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화. 너희도 알게 될 거야. (2)
만금대부는 가만히 제 어깨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비어 버린 어깨를 응시하던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꼴이 말이 아니군.”
이건 교만의 대가다.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와도 협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 금력으로 회유할 수 없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니까. 그게 교만이었단 걸 깨닫는 대가로 팔 하나를 내어 준 셈이다.
천천히 손을 들어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어깨에 단면을 꾹 눌렀다. 절로 이가 악물릴 만큼 격렬한 통증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나쁘지 않아.’
물론 정신이 나가서 하는 말은 아니다.
팔을 잃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특히나 검수가 검을 쓰는 팔을 잃었다는 것은 그 손해를 감히 측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가 저지른 교만의 대가치고는 싸게 먹힌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저 마교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을 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쿵!
그 순간, 대전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만금대부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걸음마다 이어지는 짤랑거리는 장신구 소리는 장일소의 상징과도 같으니까. 만금대부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일소를 보았다.
장일소가 만금대부를 응시하며 물었다.
“상황은?”
“……아직은 항주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느리군. 지금쯤이면 항주를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말에 만금대부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이견이 있는 표정이라, 장일소는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말해 봐.”
“……뭘 말인가?”
“왜 저들의 진격이 늦다고 생각하지?”
만금대부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느린 게 아니다.”
“흐음?”
의외의 대답이었다. 장일소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만금대부가 다시 입을 열어 부연했다.
“놈들의 속도는 오히려 내 예상보다 더 빠르다.”
“하루가 지나도록 항주 하나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빠르다고?”
“그래.”
만금대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이 전혀 다르니까.”
“목적?”
“만약 사패련이 항주를 점령하려 한다면, 우리의 목적은 무력화일 것이다. 저항하는 이들을 빠르게 참살하고, 항주를 우리의 발아래 넣겠지.”
“그렇지.”
“하지만 놈들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놈들의 목적은 말 그대로 멸절(滅絶). 항주에 살아 있는 모든 걸 지우는 것이다.”
처음으로 장일소의 입이 다물어졌다. 급하게 보고를 받고 움직이느라 이 부분까지는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멸절이라고?”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모양이다.”
“그럼 놈들의 목적은 중원의 지배 같은 게 아니라 중원인들을 모두 죽이는 거다, 그런 뜻인가?”
“거기까진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만금대부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은 놈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 범위가 중원에 한정되지는 않으리란 점이겠지. 이미 백 년 전의 전쟁에서 놈들은 중원뿐 아니라 새외마저도 적으로 돌렸으니까.”
말을 하는 동안, 만금대부의 머릿속엔 주교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알 수 없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건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증오라기보다는 멸시였다. 적의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까워 보였다.
하나 남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 어째서 마교가 그토록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장일소의 반응은 그와 조금 달랐다.
“멸절이라…….”
장일소는 잠시 곱씹더니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제대로 미친놈들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시시한 놈들이었군.”
“……시시하다고?”
“그래.”
장일소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배할 것이 없다면 굳이 싸워야 할 이유도 없지. 움켜잡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교도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만의 낙원을.”
“멍청한 이야기군.”
하지만 장일소는 딱 잘라 일축했다. 그의 얼굴엔 얼핏 혐오감까지 스쳤다.
“어차피 사람이 사는 곳에 낙원 따윈 없어.”
“…….”
만금대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장일소가 내뱉은 지독한 살기가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주 꿈같은 소리만 지껄여 대는군.”
장일소가 제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그러자 살기와 일그러진 표정이 씻긴 듯 사라지고 평소처럼 느긋한 얼굴만 남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 어차피 죽일 놈들인걸.”
“……정파 쪽은?”
말이 없던 만금대부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장일소는 짧게 답했다.
“곧 온다.”
“……정말 지원을 받아 냈군.”
만금대부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장일소를 보았다.
‘보통 일이 아니지.’
장일소는 사파다. 그것도 사파의 패권을 틀어쥔 사패련의 련주다. 그런 이가 정파와 협의를 통해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아무리 필요하다 해도 정파 쪽에 먼저 손을 내미는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이건 장일소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딱히 지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일이지. 생각 같아서는 저 정파 놈들을 모조리 끌어들여서 화살받이로 쓰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말이야.”
“……확실히.”
“그러니 준비해야지, 만금대부.”
장일소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이건 본디 흑귀보가 해야 할 일이야. 내가 직접 나선다고 해서 네놈들이 발을 뺄 수는 없지. 역할은 해 줘야겠어.”
