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4화. 우리가 그 옆에 없는 거다. (4)
느릿하게 다가온 배가 강변에 닿았다.
배 위에 선 장일소를 바라보던 윤종은 새삼스레 느꼈다.
참 괴이한 이다.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건,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저자가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린다.
과거 화산에서 저자를 보았을 때나 대산 어귀에서 보았을 때도, 흑룡채와 매화도에서 저자를 조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극적인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었으니 그런 느낌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장일소는 그저 존재만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바꿔 버리는 이라는 걸 말이다.
언제 크게 들썩일지 모르는 묘한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장일소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넓고 화려한 소매에 감추어져 있던 손이 드러나며 오색의 반지가 윤종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거…….”
입가를 손으로 가린 장일소가 두 눈을 크게 휘었다.
“내가 끼어들기에 적절하지 않은 순간이었나?”
딱히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위화감이 생겨났다. 저 장일소의 입에서 평범한 말이 나오는 건, 불자가 부처를 욕하는 것만큼이나 위화감이 들었다.
나룻배에서 내린 장일소가 느긋하게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찰박.
그가 얕은 물을 밟는 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장일소가 현종을 향해 가볍게 예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사적인 소회를 나누고 있는 거라면…… 적당히 물러났다가 다시 와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거든.”
그가 비웃는 듯 미소를 흘렸다.
저도 모르게 발끈한 백천이 일갈하려 했지만, 태연한 청명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눈치가 있는 놈이라면, 혼자 여기에 그 허여멀건 얼굴을 들이밀지는 않았을 텐데?”
“흐음?”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아니면? 그 모가지가 이제 지겨워져서 몸뚱이와 분리하고 싶어 안달이 나셨나?”
“하핫.”
장일소가 짧게 웃어젖혔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려무나. 우리도 이제 꽤 안면이 있는 사이잖니?”
오검이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청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싸늘하게 일갈할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쪽 입장도 좀 이해해 주면 좋겠군. 너 같은 놈과 같은 자리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 속이 안 좋거든.”
“그건 조금 섭섭한 소린데.”
“그러니까 사족은 치우고 지껄여 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장일소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요사스러운 분위기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홀로 붉은 장일소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제껏 그들이 봐 왔던 그의 어떤 모습보다 더욱 강렬했다.
“상황은 알고 있지?”
“누가 친절하게 전달해 주신 덕분에 말이지.”
청명의 말에 장일소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게 꽤 골치가 아파.”
청명은 침묵했지만, 백천은 결국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 잘났다고 설쳐 대더니, 마교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왔나? 사패련도 별것 없는 모양이로군.”
오검이 놀란 눈으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저 장일소에게 품은 분노야 서로 다를 것이 있겠냐마는, 그들은 차마 비아냥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저 장일소의 존재감에도 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눌렸기에 반발한 건지도 모른다. 백천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쯧쯧.”
장일소가 영 마음에 안 든단 얼굴로 백천을 보다가 청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화산 아이들은 영 버릇이 없네. 어른이 대화하시는데 끼어들고 말이야. 조금 혼을 내야 하지 않겠니?”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응?”
“화산에서는 예의를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나 지키라고 가르치거든.”
“…….”
“네게 예의를 갖출 바에야 지나가는 개에게 갖추는 게 낫지.”
“흐음. 그건 내가 개만도 못한 인간이란 소리 같구나.”
“잘 알아듣네.”
장일소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백천은 순간 저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고매하신 정파 분들께서는 욕도 격조 높게 하시는군. 나를 그렇게나 높이 쳐주시다니 말이야.”
“…….”
“솔직히 좀 감격스러운데?”
“입 털기는.”
두 사람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그 두 눈만은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교 하나 감당하지 못한다…….”
장일소가 아까 백천의 말을 되뇌더니 과장되게 한숨을 쉬고 눈을 내리깔았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야.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가 차가운 눈으로 청명과 그 너머에 있는 백천을 쏘아보았다.
“알아야지. 이 내가 마교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그 불에 타 죽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 불은…… 전 중원을 태우겠지. 장강을 넘어, 하남을. 그리고 섬서를.”
“개소리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원하는 게 뭐지?”
청명의 물음에, 장일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불길할 만큼 짙어졌다.
“많은 건 필요 없어. 칼 한 자루 정도면 충분하지.”
“칼?”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긴 힘든 일이지만. 아무래도 저놈들에게는 내 칼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단 말이지.”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럼 별수 없잖니? 손에는 익지 않고 위험해도, 잘 드는 칼을 빌리는 수밖에. 저 주교인지 뭔지 하는 미친놈의 목에 박아 넣을…….”
장일소가 눈을 곱게 휘며 청명을 응시했다.
“더없이 예리한 칼 말이야.”
청명의 얼굴은 이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장일소가 구원을 청해 오는 것까지는 그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사파니까.’
