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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39화 (1,040/1,567)

1039화. 너희도 알게 될 거야. (4)

“그럼 살펴 가십시오.”

“잊지 마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인이 차가운 눈으로 법정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법정은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대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보겠소. 그 능수능란한 혀만큼 행동이 따르지 못할 시에는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주어졌던 특권은 모두 회수될 것이오. 아니!”

중년인이 엄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지금까지 그대들이 받았던 대우만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대사?”

“물론입니다.”

법정이 진중하게 대답했지만, 중년인은 영 미덥지 않다는 눈치였다.

“황상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

“그 노화가 그대에게 향하지 않기를 빌어야 할 것이오. 쓸모가 없는 강호인 따위는 무뢰배만도 못한 법이니까.”

“……아미타불.”

자리에서 일어난 법정이 눈을 감고 반장 하자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던 중년인이 몸을 돌렸다.

쿵!

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제야 법정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끼이이익.

잠시 후 다시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법계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방장.”

“와서 앉거라.”

“예.”

법계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뭐라 합니까?”

“뻔한 소리지. 황궁에서 이 사태를 심상치 않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지금 당장 우리더러 사교 무리를 처단하라 하는구나.”

“…….”

“그러지 못할 시에는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겠다는군.”

“그런…….”

법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하자 법정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불자답지 않은 조소였다.

“황궁은 늘 이런 식이지.”

원칙적으로 나라에선 무인들의 집단인 문파를 좌시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문파들에게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관무불가침의 원칙 때문에?

그럴 리가.

대외적으로야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건 관에서 강호에 관여하지 않기 위해 지어낸 명분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이유는, 강호무림의 존재가 저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서면 영토의 모든 곳에 황궁의 입김이 닿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했다면 반란이 어떻게 일어나고 군벌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게다가 현재 황궁의 영향력은 장강 이남으로는 극히 제한적이고 장강 이북에서도 완벽하지 않다. 특히 치안 측면에서는 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관의 입장에서도 강호의 존재가 그리 나쁠 게 없다. 적어도 정을 표방하는 자들은 문파가 존재하는 주변의 치안 정도는 확실하게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저 사패련이 부럽기도 하구나.”

“바, 방장. 그 무슨…….”

“그렇지 않으냐?”

법정이 작게 웃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사패련이고, 막상 일을 벌인 건 마교인데, 죄 없는 우리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잖느냐?”

법정의 말에 법계가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관과 무림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문제가 없을 때는 무도한 무뢰배 취급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 모든 책임을 물어 온다.

하지만 사파는 아니다. 애초에 사파는 딱히 거점이라는 게 정파만큼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독버섯 같은 존재다.

수군이 모든 곳을 장악할 수 없는 드넓은 장강.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깊은 산속. 그리고 행정의 공백이 존재하는 저 강남.

그 모든 곳에서 사파는 세력을 키워 왔다. 북경 가까이 자리해 도무지 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파와는 달리 말이다.

“정 급하면 직접 금군을 보내면 될 게 아닙니까?”

“북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구나.”

“아…….”

“그래서 금군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다. 되레 북경 주변의 금군들마저 북방으로 충원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런 와중에 장강 너머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겠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법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한 번에 몰려온다더니, 하필이면 상황이 이리 맞물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희더러 으름장을 놓았군요.”

“그렇겠지.”

법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법계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리 강호의 상황에 민감하게 굴 것이라면, 애초에 사패련이 발호했을 때 도움을 주었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랬으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황궁에서 바라보는 사패련과 마교는 전혀 다르다.”

“…….”

“사패련이 아무리 사도라 하나, 그들은 강호라는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이다. 저 장일소가 설령 강호를 일통한다고 한들, 감히 황제의 자리를 노리기야 하겠느냐?”

질문을 던진 법정이 고개를 저었다.

“장일소가 제아무리 야망 넘치는 자라고는 하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힘만으로 지배할 수 있는 강호와는 다르다. 나라를 다스리는 건 우리 같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방장.”

“하지만 마교는?”

법정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마교는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양민과 황제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사가의 법도도 황궁의 방침도 통하지 않지. 이미 황궁은 백 년 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이다.”

“하기야…….”

지나간 일을 그저 지난 일로 취급하는 강호와는 다르다. 황궁은 그 모든 일을 철저하게 기록하니까. 백 년 전 마교의 발호에 대한 기록 역시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리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

법계가 이제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그렇다 한들, 아직은 아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에게 등 떠밀려 강을 넘는다면 그 피해 역시 우리가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저들이 우리가 입은 피해에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하지만 황궁의 명을 어기면 일이 커질 수 있습니다.”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마음이 급해 그런지 저자도 실수를 저질렀구나.”

“실수라 하셨습니까?”

