련의 수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거겠지. 제아무리 장일소가 잘난 놈이라고 해도, 받쳐 주는 세력의 힘이 부족했다면 절대 그 쟁쟁한 이들 위에 올라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타앗!
땅을 박차는 백천의 다리에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들은 적이다.’
그건 분명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백천도 경계하는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무시무시한 이들이 그들과 같은 적을 노리는 동료가 된다.
불안함과 든든함, 껄끄러움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느낌이 기묘했다. 그때 윤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숙. 언제쯤 도착할 것 같습니까?”
“이제 금방일 거다.”
구강에서 항주까지는 천 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루 꼬박 걷기를 열흘 지속해야 도달할 수 있을 거리지만, 이들에게는 불과 한나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무렵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아마 곧 항주에 진입할 것이다.
“……그럼 곧 보게 되겠군요.”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모두가 윤종이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교.
그 두 글자를 머릿속에 떠올린 백천이 자연스레 앞을 바라보았다. 무리의 선두.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을 말이다.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청명과 붉은 장포를 걸친 장일소의 뒷모습이 백천의 눈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내 생전에…… 저 둘이 나란히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화산의 제자들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청명이다. 평소에야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놈이지만, 전장에 선 청명은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장일소다. 화산에 있어서 장일소는 증오의 상징인 동시에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뒤따르는 이들을 나란히 이끌고 있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광경. 아니, 상상을 해 볼 이유조차 없었던 광경이다. 그러니 백천이 느끼는 이 지독한 이질감도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말을 하면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백천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제자들에게 그의 내심이 들렸을까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
‘저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니 도무지 질 것 같질 않군.’
아마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 느슨한 장일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긴장한 것 같군, 화산검협.”
청명은 장일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달릴 뿐이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네가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까. 너는 그저 적당한 때에 마무리만 해 주면 돼. 너 같은 꼬맹이에게 많은 것을 부탁하면 내가 너무 못나 보이잖니.”
그 순간 청명이 옆에서 달리는 장일소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뒤에서 달리는 백천에게도 보일 만큼 선명한 미소였다.
“흐음?”
장일소가 묘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지?”
“계속해.”
“응?”
“지껄일 수 있을 때, 지껄여 두는 게 좋을 거야. 이제 곧 그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호오?”
장일소가 흥미롭다는 듯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들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너 같은 놈이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그런데?”
청명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너희도 알게 될 거야.”
“…….”
“세상에는 계산으로 잴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말이야.”
청명은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슬쩍 돌려 뒤따르는 일행을 확인했을 뿐이다.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 그리고 당소소.
청명의 말에 안색이 변한 건 저 북해에서 마교를 겪어 본 이들뿐이다. 저들은 알 것이다. 청명의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아마 네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걸 보게 될 테니까.”
청명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장일소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거…….”
장일소의 입꼬리가 점차 뒤틀리듯 말려 올라갔다.
“기대되는군.”
장일소가 가볍게 손짓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달리고 있던 호가명이 빠르게 따라붙어 왔다. 장일소가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호가명이 속도를 늦춰 뒤쪽에 있는 홍견에 합류했다.
청명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장일소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웃으며 청명을 마주 보았다.
“왜? 뭐가 궁금하지?”
“……무슨 지시를 내렸지?”
“새삼스럽게. 네가 말한 대로 어떤 광경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한 것뿐이야.”
“…….”
“네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할 수 있는 걸 대비하지 않아서 당하는 건 천하의 머저리나 저지르는 짓이니까. 굳이 조언을 해 주시는데, 받아먹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겠니?”
청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에는 정파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조차도 그의 조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되레 이 사파 놈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놈에게는 정과 사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이용하지 못할 것의 구분만이 있을 뿐.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명과 천마는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런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강호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이놈의 손안에서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았을까?
그런 시선에서 본다면 어쩌면 천마와 청명이라는 두 존재로 인해 가장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장일소일지도 모른다.
“묘하게…… 불쾌한 시선이군.”
장일소가 붉은 입술을 뒤틀었다. 그의 장신구들이 연신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지 말렴. 눈을 뽑아 버리고 싶어지잖니?”
“미친놈.”
말은 살벌한데 목소리는 지독하게 상냥했다. 청명은 질색한 표정으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장일소가 어떤 놈이건 간에 태생적으로 상성이 맞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놈과 손을 잡는 건 이번만이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백천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청명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앞을 향했다.
“…….”
동시에 바삐 움직이던 그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조금씩 느려지다 빠른 걸음으로 화했고, 이내 느릿한 걸음이 되었다. 그러다 종내 완전히 멈춰 섰다.
바람처럼 달리던 이들 모두가 그 자리에 멈췄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숨죽인 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땅, 그리고 시신.
피가 스미고 말라붙어 검게 물들어 버린 땅을 처참한 시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들은 안다. 수도 없이 싸워 온 이들이기에 남겨진 광경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건 전쟁의 흔적이 아니다. 서로를 죽여 대고, 악을 쓰며 싸우고 저항한 이들은 결코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건…… 그저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일 뿐이다.
“우욱!”
당소소가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굽혔다. 곁에 있던 유이설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어떻게…….”
시체가 끝도 없이 널려 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한낱 개미조차도 이렇게 끝없이 죽여 대지는 못할 것이다.
저벅.
그 순간 장일소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게…….”
죽음으로 물든 대지를 앞에 두고 선 그는 붉은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온통 귀기로 물든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드리웠다.
“마교로군.”
색 옅은 두 눈에 짙은 살심이 고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