만금대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각오하고 있다.”
“그럼 움직여. 놈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남은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항주로 집결시켜.”
“알겠다.”
만금대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옮겼다. 장일소를 일별하고 밖으로 나가는 그의 두 눈이 어느새 서늘히 가라앉아 있었다.
‘마교, 정파. 그리고 만인방.’
상인이란 언제고 이득을 취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설사 그게 어찌 회복할 수 없는 막대한 손해를 입은 직후라고 해도 말이다.
무표정한 만금대부의 머릿속에는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을 골라내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너무도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만금대부는 알지 못했다.
제 등 뒤에 박혀 드는 묘한 시선을. 농락하는 듯, 먹잇감을 조이는 듯 기묘한 그 시선을 말이다.
* * *
강변에 만인방의 주력들이 도열했다.
일반적으로 사파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자유분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도열한 만인방의 군세는 그 자유분방함 속에 확고한 기강을 담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장일소의 곁에 선 호가명이 대답하며 껄끄러운 눈으로 강을 보았다.
“……련주님. 아무리 수로채에 대한 장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지만, 겨우 이들만으로는…….”
“괜찮단다, 가명아.”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수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머릿수는 흑귀보가 채워 줄 것이다.”
“……그것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련주님께서 직접 항주로 향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련주님께서는 사패련의 축이십니다. 한데 어찌 이런 일에…….”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시시각각 나를 망치려 하는구나.”
“…….”
“네 생각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안단다. 하지만 기억해야지.”
장일소의 두 눈이 요사스레 빛났다.
“비바람을 막아 주는 지붕과 따뜻한 볏짚에 취해 버리는 순간, 사슴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던 늑대도 던져 주는 뼈다귀에 만족하는 한낱 개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
“만인방의 방주건, 사패련의 련주건, 달라지는 건 껍데기일 뿐. 말해 보거라. 내가 누구더냐?”
“련주님께서는…….”
은근한 압력이 호가명의 전신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감각에 전율하며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패군 장일소이십니다.”
“그래.”
장일소의 피처럼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피에 굶주린 늑대 같았다.
“나는 장일소란다.”
이 이상 그 어떤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때 장일소의 시선이 강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척의 배가 보였다.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아니면 안 되지. 안 돼. 저 칼은 너무도 날카롭거든. 내가 아니면 누구도 제대로 다룰 수 없어.”
호가명은 접안해 오는 배를 주시했다. 눈빛에 슬쩍 긴장이 스쳤다.
그리 크지 않은 배에서 열 명 남짓한 무리가 내려 다가왔다.
호가명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적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놈들이군.’
솔직한 그의 감상이었다.
이곳은 강남. 저들에게는 적진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앞에는 만인방의 정예들이 모여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거침없이 다가오는 건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적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선두에는 한 냉막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호가명에게는 조금 낯선 그가 장일소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서더니 절도 있게 예를 표했다.
“화산의 일대제자 운검이 사패련의 련주를 뵙소.”
정중하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은 예의였다.
장일소의 시선이 비어 있는 운검의 소매로 향했다. 묘한 미소를 지은 장일소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힘든 걸음을 해 주셨군. 감사를 표하지.”
“별말씀을.”
이윽고 장일소의 시선이 운검 뒤에 선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래.”
귀기 어린 미소가 그의 얼굴에 크게 번졌다.
“적의 배 속에 들어온 심정은 어떻지, 화산검협?”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응?”
“돌아가는 길에 선물 삼아 네 목이라도 따 갈까 하고. 흔치 않은 기회잖아?”
“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혔다.
“그래, 그래. 이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지.”
청명이 뭔가 대꾸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담하러 온 거면 전 그만 돌아가도 됩니까?”
장일소의 시선이 말이 나온 곳으로 향했다.
“호오? 이거 반가운 얼굴이로군?”
웃음기 어린 눈으로 임소병을 바라본 장일소가 키득키득 웃었다.
“설마 녹림왕께서 친히 왕림해 주실 줄이야. 내가 아직 인심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야?”
“뱀 새끼도 인심을 얻나? 그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이런, 이런. 여전히 입이 거칠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짧은 대립은 끼어든 청명의 말에 의해 툭 끊어졌다.
“다 지껄였으면 출발하지.”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쏠렸다.
“지금 당장.”
장일소가 눈을 휘며 웃었다.
“원하신다면.”
장일소의 눈빛은 들끓는 듯했고, 청명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순간.
화산과 만인방의 정예들이 바닥을 박찼다.
목표는 항주.
마로 물든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