“금군이 모두 북방으로 차출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설사 우리가 저들의 명을 조금 어긴다고 해도 한동안은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아…….”

“늦지 않게 해결만 한다면 지금의 일을 굳이 따져 묻지는 않을 터이니 공연히 마음 급하게 휘둘릴 필요 없다.”

법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내심에는 내도록 미미하게 켕기는 것이 있었다.

가능 여부를 떠나서, 황궁에서 이토록 다급하게 요청을 보내는 것이라면 백성 된 도리로 당연히 그 뜻에 따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상황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저들은 여전히 항주에 머무르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답하는 법계의 마음은 실로 무거웠다.

마교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느리다는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이건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철저하게 항주라는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들의 마수에 희생되었을까 생각하면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고,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듯했다.

“사패련도 골머리깨나 썩겠구나.”

법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 상황에서 피어난 법정의 그 미소가, 법계의 눈에는 너무도 낯설어 보였다.

“방장. 타 문파의 지원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아마 곧 연락이 있을 것이다.”

“너무 늦지 않습니까! 다른 곳도 아닌, 마교입니다! 어찌하여 이리 시간을 끈단 말입니까?”

“거리가 있지 않으냐. 지금 당장 준비하여 구원을 보낸다 해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

법계의 얼굴은 점차 굳어졌다.

얼마 전 사패련 때문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와는 법정의 반응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혹여…….’

순간 떠오른 망측한 상상을, 법계는 재빠르게 지워 냈다. 이건 감히 그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법정이 그런 그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생각이 많구나.”

“아닙니다, 방장. 저는 그저…….”

“법계.”

“예, 방장.”

“알지 못한다는 것은 속 편한 일이다.”

“…….”

“하지만 때로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도 있는 법이다. 먼저 이해한 이의 의무는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는 이들에게 냉엄한 현실을 알려 주는 것이지.”

법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법계는 침묵을 지켰다. 법정이 설명을 이었다.

“소림의 입지가 예전만 하지 못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소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지.”

“……방장?”

“강대한 적이 있을 때는 따를 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적이 없어진다면 제 이득을 생각하기 마련이란다.”

법정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담담했다.

“곧 천하 만민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누가 이 강호의 평화를 지켜 오고, 정파의 정기를 수호해 왔는지 말이다. 그때가 되면 어째서 소림이 소림인지 알게 되겠지.”

“하, 하지만 방장……. 그렇게 되면…….”

“감수해야 할 일이다.”

법정이 가만히 불호를 외었다.

“외적과 맞닿은 성벽을 지키는 이들의 역할은 외적을 막는 것이 아니다. 그 목숨을 걸고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법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희생을 어찌 고귀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것도 때로는 있는 법이다.”

법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찌하여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는 알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법정의 눈이 차가웠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때로는 가혹하다. 그저 올곧은 마음만으로는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 다른 이는 몰라도 너만은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법계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따라 법정이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도 달라 보였다.

“황궁 역시 결국에는 우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궁뿐이겠느냐. 구파도, 심지어 저 사파마저도. 그리고…….”

법정의 눈이 차게 빛났다.

하지만 그 순간 법계의 입이 열렸다.

“하나, 방장. 방장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황궁은 백 년 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더냐?”

“하면…… 저들이 진정으로 마교의 위험을 느끼게 된다면, 소림이 아닌 화산을 찾지 않겠습니까?”

법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 무슨…….”

그의 진노를 느낀 법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의 화산이 어디 과거의 화산과 같더냐?”

“죄송합니다, 방장.”

“이…….”

입술을 꽉 깨문 법정이 화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천우맹은 지금 어쩌고 있느냐?”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야지. 저들도 별수 없겠지. 저들의 협의란 결국 안전하다는 계산이 끝나고서야 외치는 것이니까.”

법정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눈치를 살피던 법계가 가만히 입을 뗐다.

“다만 그…….”

“다만?”

“……확실하지는 않은 소식입니다만, 화산검협을 비롯한 십여 명의 인원이 지난밤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확인은 아직이지만…….”

쾅!

말을 늘어놓던 법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법정 앞에 놓여 있던 다탁이 산산조각 나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바, 방장.”

“누구라 했느냐?”

“그, 그게…….”

“누구라고 했느냐!”

“화산검협. 화산검협입니다. 그를 비롯한 십여 명의 인원이…….”

“다시 확인해 보거라. 당장!”

“…….”

“뭘 하고 섰느냐!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예, 예! 방장! 지금 당장 확인하겠습니다!”

법계가 기겁하여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던 법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화산검협.’

과한 반응이라는 것은 법정도 알고 있다. 고작 십여 명이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화산검협이라는 네 글자를 듣는 순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강을 넘었다고?”

법정의 두 눈에서 한기가 흘러넘쳤다.

떨어진 염주가 냉골 같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싸늘하게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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