평범한 마교도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의 말대로 정말 주교가 등장했다면, 그 주교가 청명이 아는 ‘진짜’ 주교라면, 사파 놈들은 절대 잡을 수 없다.
경지를 넘어선 마공은 사공을 갈가리 찢어 버리니까.
정파를 상징하는 것이 협의고, 사파를 상징하는 것이 욕망이라면, 마도를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악의(惡意)다.
사파를 향한 악의가 아닌, 인간을 향한 악의.
청명조차 원리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마공은 평범한 무학을 짓눌러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과거의 그들은 수많은 격전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직접 상대해 본 적도 없는데, 추론으로만 그걸 파악했다는 거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장일소는 정말 소름 돋는 놈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그 모든 것을 파악한 머리가 아니라, 본인의 생각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이 강 너머로 향하는 저 결단력일지도 모른다.
“예리한 칼이라…….”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멍청한 사파 놈이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명검은 드는 이에게도 자격을 요구하는 법이지.”
“흐응?”
“너 따위는 명검을 들 자격이 없어.”
“글쎄. 어떨까?”
장일소가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다 일순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같잖은 비유는 여기까지 하자고, 화산검협.”
“…….”
“저 미친놈의 목을 베기 위해서는 네가 필요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은 나빠지지. 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내가 너 같은 놈과 손을 잡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지. 아니야. 그게 아니지, 화산검협.”
장일소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손을 잡는 게 아니란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주교를 상대하는 것뿐이지.”
“…….”
“잊지 않았겠지? 너는 내게 한 번 목숨을 빚졌다는 것을?”
청명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장일소의 어깨가 웃음을 참는 듯 들썩였다.
“왜? 하찮은 사파 놈에게 진 빚 따위는 없던 걸로 칠 셈이실까?”
청명이 싸늘한 눈으로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그러겠다면?”
“응?”
장일소가 고개를 갸웃하자 청명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사파 놈에게 갚을 빚 따위는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 셈이지?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할 건가?”
“무릎?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별안간 광소를 터뜨렸다.
내력 섞인 그의 웃음이 장강을 쩌렁쩌렁 울렸다. 오검은 순간 전해져 온 기세에 얻어맞은 듯 크게 휘청였다.
“무릎? 무릎이라고? 이 장일소가? 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는 눈물이라도 뺄 기세로 웃어젖혔다. 화려한 장신구들이 흔들리며 요란스럽게 울어 대었다. 묘하게 섬뜩한 광경이었다.
한참이나 어이없다는 듯 웃어 대던 장일소가 청명을 지그시 보았다. 눈에 귀기가 어려 있었다. 살짝 붉어진 그의 눈은 핏기 없는 흰 피부 사이에서 더없이 요사스레 빛났다.
“그래. 이 장일소더러 무릎을 꿇고 빌란 말이지?”
“…….”
“그러지.”
청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장일소는 오히려 더욱 여유롭게 짙게 미소 지었다.
“원하신다면 그래 드려야지.”
저벅.
장일소가 청명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무릎을 꿇고.”
또 한 발.
“고개를 조아리며 땅에 처박고.”
청명과 장일소의 거리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더 필요하다면…….”
이윽고 청명에게 바짝 다가선 장일소가 기묘한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 신발이라도 핥으며 빌지. 제발 도와달라고. 제발. 제발. 제발.”
그 모든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던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저 모든 행동이 장일소 특유의 과장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뱀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 섬뜩했다.
‘대체 저놈은…….’
저벅.
마지막 한 걸음을 또 다가선 장일소가 청명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래 드리지. 그거면 충분한가?”
그 순간.
청명이 손을 뻗어 장일소의 멱살을 움켜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장일소의 몸이 굽혀지며 청명과 장일소의 눈높이가 맞춰졌다.
바짝 가깝게 당겨진 장일소의 눈을 노려보던 청명이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
“빚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내 발로 갈 셈이었으니까. 그러니 하나 똑똑히 알아 둬. 나도 화산도, 네까짓 것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야.”
쿵!
청명이 장일소의 가슴을 밀쳤다. 휘청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준비나 똑바로 해 둬. 우릴 감당하려면 고생 좀 해야 할 테니까.”
“물론…….”
조소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장일소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의문 어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우리?”
“그래, 우리.”
“…….”
“필요하다고 했지? 주교의 목을 벨 칼이.”
“……그랬지.”
“이들이…….”
청명이 턱짓으로 제 뒤에 서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그 칼이다.”
그 목소리가 백천의 귀를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딱히 예리해 보이지는 않는데.”
“기대해도 좋아.”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직접 벼려 냈으니까. 주교의 목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네 목도 잘라 낼 만큼 날카롭지.”
“……그거참 기대되네.”
장일소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검을 바라보았다. 뜻을 짐작하기 힘든 묘한 미소를 짓던 그는 잠시 후 용건이 끝났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출발은 동이 틀 때다.”
“…….”
“그럼…… 다시 보자고. 정파의 애송이들.”
장일소는 왔던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